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등사랑 검교대의소감(登仕郞 檢校大醫少監) 이군(李君)은 이름이 탄지(坦之)이고, 대대로 익양(益陽)
1 에서 살았다. 어려서는 재상 소하(蕭何)의 법률(法律)을 익히고,
2 자라서는 의약(醫藥)에 매우 밝았다. 마침 중국의 이름난 의관(醫官)이 장삿배를 따라 동쪽 땅으로 오니, 임금이 명령을 내려 이름난 가문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가서 그 의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공도 거기에 뽑혀서 신묘한 기술을 깊이 얻게 되었다.
무자년[著雍困敦歲](예종 3, 1108 )에 마침 북쪽 오랑캐[北狄, 女眞]가 국경을 침략해 오니, 군의 아버지 연후(延厚)가 비장(裨將)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물리치고 웅주(雄州)
3에 들어가 버티었다. 성(城)은 고립되고 도움이 끊겨 적에게 포위를 당했으나, 2년이 지나도록 굳건히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길도 막히고 통하지 않아서 한 명의 사신도 그 사이를 오갈 수가 없었다.
공이 서울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을 메고 길을 떠났는데, 정주진(定州鎭)
4 에 와서 큰 형[同包長]을 만나 아버지의 안부를 서둘러 물었다. 형이 말하기를 “근자에 첩자가 와서 말하기를 부친이 병이 들어 거의 돌아가실 지경에 있는 지가 며칠 째라고 한다. 내가 가서 찾아 뵙고자 하였지만 승냥이와 이리 같은 무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머뭇거리다가 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는 즉시 헤어져 원흥진(元興鎭)
5으로 달려가 전수선(轉輸舡)을 빌어 타고 백여 명과 함께 노를 저어 화도(花島)
6 로 갔다. 밤이 되어 방두포(邦頭浦)
7 아래에서 정박하였는데, 배가 웅주성 남쪽 문으로 들어가자 여러 장수들을 보고 아버지가 있는 곳을 물어, 이윽고 아버지의 막차(幕次)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여전히 병이 위독하여 침상에 누웠다가 내가 들어와 절하며 우는 것을 보고 턱을 움직여 말하였다. “네 두 형과 두 조카는 정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무서워 떨며 기어다니느라 아직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우리 막내아들이 혈혈단신으로 가시나무를 헤치고 호랑이 굴을 지나면서 나를 보러 왔구나” 잠시 후에 다시 말하였다. “내가 산 채로 오랑캐에게 포로가 된다면 이리저리 밟히며 일만하는 노역을 면할 수 없으니, 이런 지경에 빠진다면 곧 타향의 귀신이 되는 것이다. 지금 다행히 아들이 오니 비록 백골이 되어서라도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저녁에 비록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룻밤을 지나자 병세가 크게 나빠져 막사에서 돌아가셨다.
글을 올려 행영도통(行營都統)에게 알리니, 도통이 제사에 필요한 기구를 갖추어서 장례를 돕게 하고, 또한 군졸을 시켜 성문 밖의 높고 넓은 땅으로 옮겨 불교의 화장[茶毗]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7일이 지나자 유골을 거두어 상자에 넣고, 등에 지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강한 적(敵)이 개미 떼처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승세를 타고 돌진하니 도망할 곳이 없었다. 겨우 몸을 빼내어 도망쳐서 강가를 따라 도림포(桃林浦)
8에 이르러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 맹세하니 서울로 돌아갈 수가 있어서, 이에 서울 북쪽에 편안히 장사지낼 수가 있었다.
(공은) 나이 35세가 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9 예종(睿宗) 때에 적신(賊臣) 조광(趙匡) 등이 군사를 서경(西京)에서 일으켜 횡포를 자행하였다.
10 이에 명하여 나가 정벌하게 하니, 공이 약원(藥員)으로 대열에 참여하여 적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끝내 공(功)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낮은 관직에서 부침(浮沈)하면서도 하늘을 받들고 천명을 아름답게 여겨서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게 살았다.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향에는 은해(銀海)
11 라는 절이 있는데, 깨끗하게 트이고 넓은 곳에 자리 잡아 어리석은 세상의 일은 닿을 수 없으니, 나는 세상의 영화를 잊고 그 속에 돌아가 늙고 싶다”고 하였다.
황통(皇統)
12 9년 기사년[屠維大荒落](의종 3, 1149 )에 조정의 명령으로 대주(岱州)
13로 부임하였다. 잘 다스렸으나 얼마 되지 않아 질병으로 인해 탄핵되자 마침내 은해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맑은 마음으로 힘써 받들어 ▨▨재(▨▨齋)를 설치하고 향을 피워 부처님 안전[玉毫]에 예(禮)를 바친 다음, 승려들에게도 음식을 공양하였다. 끝난 다음 손님방으로 물러나 편안히 앉아서 「천수진언(千手眞言)」을 밤새 외우다가 단정하게 앉은 채로 돌아 가셨다. 공은 향년 67세이니, 바로 금(大金) 천덕(天德)
144년 임신년[玄黙涒灘歲](의종 6, 1152 ) 4월[余月]이다.
그 아들 난(鸞)이 울면서 친구에게 청하였다. “내가 불초(不肖)한 탓으로 일찍이 우구자(虞丘子)
15의 한탄이 있었으나 살아 계실 적에 극진하게 모시지를 못하였습니다. 문자로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원한 절의를 전하고자 하나,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내가 그를 위하여 명(銘)을 지어 이른다.
효성스러우면서도 공경함을 알아서 그 의(義)를 행하고
담백하면서도 욕심이 없어 그 떳떳함을 지켰다.
몸은 비록 외로웠지만 뜻은 굳세고
마음은 부모님 계신 곳에 있어서 죽음을 가볍게 여겼다.
선(善)하다고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지만
편안한 때와 장소에서 순(順)하게 가셨으니 어찌 가슴 아파 하겠는가.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