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使) 정 문안공(鄭 文安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항(沆)이고, 자는 자림(子臨)이며, 그 선조는 본래 동래군(東萊郡) 사람이다. 아버지 목(穆)은 섭대부경(攝大府卿)이고, 조부 문도(文道)와 증조 지원(之遠)은 모두 동래군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 고씨(高氏)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에 봉해졌는데,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익공(益恭)의 딸이다. 선친인 대부경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제(濟), 점(漸), 택(澤)과 막내인 공이다. 제(濟)는 현달하지 못한 채 일찍 죽었지만,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 조정에 이름을 날렸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재빠르게 깨우치니 이미 무르익은 자와 같아서, 선친이 가장 귀여워하였다. 나이 23세(숙종 7, 110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숙종(肅宗)이 궁궐에서 복시(覆試)를 치르자 2등으로 뽑혔다.
1 곧 내시(內侍)에 속하였다가 상주목장서기(尙州牧掌書記)가 되어 나갔다. 임기가 차자 예종(睿宗)이 다시 내시로 불러 직사관(直史館)에 임명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옮겼다가, 신호위녹사 군기주부(神虎衛錄事 軍器主簿)로 옮겼는데, 모두 한림원을 겸하였다.
천경(天慶)
26년(예종 11, 1116) 봄에 조서[旨]를 받아 집주(執奏)가 되었는데 마음을 공평하고 바르게 하니 출납(出納)이 오직 진실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작·대부주부 권지합문지후(將作․大府主簿 權知閤門祗候)로 옮기고, 이듬해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일을 논하면서 강직하고 밝아서 권귀(權貴)들을 피하지 않으니, 당하는 자들이 꺼려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전주목통판(全州牧通判)이 되었다. 소환되어 좌정언 지제고가 되었다가,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다.
이 때 지금의 임금<仁宗>이 처음 즉위하자 장인[元舅] 이자겸(李資謙)이 국기(國忌)
3를 담당하면서, 대신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조정의 강직하고 바른 선비들을 죄로 모함하여 내쫓고 좌천시켰다. 공도 전중내급사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옮겨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서 다시 지제고가 되었다. 병오년(인종 4, 1126) 여름에 이씨(李氏)가 패하자 형부원외랑 권지승선(刑部員外郞 權知承宣)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되고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듬해에는 승선(承宣)이 되었다.
조정에서 큰 좀을 새로이 제거한 뒤 여러 일들을 처음 만들었는데, 공이 온 마음을 바쳐서 고쳐진 것이 많았으며, 임금 역시 중하게 의지하였다. 이윽고 시예빈소경 전중·비서소감 좌부승선 충사관수찬관(試禮賓少卿 殿中․秘書少監 左副承宣 充史館修撰官)을 더하고, 금자복(金紫服)을 하사하였다. 또 우승선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대자좌유덕(右承宣 禮部侍郞 翰林侍讀學士 大子左諭德)으로 승진하였다.
송(大宋) 소흥(紹興)
4 3년(인종 11, 1133)에는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고, 조산대부 좌승선 이부시랑(朝散大夫 左承宣 吏部侍郞)에 올랐다. 또 국자제주 한림학사 지제고 겸 대자좌유덕(國子祭酒 翰林學士 知制誥 兼 大子左諭德)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니 선비를 성대하게 얻은 것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5 이윽고 비서감 추밀원지주사 겸 대자좌서자(秘書監 樞密院知奏事 兼 大子左庶子)가 되고, 얼마 뒤 시국자감대사성(試國子監大司成)이 되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공이 앞뒤로 은혜와 노고로써 산관(散官)에서 대자대보(大子大保)에 이르기까지
<이면>
조정에 변고가 많았다. 임금이 공을 크게 써서 그 재주를 다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그 명을 빼앗아가니, 아, 애통하도다.
공은 사람됨이 학문에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기(氣)로써 사물을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총명하고 말을 잘 하였으나 침묵으로써 그것을 지켰으며,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정직하였으나 화(和)로써 행하였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성실한 마음으로 오직 삼가니 사사로움으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큰 의논(議論)을 지니되 반드시 경전의 뜻에 의거하여 명백하게 아뢰고 부지런히 힘써서 다함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늘 중하게 자문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근밀(近密)에 있어 조정의 규칙과 제도를 잘 알았기 때문에, 무릇 법에 어긋나고 예를 잃은 것은 모두 공을 찾아가 물어보았다.
병이 들자 임금이 어의관(御醫官) 2명을 보내어 병을 다스리게 하고, 글[批]을 내려 통의대부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 지제고(通議大夫 知樞密院事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 知制誥)로 삼았다. 평일에 크게 쓰고자 하던 뜻을 나타내려고 조서를 내렸으나 돌아가시니, 실로 소흥 6년(인종 14, 1136 ) 11월 27일 신묘일이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보지 않았으며, 제사에 부의를 보내면서 등급을 더하였고, 문안(文安)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다음달 12월 13일 그 널을 서울 남쪽의 창신사(彰信寺) 남산 기슭에서 태웠으며, 유해를 거두어 임시로 서울 북산(北山)의 적소불사(寂炤佛寺)에 두었다가, 이듬해 윤10월 12일 경오일에 송림산(松林山) 남서쪽[丁向] 언덕에 옮겨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점(漸)은 형부낭중 어사잡단(刑部郞中 御史雜端)이었고, 택(澤)은 급사중 대자찬선대부(給事中 大子贊善大夫)였는데, 공과 함께 모두 나이가 57세에 그쳤으니, 아, 기이하도다. 공은 평생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고, 행실과 덕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 때를 만나고 임금을 만남이 이와 같이 심오하였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고, 지위도 재보(宰輔)에 오르지 못하여 간직한 것을 천하에 크게 베풀지 못하였으니, 아는 사람이건 알지 못하는 사람이건 모두 애통해 하고 탄식을 그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은 왕씨(王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 경열공(景烈公) 국모(國髦)의 딸인데 거듭 봉해져서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 되었다. 자녀로 아들은 네 명을 낳았으나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고, 막내인 사문(嗣文)
6이 음(蔭)으로 장사랑 양온승동정(將仕郞 良醞丞同正)이 되었는데, 지금의 상국(相國) 임공(任公, 任元敱)의 사위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시어사 지제고(侍御史 知制誥) 최유청(崔惟淸)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내궁전고판관(內弓箭庫判官) 이작승(李綽昇)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내시 호부원외랑(內侍 戶部員外郞) 김이영(金貽永)에게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수(壽)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명(命) 역시 어쩔 수 없지만
어찌 덕을 내려주면서 수명은 짧게 하는가.
바로 성군을 만났으나 지위를 구하지 않았으니
단지 덕이 뛰어나고, 다만 성군을 만났을 따름이로다.
수명과 지위의 박하고 후함은 대저 어찌 족히 돌아보겠는가.
아, 뒷날 우리 공의 덕을 본받고자 하는 자는 우리 현당(玄堂)의 길로 올 뿐이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