조의대부 검교상서▨복야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朝議大夫 檢校尙書▨僕射 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 유공(劉公) 묘지
상서형부원외랑 지제교(尙書刑部員外郞 知製敎) 이지심(李知深) 지음
금(大金) 정원(貞元)
1 3년 을해년(의종 9, 1155) 정월 18일에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 유공(劉公)이 나이 62세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이 해 2월 초7일에 서울 남산 언덕에서 장례지냈다. 아들 광주(光冑)가 ▨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주기를 원하니, 나 또한 고향[鄕黨]의 오랜 친구이므로 이에 서문(序文)과 ▨ 명(銘)을 짓는다.
서문에 말한다.
공의 이름은 석(碩)이고, 백주(白州)
2 사람이다. 증조 조(祚)는 관직이 대감(大監)에 이르렀고, 조부 한영(漢英)은 관직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에 이르렀으며 아버지 ▨▨는 관직이 사재주부(司宰主簿)에 이르렀다. 어머니 ▨씨는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다.
공은 사람됨이 온순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일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자라서는 힘써 ▨▨▨▨육(六)▨▨의 연원과 ▨ 백가지서(百家之書)에 널리 박식하여, 도덕(道德)이 속에 가득 찼다. 문장으로 ▨▨▨▨▨ 해(歲)에 ▨▨▨(〔과거에 급제〕)하여 양온승(良醞丞)이 되고, 함종현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3위(咸從縣尉)에 임명되자 다스림에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임기가 차자 궁궐로 들어와 내관(內官)이 ▨▨되었으며, 비서교서랑 ▨▨승 시대창령 권지각문지후 장주사(秘書校書郞 ▨▨丞 試大倉令 權知閣門祗候 掌奏事)를 거쳐 시각문지후 전중내급사 상의봉어 ▨▨예부원외랑 기거랑(試閣門祗候 殿中內給事 尙衣奉御 ▨▨禮部員外郞 起居郞)을 돌아가며 맡았다. 황통(皇統)
4 5년(인종 23, 1145)에는 안서대도호부부사(安西大都護府副使) 직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지금의 임금<毅宗>이 즉위하자 내▨(內▨)로 불려들어 와 다시 장주사(掌奏事)가 되었다. 황통 7년(의종 1, 1147)에는 상서예부낭중 충사관수찬관 비서소감(尙書禮部郎中 充史舘修撰官 秘書少監)이 되고, 황통 8년(의종 2, 1148)에는 추밀원우부승선 지병부사(樞密院右副承宣 知兵部事)가 되었다. 기사년(의종 3, 1149)에는 병부시랑 보문각학사(兵部侍郞 寶文閣學士)가 더해졌다. 천덕(天德)
5 3년(의종 5, 1151)에 추밀원지주사 사재경(樞密院知奏事 司宰卿)이 되고, 계유년(의종 7, 1153)에는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에 임명되어 ▨▨ 신(臣)▨자(資)▨▨▨▨▨▨▨▨▨ 짐(朕)이 명하여 왕실에 힘쓰기를 ▨▨▨▨ 아래로 백성을 위하여 폐단과 괴로움을 없애주어 국가에 ▨▨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 바야흐로 중서성[西掖]에서 반대하는 의견을 주장하면서, 일에 임해서는 돌이키지 않았으며, 임금이 싫어하는 빛을 보여도 숨기지 않았다. 동쪽 변경의 군사 일을 장악할 때에는 ▨▨▨과(果)▨ 승냥이의 마음이라도 스스로 몸이 안전한지 위험한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재주가 문무를 겸하여 능숙한 것이 이와 같았다. ▨▨ 관장하여 ▨▨지(之)▨▨▨ 선발하여 관에 아뢰니
6, 인재가 넘쳐나고 뽑은 선비 중 현명한 자가 많아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가까이에 모여들었다. 이른바 ▨▨ 그러한 부류를 천거하는 데 능한 것은 오직 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이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형제를 잘 섬겨 효행으로 소문이 났고, 중요한 지위에 올라 높은 작위와 후한 녹을 받아서는 마침내 ▨ 쉬지 않으니, 그 몸이 본래 ▨ 능히 탈이 없었으나 자주 병이 들었다. 갑술년(의종 8, 1154) 겨울에 병이 심해지자 수십 일 동안 휴가를 얻었다. ▨▨ 중에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질환이 조금 나아지자 관청에 나가 일을 본 지 1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시니, 가히 ▨ 크게 애통하다.
‘▨▨는 지위에 있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를 누린다’ 고도 하였으니, 공은 현명하고 또 어진 까닭에 ▨▨상(相)▨▨ 장수하는 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지위는 우상시(右常侍)에 지나지 않고, 나이는 겨우 예순이 넘자마자 돌아가시는 것인가. 대개 부귀는 ▨▨ 하늘이 ▨▨ 수명을 정해주는 것이다. 공은 ▨ 하늘이 내린 명(命)을 알아 즐겁게 생활하고 근심하지 않았다. 구태여 부귀와 빈천, 죽고 사는 것, 장수하고 요절하는 일은 가슴▨에 묻어두고 거리끼지 않았다. ▨▨▨ 명(命) 같은 것도 ▨▨▨▨ 보통 사람과 같을 따름이니, 우리 같은 사람이 공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은 처음 이씨(李氏)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과 장녀는 일찍 죽었고, 나머지 딸 하나와 아들 한 명은 모두 예를 올려 혼인하여 아직 잘 살고 있다. 다시 장가들어 ▨▨▨ 아들이 있다.
아, 공은 ▨▨▨ 조정에서 ▨ 다르지 않아 공(公)으로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 성인의 풍도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즉 공의 ▨▨▨▨향년(享年)▨▨▨삼한(三韓)▨▨이다. 이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리니, 비단 임금의 마음만 슬픈 것이 아니라 또한 선비의 ▨▨▨▨무(無)▨위(爲)▨ 대단히 애처롭지 아니한가. ▨ 공은 첫 시작을 잘한 것처럼 끝을 잘 맺었고,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때를 알았으며, 바른 것을 잃지 않았으니 즉 ▨▨▨▨있어 모두 다 하였다. ▨▨▨지(之)▨재(哉).
명(銘)하여 이른다.
궁궐에서 과거를 보아 일찌감치 ▨▨▨▨비(匪)▨▨▨▨▨ 마지막이 되었네.
세상의 재주 높은 영재를 먼저 얻으니 비록 세월에 따라 백관의 순서를 밟았으나
대기는 만성이라 ▨▨▨▨제(提)▨▨▨▨▨
집에 있으며 어버이를 섬기니 증삼(曾參)
7과 민손(閔損)
8
의 지극한 효에 이르렀고
▨▨임금을 보필하니 직기(稷棄)와 설(契)
9▨▨과 같이 도왔네.
▨▨ 호기로우니 천지가 ▨▨ 늠름한 몸으로
뒤에 ▨혜(兮)▨ 큰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