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 원명국사묘지(興王寺 圓明國師墓誌)
- 시대
- 고려
- 연대
- 1141년(인종 19)
- 유형
- 묘지명·묵서명
- 크기
- 세로 42.4 가로 59.1 글자크기 1.5
- 소재지
-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권적(權適)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왕징엄(王澄儼 : ~1141)은 고려 숙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이다. 처음 이름은 징길(澄佶)이었는데 예종(睿宗) 때에 송황제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바꾸었다. 8살에 흥왕사(興王寺)의 대각국사(大覺國師)에게 의탁하였고, 불일사(佛日寺)에서 계를 받았다. 1120년(숙종 7)에 중광사(重光寺)의 주지가 되고 1105년(숙종 10)에 승통(僧統)이 되어 복세(福世)라는 법호를 받았다. 예종 때에는 홍원사(洪圓寺)·개태사(開泰寺)·귀신사(歸信寺)의 주지를 역임하고, 1118년(예종 13)에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의 작위를 더해 주었으며, 1126년(인종 4)에 귀신사로 물러나 거주하였다. 이자겸의 발호를 염려하여 지방에 피신하여 있다가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였다. 1141년(인종 19)에 죽음을 미리 예언하고 입적하니 향년 52세였다. 국사(國師)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명(圓明)이라 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장례의 절차를 대각국사(大覺國師) 때와 같이 하여, 승천부 약산촌(承天府 藥山村)에 장례지냈다. 묘지는 승사랑 시상서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지제고(承事郎 試尙書禮部侍郎 翰林侍讀學士 知制誥) 권적(權適)이 왕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판독문/해석문
전체 3개
해석문 | 김용선 | ||
판독문 | 허흥식 | ||
판독문 | 김용선 |
참고문헌
전체 6개 / 페이지 ( 1 / 1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논문 | 2000 | 정병삼, 2000「高麗 高僧 碑文 譯註의 과제와 방향」『고려시대연구』Ⅰ, 정신문화연구원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단행본 | 1976 | 朝鮮總督府 編, 1976, 『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
논문 | 1935 | 葛城末治, 1935, 「興王寺圓明國師墓誌」『朝鮮金石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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