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조의대부 검교대자대보 수국자제주 한림학사 보문각학사 지제고(高麗國 朝議大夫 檢校大子大保 守國子祭酒 翰林學士 寶文閣學士 知制誥)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권공(權公) 묘지명
조청대부 상서좌승 지제고(朝請大夫 尙書左丞 知制誥) 김자의(金子儀) 지음
공은 안동부(安東府)
1 사람이다. 증조부는 호장(戶長)이자 배융교위(陪戎校尉)인 균한(均漢)이고, 조부는 정조(正朝)에 추봉된 좌섬(佐暹)이며, 아버지는 검교대자첨사(檢校大子詹事) 덕여(德輿)이다.
공의 이름은 적(適)이고, 자는 득정(得正)이다. 사람됨이 맑고 밝고 너그러웠으며, 겉과 속을 꿰뚫었으나 입으로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대하면 빈천(貧賤)을 실행하고, 부자와 귀인을 대하면 부귀(富貴)로 베풀어 주었으며, 이민족[夷狄]을 대하면 이민족의 방식대로 행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본심이었다.
13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비록 나이 든 선비나 경험 많은 학자라 하더라도 표점을 찍어 바로 잡아 줄 일이 없었다. 19세가 된 임진년(예종 7, 1112)에 해당 관청에서 시험을 치르면서 ‘형벌을 내리는 것은 형벌이 없어지기를 기약하기 때문이다[刑期無刑]’라는 부(賦)를 지어 합격하였다. 그러나 논장(論場)을 미쳐 치르기 전에 부친상을 당하니, 지공거(知貢擧) 오연총(吳延寵)공이 말하였다. “논(論)에는 아직 합격하지 않았지만, 병제(丙第)로 뽑을 만합니다.”
2 상복을 벗게 되자 공은 날마다 선생과 웃어른들과 더불어 부(賦)와 시를 짓고 술을 마셨는데 보통 사람을 넘는 기상이 있으니, 선생과 웃어른들이 모두 어려워하였다.
청평산 문수사(淸平山 文殊寺)에서 노닐면서 거사(居士) 이자현(李資玄) 공을 만나자,
3 거사가 평생의 도우(道友)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일찍이 밀실에서 선의 요결[禪訣]을 주었다. 여러 중들과 더불어 이치를 말하니 모두가 우러르며 복종하였다. 20세에 북원(北原)
4의 개선사(開善寺)에 놀러 갔다. 이 때 진사(進士) 신의부(申毅夫)라는 사람이 있어 꿈을 꾸니 한 위인이 와서 알려주었다. “내일 귀양간 신선이 이 곳으로 올 것이오.” 공이 오니 과연 그 꿈이 맞아 떨어졌으므로 시를 지어 주었다.
그대가 곧 신선의 나그네임을 알겠소이다.
잠시 인간 세상에 귀양왔으니 즐겁게 노십시오.
또 개선사 별채에서 『기신론(起信論)』을 읽었는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자 감동하고 깨달아서 눈물을 흘렸다. 무릇 읽어둔 조목은 반드시 마음 속에 기억해두니 가히 총명하다고 할 것이다.예종(睿宗)이 공 등 5명을 뽑아 중국에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는데,
5 중국 황제<徽宗>가 직접 글을 써서 조서를 내려주며 말하였다. “짐은 고려가 대대로 앞사람을 이어 그 미덕을 이루는 것을 더불어 기뻐하는 바입니다. 능히 생도를 보내왔으니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시오.” 편전(便殿)에 오게 하여 뜰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친히 문장을 살펴보았는데, 참으로 가려낼 만한 것 중에서 공의 글과 뜻이 모두 좋았으므로 1등으로 뽑았다.
6 공사(貢士) 제1인의 예에 따라 벼슬을 줄 것을 관리에게 명하니, 관반사(館伴使)인 선화전학사 조청랑(宣和殿學士 朝請郞) 왕공보(王公黼)와 동관반사(同館伴使)인 추밀원도승지 지객성사(樞密院都承旨 知客省事) 범눌(范訥)이 아뢰었다. “신 등이 우러러 생각하건대 폐하가 성인과 같이 홀로 지혜롭고 도리를 환하게 아시어, 학교를 크게 일으키고 주(周)의 서고(書攷)와 논변(論辨)의 풍부하고 성대함을 회복하였으니, 그 가르침이 사해(四海)에 이를 것입니다. 정화(政和)
7 5년(예종 10, 1115)에 고려에서 중국의 덕행을 사모하여 관리에게 요청하여 그 나라의 자제 김단(金端) 등 5명을 보내어 서울에서 학업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받아들여 대학에 두고 그들을 위하여 스승을 두었습니다. 학교를 열어 고기와 쌀을 넉넉하게 주고 매 달, 매 계절과 매 년마다 시험을 치르니 가르치고 돌보는 것이 심히 두터웠습니다.”
단 등이 오경(五經)을 나누어 받아 밤에도 낮을 이어 부지런히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아, 3년이 지나자 행실과 재능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공이 가장 뛰어났다. 7년(예종 12, 1117) 2월 기묘일에 대궐에서 친히 시험을 치러 정치를 하는 도리와, 당시에 힘쓸 정책 및 기자(箕子)가 지은「홍범(洪範)」
8의 도(道)의 대의에 대해 물었다. 단 등이 고금을 상고하여 서로 다른 것을 정리하고 편을 이루어 끝을 내고, 다시 각자가 임금의 정성에 보답하는 글을 아름답게 짓기를 마치니 심히 돈독하였다. 황제에게 바치자 이미 한밤중의 독서시간[乙夜之觀]이 지났지만, 새로 직접 글을 써서 ▨ 상을 주었다. 3월 경인일에 숭정전(崇政殿)에 행차하여 상사(上舍)와 급제(及第)를 함께 내리고 벼슬을 주어, 진봉사(進奉使) 이자량(李資諒)을 따라 귀국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 해 고려로 돌아오니
9 임금이 기뻐하여 좌우위녹사 승무랑(左右衛錄事 承務郞)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차례대로 청요직을 역임하였는데 국학(國學)에 있었던 것이 몇 년인지를 알 수 없다.
임인년(예종 17, 1122)에는 명주(溟州)
10의 수령이 되어 나가서 잘 다스렸고, 을사년(인종 3, 1125)에는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글을 올려 합부(陜府)
11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금성(錦城)
12으로 옮겼는데 모두 평판이 좋았다. 성의 남쪽에 목포(木浦)
13가 있는데 물이 맑아서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임기가 차서 대궐로 돌아가려 하자 그 포구의 물이 다시 탁해지니 주(州)의 사람들이 깨끗한 정치의 증험이라고 말하였다.
올라 와 예부원외랑 지제고(禮部員外郞 知制誥)가 되었다가 낭중 겸 대자사경(郎中 兼 大子司經)으로 옮기고, 국자사업 보문각대제(國子司業 寶文閣待制)로 바뀌면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무오년(인종 16, 1138)에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어 나가고, 경신년(인종 18, 1140) 12월에 시상서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지제고(試尙書禮部侍郞 翰林侍讀學士 知制誥)로 옮겼다. 이듬해에 중국에 들어가는 하상존호사(賀上尊號使)가 되었는데 임금의 뜻과 잘 맞았다. 시형부시랑(試刑部侍郞)으로 관직이 바뀌었으나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임술년(인종 20, 1142 ) 3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어진 인재를 많이 뽑으니
14 모두 공이 힘쓴 것이다. 4월에 시(試)를 덜어내면서
15 한림시강학사 지제고(翰林侍講學士 知制誥)를 겸하였으며, 12월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겼으나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계해년(인종 21, 1143) 5월에 전(前) 해의 협례(祫禮) 제사에서 응제(應制)한 공으로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로 옮겼다가, 12월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옮겼는데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갑자년(인종 22, 1144) 정월 은사(恩賜)로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를 더하고, 2월에 동북면 병마부사(東北面 兵馬副使)로 나갔다. 8월에 적전(籍田)의 일에 종사하고, 조청대부(朝請大夫)로 옮겼다. 황통(皇統)
16 5년(인종 23, 1145) 시국자제주 한림학사 보문각학사 지제고(試國子祭酒 翰林學士 寶文閣學士 知制誥)로 옮겼다가 을축년(인종 23, 1145)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使)가 되었고, 4월에 조의대부(朝議大夫)를 더하였으며 그 달에 시(試)를 덜어내었다.
17 7월에 검교대자대보(檢校大子大保)로 바뀌면서 본직(本職)을 행하였다.
향년 53세로 병인년(의종 즉위, 1146) 12월 20일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정광사(定光寺)에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무진년(의종 2, 1148) 2월 13일에 용호산(龍虎山)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은 영덕군부인 김씨(盈德郡夫人 金氏)와 결혼하여 자녀로 아들은 다섯 명을 낳았다. 대방(大方)은 국학(國學, 國子監)의 여택재(麗澤齋) 학생이자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이고, 발진(發眞)은 흥왕사학도(興王寺學徒)이며, 돈례(敦禮)는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며, 돈신(敦信)은 부처를 좇아 머리를 깎았으며, ▨▨▨은 강보(襁褓)에 있다. 딸은 넷으로, 장녀는 보문각수교 예빈승동정(寶文閣修校 禮賓丞同正) 최윤인(崔允仁)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예빈주부동정(禮賓主簿同正) 황보서(皇甫서)에게 시집갔는데, 두 딸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아, 옛사람들은 태어나는 것은 잠시 오는 것이며, 죽음이란 잠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오래되도다, 권공(權公)이여. 뛰어나고 깨끗한 성품을 지니고
어려서부터 늠름하기 어른과 같았다.
임금의 명령에 응해 송(宋)에서 학교에 나가 공부하니
3년이 되지 않아 학업을 크게 이루었다.
황제의 궁궐에서 치른 시험에 1등으로 발탁되니
천자의 융숭한 조서가 고금에 으뜸으로 빛나는도다.
장부가 되어 돌아오니 중외에서 우러러보고 칭송하며
예종도 기뻐하며 특별한 기색을 보이셨네.
자미(紫薇, 宮闕)와 옥당(玉堂, 翰林院)에서 홀로 중요한 문필을 담당하고
난대(蘭臺, 門下省)와 봉합(鳳閤, 中書省)에서 넉넉하게 맑은 기운을 불어넣으니
사직(社稷)을 지키는 자요, 나라의 영광이로다.
불행하게도 단명하니 안회(顔回)
18와 같은데,
한 점 무덤[靈臺]에는 단청(丹靑) 무늬가 없구나.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