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石>
개부의동삼사 검교대보 호부상서(開府儀同三司 檢校大保 戶部尙書)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돌아가신 허공(許公)의 묘지명과 서문
문림랑 시상서예부시랑 지제고(文林郞 試尙書禮部侍郞 知制誥)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정(金精)이 지음.
갑자년(인종22, 1144) 4월 16일에 친구인 시예부원외랑(試禮部員外郞) 허순(許純)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명(銘)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공을 매우 잘 알고 있으므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이름은 재(載)이고, 자는 수강(壽康)이며, 공암(孔嵒)
1 사람이다. 증조 현(玄)은 경종(景宗) 대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고 이어 유림랑 공문박사(儒林郞 攻文博士)의 벼슬을 받았는데, 특별한 공적으로 공신이 되고 소부감(少府監)에 추증되었다. 조부 ▨는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내사사인 지제고(內史舍人 知制誥)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정(正)은 벼슬이 대창승(大倉丞)에 이르렀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였다. 어머니 김씨는 강릉군대부인(江陵郡大夫人)에 추증되었으며, 85세로 사망하였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도로 잘 섬겼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는 나이 들어 조업(祖業)을 능히 이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안타까움을 머금고 외고조(外高祖)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긍렴(金兢廉)공의 문음(門蔭)에 의탁하여 이(吏)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늠름하기가 어른과 같았으며, 항상 절도를 지키고 공(公)을 받드는 것으로 뜻을 세웠다.
숙종(肅宗)이 재위할 때 철주
2 방어판관(鐵州防禦判官)이 되어 나갔는데 다스림이 제일이었다.
<第2石>
서울로 돌아오자 내환(內宦, 內侍)에 들어갔다. 마침내 예종(睿宗)에게 깊이 알려져서 국체(國體)에 관계된 크고 작은 사무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예종이 동쪽 변경의 일을 처리하려 할 때에 공은 병마녹사(兵馬錄事)로 종사하면서 때때로 훌륭한 공을 세웠고, 하루가 멀게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9성
3을 개척하여 정할 때에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서 길주(吉州)에 들어가 지켰다. 당시 9성 중에서 오직 길주
4가 오랑캐 땅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다. 원수(元帥, 尹瓘)와 요속(僚屬)들이 모두 분발하여 구하고자 하였으나 두 번 세 번에 이르러서도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오랑캐들이 승기를 타서 하루는 날랜 군사로 공격하여 오니 그 성이 거의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었다. 공이 홀로 기묘한 꾀를 내어 사람들에 명령하여 하룻밤 만에 서둘러서 겹성[重城]을 쌓게 하였는데, 성이 완성되니 오랑캐들이 모두 낙담하고 이에 물러갔다. 공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무릇 130여 일이나 되자, 오랑캐가 마침내 진심으로 복종하고 간절하게 강화를 요청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허락하였다. 그 뒤 그 일을 보고하여 아뢰었으니, 아, 삼군(三軍)이 수령(首領)을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 때문이었다. 예종이 “선대의 임금이 국경을 평정할 때에 비록 원흥(元興)
5과 자주(慈州)
6를 굳게 지켰다고 하지만, 이보다 앞서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를 갖추고 임금을 알현하자, 노고를 매우 후하게 위로하고 절차에 따라 탁용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임금[仁宗]이 즉위하여 공훈을 논하면서 조서에서 말하였다.
“생각하건대 길주를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밖에서 원병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은 점점 급해져서 성은 무너지고 바야흐로 함락되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고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힘이 다하여 지탱하기가 어렵고 계책이 나올 것도 없었는데, 경이 이에 몸소 피곤한 병졸들을 독려하여 몰래 성벽을 겹으로 쌓았습니다. 몸을 비껴 성벽에 오르고 화살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 2천 남짓한 무리로 6만의 굳센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에게 공을 세우게 한 것은 오직 그대의 노력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선왕께서 장차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과인에 이르러 큰 공적을 생각하여 잊지 않고자 합니다”
이에 거듭 표창하고 발탁하여 지위가 수사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守司徒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에 이르렀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궁궐 안에 변고가 일어나자
7 공은 정성을 다해 사직을 지켰다. 다만 홀로 곧고 방도가 없어도 타협하려 하지 않으니 곧 당시 권세를 잡은 자가 싫어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아서 짐짓 뭇 논의를 가라앉히고자 이에 풍주
8 방어사(豊州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공은 평안한 채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 뛰어났다. 또 풍성(豊城)은 서해(西海)의 바닷가에 있어서 송(宋)과 요(遼) 등
<第3石>
양국의 통로와 매우 가까웠다. 개국 초에 성을 쌓아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으나 태평한 날이 계속되자 걱정할 일이 없어져서, 성벽이 모두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고 잡초가 무성하였으며 백성들은 민생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공이 개탄하여 조정에 아뢰고 명령을 받아 수리하고 복구한 곳이 무릇 1,340여 칸이었다. 새로이 무기를 만들어 적에 대비하고, 또 조정에 보고하여 가까운 도(道)와 주군(州郡)의 수전미(輸轉米)를 이 성에 두게 하여 길이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나머지 옥사(獄事)와 송사(訟事)도 마치 강물의 물꼬를 트는 것 같이 처리하니, 백성들이 지금까지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다.
임기가 끝나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공은 천성이 악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여 권귀(權貴)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꺼려하는 자가 많았으니, 마침 틈을 타서 왕명이 막히게 된 것이다.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과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니 조금도 마음에 맺힐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여러 해 동안의 봉록(俸祿)이 갑자기 끊어졌으니 살림을 팔아 날마다의 비용에 대비하는 것을 일평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의 말에 힘입어 개부의동삼사 호부상서(開府儀同三司 戶部尙書)로 고쳐 임명되고, 먼저와 같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을묘년(인종 13, 1135)에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키니
9 임금이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第4石>
▨ 서경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명을 거역하면서 해가 지나도록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여러 신하들은 모두 군사를 내어 성을 공격하는 것을 으뜸가는 계책으로 삼았다. 공이 홀로 글을 올려 “군사를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는 일은 예전에는 간혹 있었습니다. 하물며 서경은 신이 일찍이 두 번이나 유수(留守)로 근무한 곳인데, 그 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진실로 옛말에 ‘금성(金城)은 가히 공격하여도 파괴할 수 없다’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을 쌓아 병졸을 곁에 감추어 두고 쉬게 하면서 끝까지 그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과연 그러하다고 여겨 그 글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게 내려주었다. 이에 오성(五城)을 쌓고 더하여 흙을 돋우어 공격하니 그 뒤에야 항복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임금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들어 끝내 다시 벼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첫 부인 이씨(李氏)는 1남 1녀를 낳고 죽었는데 광평군대군(廣評郡大君)에 봉해졌다. 다음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1남 균(鈞)을 낳았으나, 모자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금 부인 상당군부인 김씨(上黨郡夫人 金氏)는 공을 섬기는데 공손하고 순종함이 지성으로부터 나왔으나, 자녀가 없으니 또한 애석하다. 공의 아들 순(純)은 평장사(平章事) 조중장(趙仲璋)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딸은 정주사 합문지후(定州使 閤門祗候) 신영린(愼永隣)에게 시집갔다.
공은 향년 83세로, 올해 봄 2월 을미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汀州)
10 땅 안의 동쪽 기슭에 화장하였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를 제수하였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이에 명(銘)을 짓는다.
늙어서도 절개가 한결같은 이는 오직 공 그 분뿐이니
저 동쪽 변방에서 공업(功業)을 우뚝 쌓았다.
재상[廊廟]의 지위에 올라 국가의 정치를 맡았으나
뜻밖에 변고를 만나 여러 해 동안 매우 곤궁하였다.
때에 한 선비가 있어 충성으로 간언하니
뭇 의심이 일시에 풀려지고 봉록(俸祿)이 이에 풍성하여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 온화하고 편안하며 즐겁게 지내다가
조용하게 가시니 곁에서 모시는 사람도 알지 못하였도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