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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언이묘지(尹彦頤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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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윤언이(尹彦頤 : 1091~1150)는 고려의 명신 윤관(尹瓘)의 아들로, 17세에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갔다가, 25세되는 예종 9년에 진사시에 제1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금오위녹사 겸보문각교감(金吾衛錄事 兼寶文閣校勘),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등을 거쳐 예부랑중(禮部郞中)이 되어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고 전주목(全州牧)의 수령이 되었다. 그 뒤 37세에 다시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예부랑중(禮部郞中), 이부랑중(吏部郞中)를 거쳐 국자사업 보문각대제 지제고(國子司業 寶文閣待制 知制誥)가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 예부시랑(禮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권신 이자겸이 금(金)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하고자 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중군(中軍)을 지휘하여 큰공을 세웠으나, 개선한 뒤 정지상 등과 한 무리라는 참소를 받아 양주(梁州)로 좌천되었다가, 곧 광주목사를 제수받았다. 56세에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고 이듬해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59세에는 수한림학사(授翰林學士)가 되었으며, 60세 되던 해에 중군병마판사 겸동북면행영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兼東北面行營兵馬判事)가 되어 삼군(三軍)을 조직하던 중 병으로 별세하였다.
묘지명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인 김자의(金子儀)가 지었다.
중서시랑평장(中書侍郞平章) 문강공(文康公) 묘지명과 서문
조청대부 우산기상시 한림학사 지제고(朝請大夫 右散騎常侍 翰林學士 知制誥)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자의(金子儀)가 지음
황통(皇統) 8년(의종 2, 1148)에 임금이 바야흐로 덕망이 높은 원로에게 정권을 맡기고자 하여, 12월에 조서[制誥]를 내려 공을 은청광록대부 정당문학 판상서형부사(銀靑光祿大夫 政堂文學 判尙書刑部事)로 삼았다. 내려진 은혜가 두터웠으므로 공은 공손히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관직에 나가 도를 논하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려서, 나라 안으로는 백관을 바로잡고 나라 밖으로는 사이(四夷)를 다스려서 왕도가 다시 행해지니, 만세(萬世)에 끝없는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이듬해에 중군병마판사 겸 동북면행영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兼 東北面行營兵馬判事)를 더해 주자, 이에 삼군(三軍)을 새로 조직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얼마 있다가 형혹성(熒惑星, 火星)이 남두(南斗)를 범하자, 식자들은 모두 상부(相府)에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공이 9월 3일 군영에서 일을 보려고 문을 나섰으나 몸이 아주 좋지 않아서 곧 다시 돌아와 부인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가셨다. 광제사(廣濟寺)에 빈소를 마련하니, 나이 60세이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를 돕게 하고, 은청광록대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 주국(銀靑光祿大夫 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刑部事 柱國)을 추증하였다.
공의 이름은 언이(彦頤)이고, 자는 원로(元老)이며, 성은 윤씨(尹氏)로, 영평현(鈴平縣)사람이다. 증조부는 군기감(軍器監)으로 추증된 선지(先之)이고, 조부는 태자대보(太子大保)로 추증된 집형(執衡)이며, 아버지는 개부의동삼사 추충좌명평융척지진국공신 수대부 문하시중 판상서병부사 영평현개국백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推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 守大傅 門下侍中 判尙書兵部事 鈴平縣開國伯 監修國史 上柱國)인 관(瓘)으로 문숙공(文肅公)에 추증되었으며, 대묘(大廟)에 들어가 예종(睿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늠름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손에서 책을 떼지 않은 채 배고픔과 목마름과 더위와 추위를 모를 정도였고, 무릇 한 번 본 것은 문득 입으로 외었다. 박학하여 통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천문(天文)·지리(地理)·명서(命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오묘한 이치에 다다르니 속인과 비교하여 말할 수 없었다. 문숙공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할 것이니, 내가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소”라고 하였다.
건통(乾統) 7년(예종 2, 1107) 12월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올랐으며, 갑자기 동북면 행영병마사(東北面 行營兵馬使)가 상주한 바에 따라 사령(使令)이 되어 나갔다. (적이) 이미 가한촌(加漢村)을 공격하여 크게 두려워하고 놀랐었는데, 적의 군사가 갑자기 공격해 오자 군졸과 장수들이 궤멸되어 어지러워졌다. 공이 홀로 원수(元帥)를 모시고 날쌔고 용감하게 적을 쫓아내어 공을 이루니, 담당 관리가 포상을 추천하였다. 원수는 곧 공의 아버지이다.
계사년(예종 8, 1113)에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고, 갑오년(예종 9, 1114)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뽑혔다. 을미년(예종 10, 1115)에 금오위녹사 겸 보문각교감(金吾衛錄事 兼 寶文閣校勘)으로 옮기고, 경자년(예종 15, 1120)에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으로 옮겼다. 임인년(예종 17)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가, 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겼고, 12월에 예부원외랑 지제고(禮部員外郞 知制誥)가 더해졌다.
갑진년(인종 2, 1124)에 예부낭중(禮部郞中)이 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그 날 전주목(全州牧)의 수령으로 나갔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조서를 받고 대궐에 나아가 12월에 호부원외랑 지제고(戶部員外郞 知制誥)를 거쳐서 우사간(右司諫)으로 고쳐지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사관 수찬관(史館 修撰官)이 더해지고, 또 옮겨서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고 기거랑(起居郞)으로 고쳤다. 기유년(인종 7, 1129)에 예부낭중 지제고(禮部郞中 知制誥)로 옮겼다. 정미년(인종 5, 1127)에 형부의 관리[秋官]가 되어 옥사를 다스렸는데, 감옥이 23일간이나 비어 백성의 원통함이 모두 해소되었다. 이부낭중(吏部郞中)으로 바뀌었으나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으며, 국자사업 보문각대제 지제고(國子司業 寶文閣待制 知制誥)가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계축년(인종 11, 1133)에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가 더해지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12월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는데, 이로움과 해로움을 거리낌없이 말하여 간웅(姦雄)을 탄핵하였다. 갑인년(인종 12, 1134)에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에 더해지고, 오래지 않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일찍이 궁궐에 가서 「만언서(萬言書)」를 올려 옛부터 지금까지의 잘 다스려진 것과 어지러움, 당시 정치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말하니, (그 글이) 궁궐에 남겨져 있다. 또한 현명한 자를 나아가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물러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그러한 까닭에 일찍이 형부상서(刑部尙書) 문공유(文公裕) 공(公), 한림학사(翰林學士) 권적(權適) 공(公) 등 수십여 명을 천거하였으며,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의 머리를 베어 나라의 성문에 걸어두고 뒷사람에게 경계하고자 하였다.
바야흐로 금(大金)이 전성기를 맞아 우리 나라를 신하라고 부르게 하고자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어지럽게 논의하였는데, 공이 홀로 간쟁하여 말하였다. “임금이 환난을 당하면 신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니, 신하는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진(女眞)은 본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신복(臣僕)이 되어 차례로 임금[天]께 조공을 바쳐왔고, 국경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우리 조정의 호적에 올라있는 지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이 어떻게 거꾸로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때에 권신<李資謙>이 임금의 명령을 제 멋대로 정하여 이에 신하를 칭하면서 서약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진정 인종의 맑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공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슬퍼하였다. 바로 그 뒤 금의 군대가 우리를 침범하려 하고 안으로는 난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공이 일어날 변란을 미리 헤아리는 통찰력과 식견을 가졌다는 것을 더욱 더 알 수 있다.
을묘년(인종 13, 1135)에 서경(西京)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명하여 공을 중군좌(中軍佐)로 삼았는데, 공이 으뜸가는 대책을 세우니 공로가 제일이었다. 병진년(인종 14, 1136)에 개선(凱旋)하였으나 참소를 당하여 양주(梁州) 로 좌천되었는데, 다스리고 베푼는 것이 으뜸이었다. 무오년(인종 16, 1138)에 인종의 오해가 풀어져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제수하여 임시로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경신년(인종 18, 1140)에 이르러 조사(朝謝)를 아울러 얻어서 관직에 제수되게 되자 그 은혜에 감사하는 글[謝表]를 바쳤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신이 좌천되어 가는 날 저녁 출발할 때까지도 죄를 얻은 까닭을 알지 못하고 다만 걱정만 가득하였습니다. 중군(中軍)에서 올린 글을 보니 ‘언이(彦頤)는 지상(知常, 鄭知常)과 사당(死黨)을 결성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의논하였고, 임자년(인종 10, 1132)의 서경 행차 때에 임금에게 연호를 세우고 황제를 칭할 것을 청하고, 또 국학생을 꾀어 상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금(大金)이 격노하면 그 틈을 타서 일을 벌여 마음대로 사람을 처치하고자, 외부 사람과 붕당을 지어 불궤(不軌)한 짓을 꾀했으니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두 번 세 번 그것을 읽어 본 후에야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습니다.
<뒷면>
연호를 세우자는 이 청은 실로 임금을 높이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태조(太祖)와 광종(光宗)이 그렇게 한 적이 있고, 지난 문서들을 살펴 보건대 비록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도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국이 일찍이 군사를 내어 공격한 적이 없고, 우리도 그 일이 감히 (예를)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오늘날 같이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세상에 도리어 참람(僭濫)된 행동이라고 이릅니까. 신이 일찍 의논한 것이 죄라면 그러할 수 있겠지만, 사당(死黨)을 결성했다거나 금을 격노하게 하였다는 것과 같은 말은 말이 너무 심하며 본말(本末)이 서로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가사 강한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다면 대저 막을 시간도 없어 급급할 터인데, 어찌 그 틈을 타서 일을 꾸미겠습니까. 붕당을 지었다는 사람이 누구이며, 처치하겠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만약 화의를 맺지 않고 전쟁을 벌인 즉, 패하여 몸을 숨길 곳도 없을 터인데 어떻게 마음대로 도모하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일찍이 대화궁(大華宮)을 건설하는데 관여하지 않았고, 또 백수한을 천거할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정지상과 같고 다름은 폐하께서 밝게 통찰(洞察)하시는 바입니다. 운운”
이로써 공이 검소하고 정직하며 덕(德)은 작은 양[羔羊]과 같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가고 올 때, 공문(公門)으로 나가서 사문(私門)으로 들어오고 사문을 나오면 공문으로 들어갈 뿐이었으며, 끝내 개인적인 사귐으로 나다니지 않았으니, 인종이 그것을 깊이 알았다.
무신년(인종 6, 1128)에 송(大宋) 상서(尙書) 양응성(楊應誠)공이 (금을 치기 위해) 길을 빌리는 일로 왔는데, 인종이 공에게 명하여 송에 글을 보내 알리게 하였다. 공은 일찍이 물건 하나에도 마음을 두지 않아 대개 재물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金子儀] 또한 이에 참여하였는데, 갑자기 하루는 강왕(康王)이 환송식을 성대하게 베풀어 주니, 공이 이에 감사하는 표를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의 아버지는 선왕의 신하 윤관으로 세 차례 중국 조정에 들어와 태양보다 맑은 빛을 보았고, 두 번 동쪽 오랑캐를 정벌하여 (그들이) 황천에 한을 남기게 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유산(乳山) 아래에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크게 일어나 뱃사람이 모두 엎어지고 자빠졌다. 공은 곧 의관을 바로 하고 황제의 회답조서[廻詔]를 품에 안고 뱃머리에 올라 머리를 풀고 향을 피워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마치니, 이내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또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그렇게 하였더니 한 순간에 우리 나라의 홍주(洪州) 경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진정 (하늘도 감동할) 지극한 정성을 가진 군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단명하니 어찌 안회(顔回)와 서로 다르겠는가.
공은 일찍이 추충수정안사공신 수대보 문하시중 판상서호예부사 감수국사 상주국(推忠守正安社功臣 守大保 門下侍中 判尙書戶禮部事 監修國史 上柱國)이고 사정공(思靜公)으로 추증된 김약온(金若溫)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일곱 명을 낳았다. 장남은 시경시령(試京市令) 인첨(鱗瞻)으로 임자년(인종 10, 1132)에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고, 평장사(平章事) 한유충(韓惟忠)공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명을 낳았는데, 장남 종악(宗諤)과 차남 종회(宗誨)는 조음(祖蔭)을 받아 모두 관리가 되었다. 차남은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자양(子讓)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 최온(崔溫)공의 딸과 결혼하였다. 3남은 직사관(直史館) 자고(子固)로 갑자년(인종 22, 1144)에 진사제에 합격하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문공유(文公裕) 공의 딸에게 장가갔다. 4남은 조계종 중대사(曺溪宗 重大師) 효돈(孝惇)으로 계해년(인종 21, 1143)에 대선(大選)에 상품(上品)으로 급제하였다. 5남은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 돈신(惇信)으로 정묘년(의종 1, 1147)에 진사제에 급제하였고,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김단(金端)의 딸에게 장가갔다. 6남은 군기주부동정(軍器主簿同正) 돈의(惇義)로 대학생(大學生)으로 있다. 7남은 일찍 죽었고, 딸 네 명도 모두 사망하였다.
공은 바라보면 엄하여 두려워할 만하나, 가까이 가면 따뜻한 사람이어서 세상 사람이 모두 참으로 재상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공은 결혼한 이래 바깥을 출입하면서 일찍이 다른 여자와 사귄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충정과 신의가 지극한 것이다. 공이 잘못 사람들에게 거리끼게 되어 죄명이 정안(政案)에 기록되었는데, 인종이 더욱 가슴 아파하여 특별히 지시하여 삭제하여 없애도록 하였으나 담당 관리가 굳게 고집을 부렸다. 지금의 임금<毅宗>이 즉위하여 과감하게 결정하여 마침내 없애니, 이른바 신하를 알아주는 사람은 임금 만한 이가 없다고 한 것이다.
황통(皇統) 5년(인종 23, 1145)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받고, 6년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받았으며, 8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받았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바야흐로 인종과 지금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날마다 임금을 모셨다. 한 차례 안찰사<提按>가 되고 다시 동북면 병마부사(東北面 兵馬副使)가 되었으며, 두 차례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使)가 되었는데 (그 치적이) 모두 임금의 뜻에 부합되었다. 또 남성시(南省試)의 좌주(座主)와 (예부시의)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뽑은 사람 중에 어진 이가 많았다. 갑인년(인종 12, 1134)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임금이 「월령구의(月令口義)」를 지어 강의하게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밝히자 곧 비가 내렸다. 매번 경연(經筵)에서 강(講)을 바치게 하니, 인종이 보석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하사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다.
정묘년(의종 1, 1147)에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여러 해 미결된 전민(田民)의 송사를 모두 처리하였고, 또 군대 20만 여명을 훈련시키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임술년(인종 20, 1142)에 공이 인종을 봉책(封冊)하러 온 사신[行李]의 접반(接伴)이 되었는데, 공은 마음을 열어 대화하고 오랑캐로 대하지 않았다. 무진년(의종 2, 1148)에 지금의 임금<毅宗>을 책봉하는 예를 행하면서 임금이 승평문(昇平門) 바깥에 나가서 사신을 영접하지 않게 하는 것을 관례로 삼게 하였다. 무릇 체협(禘祫) 등 국가의 대례(大禮)를 지낼 때에도 상세하게 조사하여 하나라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였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게 하였으므로, 어진 아내인 광양군대부인 김씨(光陽郡大夫人 金氏)는 나라에서 내려주는 물품을 받았다.
경오년(의종 4, 1150) 4월 14일 임강현(臨江縣) 용봉산(龍鳳山) 숭복사(崇福寺) 동쪽 기슭에 유골을 장례지내니, 아버지 시중(侍中) 문숙공(文肅公)의 능침(陵寢)과 같은 경내이다. 사람들이 일찍이 나와 함께 말하였다. “공은 곧 해동(海東)의 공자(孔子)입니다.”
명(銘)하여 이른다.
덕이 높으신 공이여, 많은 사람 중에서 특출하고
총명하고 정직하여 즐거워하니 천성이도다.
육경(六經)을 깊이 공부하고, 여러 역사서를 섭렵하면서
온 경전을 마음에 새기고, 입으로 문득 외우도다.
성명(性命)의 이치와 도덕의 근원을
뉘라서 우리 공처럼 거침 없이 통달하리오.
나라를 공명정대하게 이끌고, 백성의 어버이요 스승이 되니
충과 효가 온전히 세워져 한 가문에 모이도다.
문장을 써 내리면 천고에 으뜸이라
오랑캐는 소문을 듣고 겁을 먹어 쓸개를 떨어뜨렸고
간사한 무리들도 공의 덕을 바라보면 두려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네.
공로와 명성은 썩지 않으리니, 글 가운데 남아 있으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