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진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자대사 호부상서 겸 삼사사(特進 金紫光祿大夫 檢校太子大師 戶部尙書 兼 三司使)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공(金公) 묘지명
내시(內侍)에 들어가 있으며 문림랑 시상서공부원외랑(文林郞 試尙書工部員外郞)이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아들 광중(光中)이 지음
공의 이름은 의원(義元)이고, 나주 광양현(羅州 光陽縣)
1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래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신라) 말에 난을 피했다가 이로 말미암아 (그 곳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아버지 양감(良鑑)은 수대보 문하시중 감수국사(守大保 門下侍中 監修國史)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상서우복야 중추원사(尙書右僕射 中樞院使) 연하(延嘏)의 딸로 서해군대부인(西海郡大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 정준(廷俊)은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守司徒 門下侍郞平章事)이고, 증조 책(策)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 翰林學士)이며, 고조 준(峻)은 삼중대광(三重大匡)이다. 준의 부친 길(佶)은 중대광(重大匡)인데, 길 이상은 옛날 습속에 가보(家譜)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모두 그 이름을 알 수 없다.공은 성품이 준엄하고 용모가 뛰어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나서 사람들의 급한 일을 들으면 항상 구해 주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제주(祭酒) 김근(金覲)공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였을 때 공이 17세에 합격하였다.
2 부음(父蔭)으로 장사랑 군기주부동정(將仕郞 軍器注簿同正)이 되고, 23세에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연주(漣州)
3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당시 예종(睿宗)이 선왕<肅宗>의 뜻을 이어 동쪽으로 여진(女眞)을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공은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다.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사졸의 앞장에 섰다. 여진이 웅주(雄州)
4를 포위하자 공은 성을 지키면서 잇달아 싸워 이기며, 포로를 잡고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웠다. 뒤에 적의 군사가 날로 강해져 길주(吉州)
5를 공격하니, 원수가 공을 불러 말하였다. “길주가 고립되어 위험한데 원병이 없으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장차 적에게 떨어질 것이오. 그대가 그것을 막으시오.” 공이 지병마사(知兵馬事) 이관진(李冠珎), 병마판관(兵馬判官) 허재(許載) 등과 더불어 성에 들어가 지켰다. 적의 우두머리가 원근의 이리 같은 무리를 모아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으나, 공은 사졸들과 어려움과 기쁜 일을 함께 하며 밤낮으로 굳게 지켰다. 원수가 이끄는 구원병이 패배하자 적들이 승세를 타서 하루는 목책을 부수고 성벽을 치면서 바람을 타서 불을 놓았다. ▨ 성이 거의 무너져 함몰되려 하였으나, 공이 한 명을 때려죽이고 드디어 꾸짖으니 적의 무리들이 조금 물러났다. 마침 날이 저물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겹성[重城] 26칸을 쌓았다. 새벽이 되자 적이 바라보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성을 함락시킬 뜻이 없어져 화의를 청하였다. 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드디어 화의를 허락하였다.
포위된 성을 지키고 있을 때 적은 매번 바람을 타고 떠들어대니 사람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였다. 공은 태연한 낯빛으로 더욱 사졸들을 격려하자 사람들이 이에 안정되어 모두 공의 의로운 용기에 탄복하였다. 무릇 고립된 군사로 위급한 성을 지켜서 적의 수많은 악한 무리들이 성을 함락시킬 뜻을 못가지게 하고 성문을 두드리며 화의를 청하게 한 것은 공의 힘이다.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되자 조서를 내려 길주도병마원(吉州道兵馬員)으로 삼았다. 예(禮)를 갖춰 그 동안의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니 간곡하게 위로의 말을 더하였다. 관작을 내리자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공(功)을 다투었으나, 오직 공만은 자랑하지 않았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옮기고, 호부낭중(戶部郞中)을 역임하였다.
계사년(예종 8, 1113)에 거란(契丹)에 들어갔는데 사신의 임무를 능숙하게 행하였으므로
6, 접대하는 자가 후한 예로 대해주어 온갖 물자가 갖추어져서 부족함이 없었다. 황제가 듣고 외국의 귀인이라 하여 숙소에 가서 몰래 보았다. 돌아오게 되어 국경에 이르자 일행을 전송하는 관리와 시종들이 덕에 감격하여 울면서 이별하니, 요사이 사신의 행차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거듭 승진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이 되고, 인종이 즉위하자 병부시랑 지다방사(兵部侍郞 知茶房事)로 고쳐졌다. 예빈경 지어사대사(禮賓卿 知御史臺事)로 옮겼다가, 호부상서 동지추밀원사(戶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 이 때에 외척<이자겸(李資謙)>이 ▨ 권력을 잡고 있었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궁궐이 불탔는데, 공은 규탄하는 직책에 있었으므로 시어사(侍御史) 송근(宋覲),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중(李仲) 등과 함께 의논하여 불지른 자를 탄핵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듣고는 미워하여 해를 입히고자 하였으나, 공은 집안에 머무르며 휴가를 얻어 몇십 일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척이 패하자 일족[族籍]이라는 이유로
7 양주
8사(梁州使)가 되어 나가니, 탄핵되려던 자들이 마음대로 한 것이다. 공이 다스리게 되자 어질고 은혜로워 사민(士民)들이 칭송하였다. 무신년(인종 6, 1128)에 임금이 그 무고함을 알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수령으로 옮겨 주었다. 임자년(인종 10, 1132)에 공부상서 안북대도호부사(工部尙書 安北大都護府使)가 되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벼슬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니,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 兼 三司使)에 임명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특진(特進)을 더하였다.
무진년(의종 2, 1148) 11월에 병이 들어, 12월 4일 성의 동쪽 임천사(臨川寺)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부의와 물품을 내려 장례일을 돕게 하였다. 19일에 진봉산(進奉山) 서쪽 언덕에서 화장[茶毗]하고, 계유년(의종 7, 1153) 12월 7일에 유해를 임강현(臨江縣)
9 북산(北山)의 서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향년 83세이다.
처음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석(李碩)의 딸과 혼인하여 1녀를 낳으니, (그 딸은) 예빈소경(禮賓少卿) ▨영서(▨永序)에게 시집갔다.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공은) 다시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이자인(李資仁)의 딸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광중(光中)이고, 2남 대균(大鈞)은 문림랑 전중내급사동정(文林郞 殿中內給事同正)이며, 3남 ▨용(▨庸)은 문림랑 위위주부동정(文林郞 衛尉注簿同正)이다. 장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최윤의(崔允儀)에게 시집갔는데, 공이 돌아가신 지 4년 뒤에 죽었다. 나머지도 모두 이름난 가문에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의 선조는 신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왕실을 섬겼다.
공은 과거[士科]에 우수하게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지만
전쟁에 종사하여서는 군사의 요체를 화합에 두었다.
흉포한 ▨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북으로 도망치게 하였고,
웅주(雄州)와 길주(吉州) 성을 지켜내며 뛰어난 공로를 여러 번 세웠다.
특별히 우리 임금이 즉위하니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고
관직에 임하여서는 백성에게 번잡하고 가혹한 것을 제거했다.
태산이 무너졌으니 ▨을 어찌할 것인가.
명(銘)을 새겨 무궁토록 하니 저 산하(山河)와 같이 영원하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