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충위사동덕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태부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서경유수사 감수국사 상주국(推忠衛社同德功臣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太傅 門下侍中 判尙書吏禮部事 西京留守事 監修國史 上柱國)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으로 추증된 이공(李公) 묘지 및 서문아들 조산대부 한림시독학사 추밀원우승선 상서좌승 지제고(朝散大夫 翰林侍讀學士 樞密院右承宣 尙書左丞 知制誥)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지저(之氐)가 짓다.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선조는 신주(信州)
1 사람이다. ▨삼대(▨三代) 조상인 병마사(兵馬使) 대광(大匡) 기평(奇平)이 소성(邵城)
2에 수령으로 나와 다스리게 되면서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소성은 뒤에 인주(仁州)
3로 고쳐졌으니, 이제는 인주 사람이다. 공의 이름은 공수(公壽)이고, 자는 원로(元老)이다. 원래 이름은 수(壽)였으나, 재상이 되면서 공(公)이라는 글자를 덧붙였다.공은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외조 문화공(文和公, 崔惟善)이 ▨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여러 손자들에게 말하기를 ▨▨ “(이 아이는) 반드시 조예가 뛰어나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니, 너희들이 따라 갈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자라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일찍이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뒤, 부▨(〔父蔭〕)으로 양온령(良醢令)이 되었으나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벼슬을) 떠나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대안(大安)
4 2년(선종 3, 1086)에 급제하여
5 궁전고판관(弓箭庫判官)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금오위녹사 시대학박사 직한림원(金吾衛錄事 試大學博士 直翰林院)이 되었다.예종(睿宗)이 황태자가 되면서 첨사부주부(詹事府主簿)로 뽑혔다가 며칠 되지 않아 시사직(試司直)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가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명을 받아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으며, 돌아오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황주통판(黃州通判)이 되었다가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으로 옮겼다.다음해 ▨에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자 공이 힘을 다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수요에 충당하였지만 백성들은 그 번거로움을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그 능력을 칭찬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에 특별히 수행하기를 명하였으나, 공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옛일에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실 때에는 ‘오직 지사(知事)와 유수(留守) 한 사람만 따르고 부지사와 부유수 이하는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른 생각을 구하여 지켜야 할 도리를 흔들리게 하겠습니까” 임금이 그 말을 특이하게 여기고 감탄하여 그대로 따랐다.임기가 끝나자 서울로 들어가 시예부원외랑(試禮部員外郞)이 되었는데 2년이 지나자 시(試)를 없애고 진(眞)이 되었다. 다음해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고치고 비어(緋魚)를 받았다. 5월에 (형부의) 하급관리들이 사람을 체포하다 잘못하여 죽게 한 일을 어사대(御史臺)에서 문제삼아 탄핵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그것이 죄가 아닌 것을 알고 다시 예부(원외랑)로 옮겨주었다.건통(乾統)
6 6년(예종 1, 1106)에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옮겼다가 다시 예부·좌사 두 곳의 낭중이 되고,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옮겼다가 곧 사재소경 지병부사(司宰少卿 知兵部事)가 되었다. (건통) 9년(예종 4, 1109)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발탁되고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다. 다음해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겼는데, 이 때에 임금이 부위(府衛)의 군사가 많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여 재상에게 말하였다. “선군사(選軍司)는 병마를 총괄하는 곳인데, 누가 ▨▨ 그 일을 맡을 만합니까?” 재상들이 모두 공(公)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문에 이 직책을 맡은 지 도합 14년이나 되었으나, 지금까지도 비록 사납고 날랜 사나이와 병사들일지라도 공의 일을 말하면 탄식하여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없다.천경(天慶)
7 2년(예종 7, 1112)에 연영전학사(延英殿學士)를 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禮部侍郞 翰林侍讀學士)로 옮겼다. 다음해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고쳤다가 다시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더하였다. 1년이 지나 조산대부 위위경 지상서도성사(朝散大夫 衛尉卿 知尙書都省事)로 옮겼다가 다시 비서감 지형부사(秘書監 知刑部事)가 되었다.천경(天慶) 6년(예종 11, 1116)의 예부시(禮部試)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8 그 해에 국자감대사성 겸 직문하성(國子監大司成 兼 直門下省)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우산기상시 동수국사(右散騎常侍 同修國史)로 발탁되었으며, 다음해에 공부상서(工部尙書)를 더하였다가 또 다음해 여름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바뀌었다. 12월에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복야(左僕射)로 옮기고 동수국사는 그대로 하였다. 처음 습유(拾遺)에 임명되었을 때부터 ▨▨ 상서가 될 때까지 모두 지제고(知制誥)를 하였으나, 다만 두 번 예부원외랑이 되었을 때만 겸하고 나머지는 겸하지 않았다. 대개 ▨ 상복입는[絰] 일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에 ▨ 열 차례나 후보에 올랐으나 시종(侍從)직에 머무를 뿐이었다. 의논하는 자들이 탈락됨을 애석하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하게 처신할 따름이었다.갑진년(인종 2, 1124) 겨울에 임금이 공을 크게 쓸 만한 인물인 줄 알고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수사공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檢校司空守司空 叅知政事)로 발탁하였다. 그 해에 검교사도(檢校司徒)를 더하고, 다음해에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刑部事)로 승진하였다.이 때에 조선국공(朝鮮國公, 李資謙)이 권력을 함부로 부린 지 오래되어 나라가 두 주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때에 임금이 의(義)로써 부득이 ▨하려 했는데, 그 일을 중하게 여겨 계책을 공에게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덩굴이 무성한 풀은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같은 악이 조정에 가득 찼으니 형세가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편리한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태위(太尉) 김인존(金仁存)공에게 물으니 또한 공의 논의와 같았다. (그러나) 추밀부사(樞密副使) 지녹연(智祿延) 등이 경솔하고 조급하게 행동하여 능히 계책대로 이루지 못하니, 조선공이 먼저 난을 일으켜 드디어 임금을 핍박하여 거처를 궁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 임금이 형세를 살피니 (왕위를)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몰래 조서를 내려 조선공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조선공이 사람을 보내어 (조서를) 양부(兩府, 中書門下省과 中樞院)에 보이니 서로 쳐다보며 모두 말을 못하였으나 공이 천천히 ▨ 말하였다. “비록 조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공(國公)은 반드시 명령대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정(叅政, 叅知政事) 이자덕(李資德) 공 역시 공의 말과 같이 그러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朝鮮公〕)이 그 말을 듣고 뜻이 꺾이어 그 일이 마침내 가라앉게 되었다.이 해에 수태위 문하시랑(守太尉 門下侍郞)에 오르고,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옮겼다.하루는 공이 평장사(平章事) 척준경(拓俊京)공과 함께 (문하)성에 있었는데, 척 공이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보이니 곧 임금의 편지였다. 그 글에 쓰여 있기를 “사직이 바야흐로 위태로우니 그대는 평장사 이(李) 아무개와 더불어 힘을 다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편지를 다 읽은 뒤 척 공과 함께 ▨을 향해 감사의 절을 하고, 앉아서 의논하고 옮겨 다니며 말하였다. 그 뒤 척 공이 병부(兵部)에 앉아 인사를 논의하고 공은 선군사(選軍司)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데, 임금이 내인(內人) 조의(趙義)를 보내어 척 공에게 달려가 일이 급함을 알리고 ▨ 대궐 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척 공이 명을 듣자마자 바로 공에게 알리고 드디어 달려 들어갔다. 공 또한 따라 달려가 광화문(廣化門)에 이르니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임금이 공이 왔다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열려진 문틈으로 들어오게 하여 두 공이 서로 함께 난을 안정시켰다. 그 날 저녁에 임금이 환궁하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두 공의 힘으로 ▨ 나를 도와 성공하게 한 것이오”하니, 두 공이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척 공을 문하시중 판이부사(門下侍中 判吏部事)에 임명하였는데, 척 공이 공에게 양보하고 받지 않았다.6월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내려주고 삼중태광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판이부사(三重太匡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判吏部事)를 더하였으며, 4일 뒤에 수태▨ 수국사 상주국(守太▨ 修國史 上柱國)을 더하였다. 다음해 6월에 또한 과거[禮部]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가,
9 얼마 뒤 병부(兵部)로 고치고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를 겸하게 하였다. ▨2월에 또 이부(吏部)로 고치고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옮겼다.무신년(인종 6, 1128) 3월에 승진하여 문하시중을 더하였다. 공이 평소에 풍질(風疾)을 앓았고 또 흉악한 사람과 함께 조정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 면직되기를 굳게 원하는 글을 무릇 네 번이나 올리니 임금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신해년(인종 9, 1131) 7월에 동덕공신(同德功臣)을 더하여 본래의 관직으로 은퇴하게 하였다.공은 천성이 관대하고 마음이 넓어 일찍이 목소리와 얼굴빛으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일이 없었고, 임금을 섬기면서 속이지 않고 충성하였다. 행실에 있어서는 근검으로 마음을 삼았기 때문에 그 행동거지를 모두 삼가고 법으로 하였으니, 큰 일에 임하여 위대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큰 인물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아, 공은 벼슬하면서도 오직 국가의 이로움만 알았을 뿐이지 다른 것에 틈을 내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날마다 불경을 읽으면서 불사(佛事)를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음식을 먹고 기거하면서 항상 건강하고 쇠함이 없었다.정사년(인종 15, 1137) 여름에 오래된 병이 점차 악화되어, 7월 16일 서방정사(西方精舍)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하루 동안 멈추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5월 6일에 개성부 우봉군
10 압실촌(開城府 牛峯郡 押實村)의 남쪽 언덕에 장례지냈다.증조는 문하시중에 추증된 안경공(安敬公) 한(翰)이고, 증조모는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이다. 조부는 사재경(司宰卿)에 추증된 자상(子祥)이고, 조모는 하원군대부인 유씨(河源郡大夫人 柳氏)이다. 아버지는 중서시랑평장사인 문현공(文顯公) 예(預)이고, 어머니는 해릉군대부인 최씨(海陵郡大夫人 崔氏)로 문하시중 문화공(文和公) 유선(惟善)의 딸이다. 계모는 상당군대부인 왕씨(上黨郡大夫人 王氏)로 문하시랑평장사 무숭(懋崇)의 딸이다. 공은 일찍이 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나 항상 살아 계신 것처럼 섬겼다.공은 김씨(金氏)와 결혼하였는데, 위위경(衛尉卿) 보위(寶威)의 딸로서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에 봉해졌으나, 공보다 29년 앞서 죽었다. 자녀는 아들이 여섯 명이니, 장남 지저(之氐)는 추밀원우승선 한림시독학사 상서좌승 지제고(樞密院右承宣 翰林侍讀學士 尙書左丞 知制誥)이고, 2남 지간(之幹)은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었으나 공보다 24년 앞서 죽었다. 3남 지무(之茂)는 우사간 지제고(右司諫 知制誥)이고, 4남 지혜(之惠)는 불문(佛門)에 참여하여 법호가 토원요성 중대사(討原了性 重大師)인데 지금 천관사(天冠寺) 주지로 있다. 5남 지의(之懿)는 상사직장(尙舍直長)이고, 6남 지철(之喆)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었는데 공보다 10년 앞서 죽었다. 딸은 두 명으로, 장녀는 병부시랑(兵部侍郞) 김영석(金永錫)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어려서 죽었다. 손자는 18명인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죽고, 손녀는 9명인데 하나는 어려서 죽었다.아, 공은 평생 백에 하나도 뜻을 급하게 다스린 일이 없으니 신령(神靈)이 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수명이 백세[上壽]에 이르려 하였는데 어찌 하늘이 혹독한 벌을 내려 졸지에 이에 이르게 하는가. 이름을 부르며 추모하려니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제사를 잇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 구차하게 남은 목숨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차마 어찌 거칠고 소략하여 글 같지 않은 말로서 묘지의 명(銘)을 삼겠는가. 그러나 선조의 덕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자식들이 스스로 다하는 바이다. 지저(之氐)가 비록 불초하지만 힘쓰지 않고 쉽게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말을 모으고, 울면서 그 한두 개의 일을 적는다.명(銘)하여 이른다.태평한 세상을 만나서 좋은 일을 얻는 것은 두루 통하지만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 능히 끝내는 일은 드물다.공은 처음 벼슬길에 오르면서부터 마음을 오로지 공경함에 두어서임금의 일에 힘쓰고 충성을 다하며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았네.을해년(숙종 즉위, 1095)부터 정미년(인종 5, 1127) 겨울에 이르기까지그 간의 변고가 꼽아 셀 수 없을 정도여서옥석(玉石)이 모두 부숴지고 소란(蕭蘭)이 모두 상하였는데오직 공이 덕을 머금어 하나로 합쳐 가지런하게 하도다.이 편도 저 편도 아니면서 자신이 가운데 서서용납하고 받아들이니 어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흡연하게 펼쳤네.호랑이는 쫓아서 북쪽으로 보내고 해(日)를 씻어 빛을 내니모든 법도가 이미 바르게 되고 온 나라가 바르게 되도다.은퇴할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도 문득 활을 감추듯이 관직을 떠나은사(隱士)들이 쓰는 폭건(幅巾)을 쓰고 그저 웃으면서 지내니 푸른 들판이 집이 되었네.평생 덕이 한결같으니 누가 명성을 얻으리요,전형(典刑)이 비록 사라졌으나 아직도 노성(老成)함이 있도다.하늘이 내신 노인은 반드시 ▨ 장수를 누린다고 하나이제 돌아가시니 다시 사표로 삼을 분이 없어졌네.여러 아들이 황황히 의지할 데가 없어졌고관복을 입는 즐거움도 이미 영원히 ▨ 끝이 났도다.하늘은 어찌 이리 가혹하게 벌을 내리는 것을 지체하지 않는가,뒤에 비록 수많은 자손이 있을지라도, 그들 또한 바꾸어 느리게 할 수 있으랴.오직 큰 공을 세워 가문의 대업을 무너뜨리지 않기를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하노니, 명(銘)을 써서 간직하노라.[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