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고려국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사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주국(高麗國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司徒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尙書工部事 柱國)이고 추증된 시호 열정공(烈靖公)의 묘지명 및 서문
보문각교감 문림랑 상식봉어동정(寶文閣校勘 文林郞 尙食奉御同正) 황문통(黃文通) 지음
공의 성은 윤씨(尹氏)이고, 이름은 포(誧)이며, 자(字)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이름은 해(諧)이다. 그 선조는 춘주(春州)
1 횡천현(橫川縣)
2 사람으로 공신인 신복(新福)의 6세 내손(內孫)이고, 대조(大祖, 太祖)의 6세 외손(外孫)이다. 증조 수현(守玄)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봉(追封)되고, 조부 수기(修己)는 우복야 호부상서 상장군(右僕射 戶部尙書 上將軍)으로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조명(祚明)은 우복야 행형부낭중 겸 대자중사인(右僕射 行刑部郞中 兼 大子中舍人)에 추봉되었다. 외조 유설(庾說)은 검교대자첨사(檢校大子詹事)로, 원래 공신 금필(黔弼)의 후손이다.
공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문종(文宗) 대강(大康)
3 10년 갑자년(선종 1, 1084)에 국자제주(國子祭酒) 김근(金覲)공 문하에서 남궁시(南宮試)에 합격하였는데, 이 때가 송(宋) 원풍(元豊)
4 5년(문종 36, 1082)이다. 선종(宣宗) 대안(大安)
5 4년 무진년(선종 5, 1088)에 상국(相國) 최사추(崔思諏) 공, 최석(崔奭) 공 아래에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6 6년 경오년(선종 7, 1090)에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이 되고, 숙종(肅宗) 수창(壽昌)
7 5년 기묘년(숙종 4, 1099)에 직사관(直史館)으로 승진하였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곧 권직한림원(權直翰林院)으로 옮겼다. 건통(乾統)
83년 계미년(숙종 8, 1103)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영암군(靈嵒郡)
9의 지사(知事)가 되어 나갔는데 치적이 제일로 꼽혀서, 안부(按部, 按廉使)가 포상하는 글[狀]을 올렸으므로 조정에 이름이 났다. 7년 정해년(예종 2, 1107)에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에 임명되고, 예종 천경(天慶)
10 2년 임진년(예종 7, 1112)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서 광주목(廣州牧)
11의 수령이 되어 나가 머물렀다. 3년(예종 8, 1113) 봄에 예부원외랑 지다방사(禮部員外郞 知茶房事)로 돌아왔다. 거듭 승진하여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 知制誥)가 되니, 이 때가 송 선화(宣和)
12 4년 임인년(예종 17, 1122)이다.
이듬해에 인종(仁宗)이 공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
13를 주석(注釋)하여 올리게 하였다. 병오년(인종 4, 1126) 봄에 궁궐에 큰 불이 나자,
14 공이 몸으로 막으면서 사직을 지켰으니, 그 공적이 대사(大史)에 실려 있다. 정미년(인종 5, 1127) 봄에 남성시(南省試)를 주관하여 진사(進士)와 명경(明經) 100여 명을 뽑았다.
15 그 가운데 관직이 빨리 오른 인물로 내시 대부소경(內侍 大府少卿) 서순(徐淳), 예빈소경 겸 어사잡단(禮賓少卿 兼 御史雜端) 한정(韓靖)이 있고, 다음으로 현달(顯達)한 이들은 고자사(高子思), 허세수(許勢脩), 이당인(李唐仁), 최중거(崔仲居), 장영경(張令卿), 김승온(金承溫), 진현광(陳玄光)인데, 모두 당대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다. 임자년(인종 10, 1132) 여름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工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다.
계축년(인종 11, 1133) 가을 8월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고사(古詞) 300수(首)를 골라 모아 『당송악장(唐宋樂章)』이라 이름하여 1부를 만들었으며, 또 금(大金) 황통(皇統)
16 6년(인종 24, 1146)에는 『대평광기촬요시 100수(大平廣記撮要詩 一百首)』를 만들어 표(表)와 함께 올리니, 임금이 지주사(知奏事) 최유청(崔惟淸)을 보내어 칭찬하여 말하였다. “경은 나이는 많으나 총명함과 시문(詩文)을 짓는 재주는 젊은이 같으니, 나이를 생각하지 않음을 기뻐하며 찬탄합니다”
겨울 12월에 검교대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檢校大師 守司徒 叅知政事 柱國)를 더하였다. 또 당(唐)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서역기(西域記)』를 근거로 하여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치니, 임금이 그것을 보고 연사(燕糸) 일곱 묶음을 내려주었다. 이에 우승선(右承宣) 김존중(金存中)에게 명하여 악보(樂譜)를 물어 보게 하니, 이렇게 임금과 신하가 훌륭하게 만나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정도일 것이다.
공은 평소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지조를 크게 가지고 있었다. 학문에 밝고 정치에 통달하였으며, 음률(音律)을 두루 알았는데 특히 가사(歌詞)를 잘하였다. 만년(晩年)에는 항상 불경[內典]을 읽었다. 다시 합문(閤門)의 양로연(養老宴)에 가서 직접 손으로 베낀 『법화경(法華經)』한 축(軸)을 임금에게 직접 바치자, 임금이 이에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이어서 물품도 매우 풍성하게 내려주었다.
정원(貞元)
17 2년 갑술년(의종 8, 1154) 가을 7월 16일 정묘일에 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돌아가시니, 춘추 92세이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시호를 열정공(烈靖公)이라고 추증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이 해 8월 3일 갑신일에 서울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의 부인은 왕씨(王氏)로 (먼저) 사망하였는데, 5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영준(永濬)이고, 차남은 중태사(重太師) 경소(警韶)이며, 3남은 진사(進士) 영수(永洙)인데, 세 딸과 함께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4남은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영식(永湜)이고, 막내아들은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 영원(永源)이다. 영준과 영원은 뛰어난 재능으로 과거[春官]에 급제하였으니, 자식이 아버지의 업(業)을 잇고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준은 이미 죽었으나, 영원은 아직 녹봉을 받을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쉽다.명(銘)하여 이른다.
아, 공의 덕은 나라의 빛이어서
여섯 임금을 섬기며 조정의 주춧돌이 되었네.
지란(芝蘭)처럼 향기롭고, 금옥(金玉)처럼 낭랑하니
어진 까닭에 고요하여, 그 수(壽)가 이에 길어졌네.
관직을 그만 두고 물러나서도 이에 이십여 년[二紀]의 세월을 보내니
임금이 원로라 부르고, 진실로 재사(宰司)가 되었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고, 험하고 평탄하나 큰 절의를 폈으나
흘러가는 냇물은 머물게 하기 어려우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억만대의 후손에게 전해져서 훌륭한 이름이 사방에 퍼지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