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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漆谷 僊鳳寺 大覺國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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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선봉사 터에 있는 고려 천태종의 창시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의 생애를 기리는 비이다.
임존(林存)이 짓고 문인인 덕린(德麟)이 써서 대지(大智)와 덕천(德遷)이 새겨 국사의 입적 31년 후인 1132년(인종 10)에 세웠다. 동일인에 대한 자료로는 아주 드물게 대각국사의 생애를 기리는 자료는 선봉사비 말고도 영통사비와 흥왕사 묘지가 있어 묘지와 비 그리고 비의 건립 주체에 따라 내용이 어떻게 다른 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특히 동일한 비 형식에서도 화엄종과 천태종의 건립 주체에 따라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주목된다. 현재 원 자리에 보존되어 있는 비는 비신 둘레로 당초문을 둘러 장식하였고 마모가 심한 편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각국사가 왕자로 태어나 경덕국사에게 출가하여 화엄을 수학하고 널리 종파를 회통하였으며 천태삼관을 일으키려고 송(宋)에 가서 고명한 대덕들을 두루 예방하고 천태산의 지자탑에 발원하고 돌아와 덕린 등을 모아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개창하고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이어 천태종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따로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음기에는 천태종을 개창하자 다른 승려에게 배운 승려로서 천태종에 온 1천명과 바로 천태종에 들어온 3백명이 있었음을 기술하고 이로써 조계·화엄·유가·율종의 사대업(四大業)과 나란히 하였음을 말하고 문도들을 승계에 따라 열거하였다.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 해동(海東) 천태(天台) 시조(始祖) 대각국사비명(大覺國師之碑銘)과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상서(尙書)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은 신(臣) 임존(林存)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 의학(義學)이며, 월남사(月南寺) 주지(住持) 묘오(妙悟)와 삼중대사(三重大師) 신(臣) 승(僧) 덕린(德麟)은 선지(宣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0년이 되는 대연헌(大淵獻) 8월[壯月] 7일에 존(存)에게 명하여 해동(海東)의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시므로 곧 표상(表狀)을 갖추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명(御命)을 어찌할 수 없어서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비로자나(毗盧遮那) 부처님이 계시는 화장장엄세계(華藏莊嚴世界)에 나타낸 바 제불세계(諸佛世界)를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가히 다 설(說)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오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는 비로자나 부처는 곧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편만(遍滿)하시며, 비로법중(毗盧法中)에 가장 친근(親近)하거늘, 하물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함에서랴! 서천축국(西天竺國)은 이곳과 멀지 않은 거리이다. 큰 구름이 두루 덮여 일우(一雨)로 동점(同霑)하는 같은 하늘 밑에 있어서, 마땅히 함께 점덕(霑德)을 입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신라에 불법(佛法)이 전래됨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께서 만세(萬世)의 창업(創業)을 이룩함에 이르러, 서천축국의 마후라(摩睺羅)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초청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찾아왔다. 이 때 우리나라에 불법이 장래에 크게 흥왕(興旺)할 것임을 알고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하며, 완성된 정력(定力)과 신비한 공덕(功德)으로 손모(孫謀)를 후손에게 전해주어 불교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써 첫째의 의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오대(五代)를 지나 송조(宋朝)에 이르기까지 가끔 명승(名僧)을 선발 하여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케 하였으나, 기근(機根)이 국한되어 겨우 일종(一宗)의 종지(宗旨)만을 얻어 그의 종도(宗徒)에게 전수(傳授)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국사는 부처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나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문도학법(問道學法)하는 형식을 거쳐 선조의 가풍을 계승하여 전하였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요,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은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父)·모(母)·자(子)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 『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또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조(文祖) 23년(1069)에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僧統職)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인(學人)의 근기를 헤아려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되, 성스러운 도량(道場)에서 사자후(師子吼)를 발하여 백천법문(百千法門)을 연설하여 인천(人天)의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하고자 하여 장차 자신이 얻은 바의 견해로써 이를 사람들에게 질문하여 믿음 을 취하려 했다. 일찍이 입송구법(入宋求法)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였다. 문종(文宗)은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왕손(王孫)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계속 여러 번 요청하였는데, 선조도 결정하기 어려워서 군신회의(群臣會議)에 회부하였으나, 이때에도 역시 대제(大弟)인 귀중한 신분으로써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종(肅宗)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을 때, 어느 날 국사와 함께 인예태후(仁睿太后)를 배알(拜謁)하고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 부분에 언급하여 이르기를,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법(最上眞乘法)이나, 이 나라에 이 종파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석(可惜)한 일이므로, 신(臣)이 이에 대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숙조(肅祖)도 또한 외호(外護)가 되기를 원하였다.
선종 3년(1086)에 이르러 스스로 때가 다가온 줄 알고 다시 구법(求法)을 위한 출국을 요청하였는데, 이때에도 비록 군신회의에서는 저지를 당하였으나, 이성(二聖)의 마음은 국사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호연(浩然)히 송나라로 가는 선박을 탈 것을 결심하여 4월 8일에 드디어 해양을 건넜다. 처음에 밀주(密洲)의 경계에 도착하였다. 철종황제(哲宗皇帝)가 이 소식을 듣고, 경사(京師)에 있는 계성원(啓聖院)에 영치(迎置)하였다. 몇 일 후 수공전(垂拱殿)에서 국사를 접견하되, 예우(禮遇)가 융숭하며 지극하였다. 이때 국사께서 고명한 대덕(大德)들을 두루 참방(叅訪)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화엄법사(華嚴法師)인 유성(有誠)에게 명하여 별원(別院)에 와서 있게 하고, 국사가 가는 곳마다 수행(隨行)토록 하였다. 대저 성인(聖人)은 자신의 굴욕은 꺼리지 아니하고, 항상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장홍(萇弘)과 사양(師襄)과 노담(老聃)과 담자(郯子)등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배웠던 것이다. 국사는 밀주(密州)에서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일법(一法)을 알거나, 일행(一行)을 가지는 승려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두루 찾아가서 자문(咨問)하였으며 또한 고청(固請)하여 제자(弟子)의 예(禮)로써 친견하고 새로운 종지(宗旨)를 문답(問答)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어느 날 현수(賢首)와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의 동이 부분(同異部分)과 이 양종(兩宗)의 유묘(幽渺)한 뜻에 대한 그 설명 듣기를 곡진(曲盡)히 하였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 나아감으로부터 원소종본선사(元炤宗本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원소가 법상에 올라앉자 설법(說法)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국사를 찬양하는 게송(偈頌)을 설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불법(佛法)을 위해 몸을 잊고 선재(善財)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閻浮提)에서는 참으로 희유(希有)한 일이니,
마치 우담바라 꽃이 불속에서 핀 것과 같네
또 흥국사(興國寺)에 가서는 서천(西天)에서 온 천길상(天吉祥) 삼장법사(三藏法師)를 만나 약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인도 불교의 현황을 자세히 문학(問學)하였다.
철종에게 표장(表章)을 올려서 항주(杭州)에 있는 화엄좌주(華嚴座主)인 정원법사(淨源法師)의 강하(講下)에 가서 수업하여, 본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를 받아 들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어 동반케 하였다. 금산(金山)을 지나면서 불인료원선사(佛印了元禪師)를 배알하니, 이는 희세(稀世)의 만남이어서, 마치 공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대화가 필요 없고 목격하면 바로 거기에 도(道)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이어서 곧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법사를 참견(參見)하였다. 법사는 국사를 보고 법기(法器)가 비상(非常)함을 알고,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한탄하면서, “도를 전해 주는 것으로써 나의 할일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또 여항(餘杭)의 산수(山水)가 천하에 제1이므로 모든 종파의 노덕(老德)들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연좌(宴坐)하고 있으나, 이들은 천하를 두루 살펴본 견문(見聞)이 많았다. 국사는 왕족의 애착을 끊으며 권세를 잊고, 만리(萬里)의 해외에서 불법(佛法)을 구하니 비록 도를 쌓고, 덕(德)을 간직하여 입을 다물고 법을 전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쌀 궤짝을 비우며 물품 창고를 털어 시물(施物)을 가지고 줄을 이어 국사를 찾아옴으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가 다분히 여기서 얻게 되었다.
다음해인 1087년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송의 철종에게 전달하여 국사를 환국(還國)토록 명하여 줄 것을 표청(表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종은 국사를 궐내(闕內)로 불러 귀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귀국 길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때 천태종승(天台宗僧)인 자변대사(慈辯大師) 종간(從諫)이 부촉시(付囑詩) 한 수를 지어 수로(手爐) 및 여의(如意) 등과 함께 증정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기 이전에 이미 자변대사의 고명(高名)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이미 항주에 이르러서는 특히 자변(慈辯)에게 천태일종(天台一宗)의 경론(經論)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여 항상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과 그리고 모든 제자들과 함께 청강(聽講)하였으므로, 이제 이와 같이 부촉하는 시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경화(京華)에 이르니, 황제께서 또 수공전(垂拱殿)에서 접견하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며칠 머물라고 했다. 다시 궐내 들어가 귀국 인사를 드리고, 항주에 있는 정원법사(淨源法師) 처소에 이르니, 날마다 『화엄경(華嚴經)』의 대의(大義)를 강설해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향로와 불자(拂子)를 줌으로써 부법(付法)하는 신표(信表)로 삼았다.
그 다음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浮圖)에 참배하고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사(大師)께서 판석(判釋)한 오시(五時) 팔교(八敎)의 교판(敎判)이 동류(東流)한 일대성언(一代聖言)을 궁진(窮盡)하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승려 체관(諦觀)이 있어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승(傳承)하였으나, 이제 그 승습(承習)이 단절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전당(錢塘) 자변(慈辯)의 강하(講下)에서 천태교관을 품수(稟受)하였사 오니, 훗날 본국에 돌아가서 신명을 다하여 전양(傳揚)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가서 대각양연선사(大覺懹璉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인종(仁宗)이 이 승려를 존중하여 복전(福田)을 삼았다. 이제 이 노사(老師)에 귀의하였다. 즉 대각국사가 대각선사에게 문법(問法)하였으므로, 대각회련선사가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함을 만났으니, 심히 본래 출국한 뜻과 계합하였다. 이미 배를 타고 본국의 경계에 도달하자 곧바로 허락 없이 임의로 출국한 죄를 내려달 라는 표상(表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벌을 주는 대신 크게 포상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궁내에 영입하여 구법도상(求法途上)에 따른 여고(旅苦)를 위로하는 예모(禮貌)가 융성하여 자못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국사께서 송나라에서 구법한 것은, 두루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문법(問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바를 마음[靈府]에 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고 국사가 구해 온 경서(經書) 중에 반 이상은 아직 본 국에 유행(流行)하지 않는 귀중한 경들이었다. 구법일행(求法一行)이 헤 어질 무렵 주객(主客)인 군신(君臣)이 모든 선(禪) 강(講) 제공(諸公)들에게 이르기를, “옛 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한 이가 많았지만, 어찌 승통(僧統)께서 한 차례 상국(上國)에 가서 천태(天台) 현수(賢首) 남산(南山) 자은(慈恩) 조계(曹溪) 서천범학(西天梵學) 등 제종(諸宗)을 일시(一時)에 전래함과 같겠는가! 참으로 홍법(弘法)하는 대보살(大菩薩)의 행(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실한 의체(義諦)는 아름다운 말로 다할 정도가 아니다”
옛날 공자(孔子)가 위(衛)나라로부터 노(魯)나라로 돌아온 연후에야 비로소 낙정(樂正)과 아송(雅頌)에 각각 그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한 뒤에야 모든 종파의 교리가 각기 그 정법(正法)을 얻었다. 하물며 천태일종(天台一宗)은 비록 체관(諦觀)과 지종(智宗)의 무리 에서부터 그 시원[濫觴]을 두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宗)을 세우지 아니하여 학자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음에랴!
『법화경』에 이르기를, “일월등명(日月燈明) 부처께서 세상에 출현 하시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을 설(說)하였다. 부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되, 여래(如來)는 다만 일불승법(一佛乘法)만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하실 뿐, 여승(餘乘)인 저 이승(二乘)이나 또는 삼승법(三乘法) 등은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會通)한 원묘(圓妙)의 일법(一法)에 대한 진관(眞觀)이 이미 『보살영락경』에 갖추어 있고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도제일의체(中道第一義諦)는 보처대사(補處大士)인 미륵보살이 부처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여 년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봉기하므로 용수보살이 『지도론』을 지어 중도(中道)의 이치를 밝혔다. 그러므로 형계담연(荊谿湛然)이 이르기를, 하물며 삼관(三觀)이 따로 있겠는가! 본종(本宗)의 영락일가(纓絡一家)의 교문(敎文)은 멀리로는 불경(佛經)을 품수하였으되, 법화(法華)로써 종골(宗骨)을 삼고, 지론(智論)으로써 지남(指南)을 삼았다. 용수보살로부터 형계(荊谿)에 이르기까지 천태(天台)의 9조(祖)1가 된다. 그 교(敎)가 중국에서 대행(大行)한지 이미 요요(廖蓼)히 사백여년이 되었건만, 이 땅에는 아직도 입종(立宗)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여래께서 오랫동안 유지(遺旨)에 대하여 침묵하신 것은 이는 장차 그 법을 감당할 만한 국사를 기다려 전법하고자 함이었다. 대임(大任)을 맡을 만한 재질(才質)은 제종(諸宗)의 학문에 있어 고심(刳心)2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여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현수(賢首)와 천태 양종(兩宗)은 그 시절 인연이 도래하였으므로 구법하고 돌아와서 최초로 왕에게 올린 표상(表狀)에 이르기를,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백성(百城)의 선우(善友)를 친견하여 두루 진교(眞敎)를 심문(尋問)함은 오로지 부왕(父王)인 문종(文宗)의 성스러운 위력(威力)을 의뢰한 것이며, 천태종과 현수종지(賢首宗旨)까지 깊이 연구 하였사옵니다. 진수(晉水)와 고산(孤山)의 종지에 있어서는 외람되게 노불(爐拂)까지 전해 받았으니, 이는 기구(箕裘)를 잘못 승사(承事)한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가히 홍도(弘道)할만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덕린(德麟)·익종(翼宗)·경란(景蘭)·연묘(連妙) 등이 각기 그의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모아드니 모두 제자(弟子)의 행렬에 속하였다.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람(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태후[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숙조(肅祖)가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 명이 국사의 도풍(道風)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숙종이 또 대원(大願)을 세워 천수사(天壽寺)를 창건 하여 천태교관을 홍포하려 하다가 낙성(落成)을 보지 못하고 숙종[龍馭]께서 귀궁(貴弓)하시고 예종[睿考]이 왕위를 이어받아 숙종의 대원을 완성함으로써 영원히 삼한(三韓)을 비호하였다. 아직도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창생(蒼生)은 도탄에 빠졌으나, 오직 이 해내(海內)에서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다. 평화스럽게 닭이 울고, 개가 짖음이 사경(四境)에 달하였다. 남자는 밭에서 농사짓고, 여자는 집에서 배를 짜면서 그 부수(富壽)를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소치(所致)이겠는가? 그 중요한 원인은 국사가 부처께서 열반하신지 이미 오래된 말세에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보(法寶)를 전해 와서 이 땅에 법륜(法輪)이 무궁토록 한 것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 서 태후와 숙종, 그리고 지금의 인종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발하여 수희찬탄하며 외호(外護)하였기 때문이다.
또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불사(佛事)를 완성시켜 묘법(妙法)으로 하여금 상주(常住)케 하였으니, 제불(諸佛)의 호념(護念)한 바 때문이며, 제천(諸天)의 옹위(擁衛)한 바의 힘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 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 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또 국사가 입송하여 구법하는 도중 항주(杭州)에 있을 때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이르기를, “어제 아침 송자(松子) 끓인 죽을 받아먹을 때, 정자사(淨慈寺)의 종본장로(宗本長老)가 이르러 오므로 죽을 차려 드렸더니, 장로(長老)께서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수년전 용산사(龍山寺)에 투숙하였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한 대접의 잣죽을 주거늘,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대 답하기를, ‘동방(東方)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오 늘 이 죽도 그 때 꿈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국사가 증득(證得)한 바의 지견(知見)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境界)인 즉 그의 나타내는 사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선사(大禪師)인 순선(順善)과 선사(禪師)인 교웅(敎雄)과 유청(流淸)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流行)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提唱)하여 힘을 다 해 창립하였다. 저 달마대사가 중국[震旦]에 있어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인 것과 같은데도 지금까지 비기(碑記)가 없으니, 만약 비를 세워 국사의 행장(行狀)을 새겨두지 아니하면, 그 방임(放任)한 일로 후세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돌아올 허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법손의 의견을 모아 임금께 상주(上奏)하였더니, 임금께서 국사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흠모하여 유덕(遺德)의 깊은 뜻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국사의 비(碑)를 남숭산사(南崇山寺)에 세우도록 명하고, 법손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여 주지(住持)해서 그 유교(遺敎)를 전양(傳揚)하며 단절(斷絶)함이 없도록 하 라” 하였다. 국사의 위대한 업적을 요약[撮略]하여 명(銘)을 짓는다.
일체법(一切法) 공(空)한 것을 설(說)하려 하건만
분별심(分別心)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법 공(空)했지만 그대로 현상(現象)일새
육경(六境)에 집착하나 본래(本來)가 가명(假名)일 뿐.
이 이치 어찌하여 다할 수 있겠는가.
현상계(現象界) 그대로가 본래로 없는 것을.
색(色)과 공 그 자체(自體)는 동체(同體)서 갈라진 것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라 이름하네.
법 따라 궁구하여 본체(本體)를 발명(發明)하면
뚜렷한 원각(圓覺)자리 우주를 비추리라.
삼세(三世)에 두루하신 일체(一切)의 부처도
모두가 이 길 따라 정각(正覺)을 성취했네.
우리의 대각국사 서송(西宋)에 유학하여
천태의 삼지삼관(三止三觀) 교관(敎觀)을 전해왔네.
임금이 명령하여 숭산(崇山)에 터를 닦아
천태종 시조이신 대각의 비(碑)를 세우다.
남숭산(南崇山) 높고 높아 우뚝이 솟았는데
비석(碑石)도 산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리.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의 승려 대덕(大德)과 지천(智遷)이 비문을 새기다.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題額)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 해동(海東) 천태종 시조 대각국사의 비명과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상서(尙書)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은 신(臣) 임존(林存)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 의학(義學)이며, 월남사(月南寺) 주지(住持) 묘오(妙悟)와 삼중대사(三重大師) 신(臣) 승(僧) 덕린(德麟)은 선지(宣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아울러 전액(篆額)을 쓰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0년이 되는 대연헌(大淵獻) 장월(壯月) 7일에 존(存)에게 명하여 해동(海東)의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시므로 곧 표상(表狀)을 갖추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명(御命)을 어찌할 수 없어서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비로자나(毗盧遮那) 부처님이 계시는 화장장엄세계중(華藏莊嚴世界中)에 나타낸 바 제불세계(諸佛世界)를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가히 다 설(說)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오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곧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편만(遍滿)하시며, 비로법중(毗盧法中)에 가장 친근(親近)함이 됨이어든, 하물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함에랴! 서천축국(西天竺國)과 이곳과는 멀지 않은 거리(距里)이다. 큰 구름이 두루 덮혀 일우(一雨)로 동점(同霑)하는 같은 하늘 밑에 있어서, 마땅히 함께 점덕(霑德)을 입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신라에 불법(佛法)이 전래됨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께서 만세(萬世)의 창업(創業)을 이룩함에 이르러, 서천축국의 마후라(摩睺羅)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초청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찾아왔다. 이 때 우리나라에 불법이 장래에 크게 흥왕(興旺)할 것임을 알고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하며, 완성된 정력(定力)과 신비한 공덕(功德)으로 손모(孫謀)를 후손에게 전해주어 불교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써 첫째의 의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오대(五代)를 지나 송조(宋朝)에 이르기까지 가끔 명승(名僧)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케 하였으나, 기근(機根)이 국한되어 겨우 일종(一宗)의 종지(宗旨)만을 얻어 그의 종도(宗徒)에게 전수(傳授)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국사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나, 오히려 문도학법(問道學法)하는 형식을 거쳐 선조의 가풍을 계승하여 문도학법을 전하였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요,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父) 모(母) 자(子)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 『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또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조(文祖) 23년에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僧統職)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인(學人)의 근기를 헤아려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되, 성스러운 도량(道場)에서 사자후(師子吼)를 발하여 백천법문(百千法門)을 연설하여 인천(人天)의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코자 하여 장차 자신이 얻은 바의 견해로써 이를 사람들에게 질문하여 믿음을 당시인들에게 취하려 했다. 그러므로 일찍이 입송구법(入宋求法)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문종(文宗)이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왕손(王孫)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계속 여러번 요청하였는데, 선조도 결정하기 어려워서 군신회의(群臣會議)에 회부하였으나, 이 때에도 역시 대제(大弟)인 귀중한 신분으로써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종(肅宗)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을 때, 어느 날 국사와 함께 인예태후(仁睿太后)를 배알(拜謁)하고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 부분에 언급하여 이르기를,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법(最上眞乘法)이나, 이 나라에 이 종파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석(可惜)한 일이므로, 신(臣)이 이에 대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숙조(肅祖)도 또한 외호(外護)가 되기를 원하였다.
선조 3년에 이르러 스스로 때가 다가온 줄 알고 다시 구법(求法)을 위한 출국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에도 비록 군신회의에서는 저지를 당하였으나, 이성(二聖)의 마음은 국사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호연(浩然)히 송나라로 가는 선박 탈 것을 결심하여 4월 8일에 드디어 해양을 건넜다. 최초로 밀주(密洲)의 경계에 도착하였다. 철종황제(哲宗皇帝)가 이 소식을 듣고, 경사(京師)에 있는 계성원(啓聖院)에 영치(迎置)하였다. 몇일 후 수공전(垂拱殿)에서 국사를 접견하되, 예우(禮遇)가 융숭하며 지극하였다. 이때 국사께서 고명한 대덕(大德)스님을 두루 참방(叅訪)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화엄법사(華嚴法師)인 유성(有誠)에게 명하여 별원(別院)에 와서 있게 하고, 국사가 가는 곳마다 수행(隨行)토록 하였다. 대저 성인(聖人)은 자신의 굴욕은 꺼리지 아니하고, 항상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장홍(萇弘)과 사양(師襄)과 노담(老聃)과 담자(郯子)등을 스승로 섬기면서 배웠던 것이다. 국사는 밀주(密州)에서 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일법(一法)을 알거나, 일행(一行)을 가지는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두루 찾아가서 자문(咨問)하였으며 또한 고청(固請)하여 제자(弟子)의 예(禮)로써 친견하고 새로운 종지(宗旨)를 문답(問答)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따라서 현수(賢首)와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의 동이부분(同異部分)과 이 양종(兩宗)의 유묘(幽渺)한 뜻에 대한 그 설명 듣기를 곡진(曲盡)히 하였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 나아감으로부터 원소종본선사(元炤宗本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원소가 법상에 올라 앉자 설법(說法)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국사를 찬양하는 게송(偈頌)을 설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불법(佛法)을 위해 몸을 잊고 선재(善財)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閻浮提)에서는 참으로 희유(希有)한 일이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 꽃이 불속에서 핀 것과 같네”라 하였다. 또 흥국사(興國寺)에 가서는 서천(西天)에서 온 천길상(天吉祥) 삼장법사(三藏法師)를 만나 약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인도 불교의 현황을 자세히 문학(問學)하였다.
철종에게 표장(表章)을 올려서 항주(杭州)에 있는 화엄좌주(華嚴座主)인 정원법사(淨源法師)의 강하(講下)에 가서 수업하여, 본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를 받아 들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어 동반케 하였다. 금산(金山)을 지나면서 불인료원선사(佛印了元禪師)를 배알하니, 이는 희세(稀世)의 만남이어서, 마치 부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대화가 필요없고 목격하면 바로 그기에 도(道)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이어서 곧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참견(參見)하였다. 법사는 국사를 보고 법기(法器)가 비상(非常)함을 알고, 늦게 만나게된 것을 한탄하면서, “도(道)를 전해 주는 것으로써 나의 할일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또 여항(餘杭)의 산수(山水)가 천하에 제1이므로 모든 종파의 노덕(老德)들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연좌(宴坐)하고 있으나, 이들은 천하를 두루 살펴본 견문(見聞)이 많았다. 국사는 왕족의 애착을 끊으며 권세를 잊고, 만리(萬里)의 해외에서 불법(佛法)을 구하니 비록 도(道)를 쌓고, 덕(德)을 간직하여 입을 다물고 법을 전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쌀 궤짝을 비우며 물품 창고를 털어 시물(施物)을 가지고 줄을 이어 스님을 찾아 오므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가 다분히 여기서 얻게 되었다.
다음해인 1087년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송의 철종에게 전달하여 국사를 환국(還國)토록 명하여 줄것을 표청(表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종은 국사를 궐내(闕內)로 불러 귀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귀국 길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때 천태종승(天台宗僧)인 자변대사(慈辯大師) 종간(從諫)이 부촉시(付囑詩) 한 수를 지어 수로(手爐)및 여의(如意)등과 함께 증정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기 이전에 이미 자변대사의 고명(高名)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이미 항주에 이르러서는 특히 자변(慈辯)에게 천태일종(天台一宗)의 경론(經論)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여 항상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과 그리고 모든 제자들과 함께 청강(聽講)하였으므로, 이제 이와 같이 부촉(付囑)하는 시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경화(京華) 이르니, 황제께서 또 수공전(垂拱殿) 서 접견하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몇일 머물라고 했다. 다시 궐내(闕內) 들어가 귀국 인사를 드리고, 항주에 있는 정원법사(淨源法師) 처소에 이르니, 원(源) 날마다 화엄경(華嚴經)의 대의(大義)를 강설해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향로와 불자(拂子)를 줌으로써 부법(付法)하는 신표(信表)로 삼았다.
그 다음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浮圖)에 참배하고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사(大師)께서 판석(判釋)한 오시(五時) 팔교(八敎)의 교판(敎判)이 동류(東流)한 일대성언(一代聖言)을 궁진(窮盡)하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체관(諦觀)스님이 있어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승(傳承)하였으나, 이제 그 승습(承習)이 단절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道)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전당(錢塘) 자변(慈辯)의 강하(講下)에서 천태 교관(敎觀)을 품수(稟受)하였사오니, 훗날 본국에 돌아가서 신명을 다하여 전양(傳揚)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가서 대각양연선사(大覺懹璉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인종(仁宗)이 이 스님을 존중하여 복전(福田)을 삼았다. 이제 이 노사(老師)를 여기에서 귀의하였다. 즉 대각국사가 대각선사에게 문법(問法)하였으므로, 대각회련선사가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함을 만났으니, 심히 본래 출국한 뜻과 계합하였다. 이미배를 타고 본국의 경계에 도달하여는, 곧바로 허락없이 임의로 출국한 죄를 내려달라는 표상(表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벌을 주는 대신 크게 포상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궁내에 영입하여 구법도상(求法途上)에 따른 여고(旅苦)를 위로하는 예모(禮貌)가 융성하여 자못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국사께서 송나라에서 구법한 것은, 두루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문법(問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바를 영부(靈府)에 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고 국사가 구해 온 경서중(經書中)에 반이상은 아직 본국에 유행(流行)하지 않는 귀중한 경들이었다. 구법일행(求法一行)이 헤어질 무렵 주객(主客)인 군신(君臣)이 모든 선(禪) 강(講) 제공(諸公)들에게 이르기를, 옛 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한 이가 많았지만, 어찌 승통(僧統)께서 한 차례 상국(上國)에 가서 있는 바 천태(天台) 현수(賢首) 남산(南山) 자은(慈恩) 조계(曹溪) 서천범학(西天梵學)등 제종(諸宗)을 일시(一時)에 전래함과 같겠는가! 참으로 홍법(弘法)하는 대보살(大菩薩)의 행(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실한 의체(義諦)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뿐만이 아닌 것이다. 옛날 공자(孔子)가 위(衛)나라로 부터 노(魯)나라로 돌아온 연후에야 비로소 낙정(樂正)과 아송(雅頌)에 각각 그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한 뒤에야 모든 종파의 교리가 각기 그 정법(正法)을 얻었다. 하물며 천태일종(天台一宗)은 비록 체관(諦觀)과 지종(智宗)의 무리에서부터 그 남상(濫觴)을 두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宗)을 세우지 아니하여 학자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음에랴!
『법화경』에 이르기를, “일월등명(日月燈明)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을 설(說)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되, 여래(如來)는 다만 일불승법(一佛乘法)만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하실뿐, 여승(餘乘)인 저 이승(二乘)이나 또는 삼승법(三乘法) 등은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會通)한 원묘(圓妙)의 일법(一法)에 대한 진관(眞觀)이 이미 『보살영락경』에 갖추어 있고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도제일의체(中道第一義諦)는 보처대사(補處大士)인 미륵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여 년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봉기하므로 용수보살이 『지도론』을 지어 중도(中道)의 이치를 발명하였다. 그러므로 형계담연(荊谿湛然)이 이르기를, 하물며 삼관(三觀)이 따로 있겠는가! 본종(本宗)의 영락일가(纓絡一家)의 교문(敎文)은 멀리로는 불경(佛經)을 품수하였으되, 법화(法華)로써 종골(宗骨)을 삼고, 지론(智論)으로써 지남(指南)을 삼았다. 용수보살로부터 형계(荊谿)에 이르기까지 천태(天台)의 9조(祖)가 된다. 그 교(敎)가 중국에서 대행(大行)한지 이미 요요(廖蓼)히 사백여년이 되었건만, 이 땅에는 아직도 입종(立宗)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여래께서 오랫 동안 유지(遺旨)에 대하여 묵묵하신 것은 이는 장차 그 법을 감당할 만한 스님을 기다려 전법(傳法)하고자 함이었다. 대임(大任)을 맡을 만한 재질(才質)은 제종(諸宗)의 학문에 있어 고심(刳心)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여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양종(兩宗)은 그 시절인연이 도래하였으므로 구법하고 돌아와서 최초로 왕에게 올린 표상(表狀)에 이르기를,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백성(百城)의 선우(善友)를 친견하여 두루 진교(眞敎)를 심문(尋問)함은 오로지 부왕(父王)인 문종(文宗)의 성서러운 위력(威力)을 의뢰한 것이며, 천태종과 현수종지(賢首宗旨)까지 깊이 연구 하였아옵니다. 진수(晉水)와 고산(孤山)의 종지(宗旨)에 있어서는 외람되게 노불(爐拂)까지 전해 받았으니, 이는 기구(箕裘)를 잘못 승사(承事)한 것이 아닌가하고 저으기 걱정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가히 홍도(弘道)할 만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이 각기 그의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모아드니 모두 제자(弟子)의 행렬에 속하였다.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숙종이 또 대원(大願)을 세워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홍포하려 하다가 낙성(落成)을 보지 못하고 용어(龍馭)께서 귀궁(貴弓)하시고 예고(睿考)가 왕위를 이어받아 숙종의 대원을 완성하므로써 영원히 삼한(三韓)을 비호하였으나, 아직도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창생(蒼生)은 도탄에 빠졌으나, 오직 이 해내(海內)에서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다. 평화스럽게 닭이 울고, 개가 짖음이 사경(四境)에 달하였다. 남자는 밭에서 농사 짓고, 녀자는 집에서 배를 짜면서 그 부수(富壽)를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소치(所致)이겠는가? 그 중요한 원인은 국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이미 오래된 말세에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보(法寶)를 전해 와서 이 땅에 법륜(法輪)이 무궁토록 한 것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태후와 숙종, 그리고 지금의 인종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발하여 수희찬탄하며 외호(外護)하였기 때문이다.
또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불사(佛事)를 완성시켜 묘법(妙法)으로 하여금 상주(常住)케하였으니, 제불(諸佛)의 호념(護念)한 바의 때문이며, 제천(諸天)의 옹위(擁衛)한 바의 힘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또 국사가 입송하여 구법하는 도중 항주(杭州)에 있을 때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이르기를, “어제 아침 송자(松子)로 끓인 죽을 받아 먹을 때, 정자사(淨慈寺)의 종본장로(宗本長老)가 이르러 오므로 죽을 차려 드렸더니, 장로(長老)께서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수년전 용산사(龍山寺)에 투숙하였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한 대접의 잣죽을 주거늘,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방(東方)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이 죽도 그 때 꿈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국사가 증득(證得)한 바의 지견(知見)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境界)인 즉 그의 나타내는 바 사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선사(大禪師)인 순선(順善)과 선사(禪師)인 교웅(敎雄)과 유청(流淸)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流行)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提唱)하여 힘을 다해 창립하였다. 저 달마대사가 진단(震旦)에 있어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인 것과 같은데도 지금까지 비기(碑記)가 없으니, 만약 비를 세워 국사의 행상(行狀)을 새겨두지 아니하면, 그 방임(放任)한 일로 후세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돌아올 허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법손의 의견을 모아 임금께 상주(上奏)하였더니, 임금께서 국사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흠모하여 유덕(遺德)의 깊은 뜻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국사의 비(碑)를남숭산사(南崇山寺)에 세우도록 명하고, 법손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여 주지(住持)해서 그 유교(遺敎)를 전양(傳揚)하며 단절(斷絶)함이 없도록하라 하였다. 국사의 위대한 업적을 촬략(撮略)하여 명(銘)하노라.
일체법(一切法) 공(空)한 것을 설(說)하려 하건만
분별심(分別心)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법(法) 공(空)했지만 그대로 현상(現象)일새
육경(六境)에 집착하나 본래(本來)가 가명(假名)일 뿐.
이 이치(理致) 어찌하여 다할 수 있겠는가.
현상계(現象界) 그대로가 본래(本來)로 없는 것을.
색(色)과 공(空) 그 자체(自體)는 동체(同體)서 갈라진 것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네.
법(法)따라 궁구하여 본체(本體)를 발명(發明)하면
뚜렷한 원각(圓覺)자리 우주를 비추리라.
삼세(三世)에 두루하신 일체(一切)의 부처님도
모두가 이 길따라 정각(正覺)을 성취했네.
우리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서송(西宋)에 유학하여
천태(天台)의 삼지삼관(三止三觀) 교관(敎觀)을 전해왔네.
임금이 명령하여 숭산(崇山)에 터를 닦아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이신 대각(大覺)의 비(碑)를 세우다.
남숭산(南崇山) 높고 높아 웃뚝히 솟았는데
비석(碑石)도 산(山)과 함께 영원(永遠)히 함께 하리.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의 대지(大智)와 덕천(德遷)스님은 비문을 새기다.
【陰記】
강어(强圉) 황락년(荒落年) 응종월(應鍾月)에 남숭산사(南崇山寺) 천태(天台) 시조(始祖)의 비음기(碑陰記)
해동(海東)에 불법이 전래된 후, 약 300년 동안 모든 종파가 각기 서로 앞을 다투어 연창(演唱)하였으나, 천태종만은 중간에 단절되어 전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원효대사(元曉大使)가 전대(前代)에서 칭미(稱美)하였고, 체관(諦觀)스님이 뒤를 이어 전양(傳揚)하였으나, 아직까지 재흥(再興)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흥의 시기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중, 마침 우리 시조(始祖) 대각국사가 왕궁(王宮)에서 탄생하여 정광불롱(定光佛隴) 지자탑전(智者塔前)에서 법등(法燈)을 전해 받고, 본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천태 진종(眞宗)을 제창(提唱)하니, 도덕(道德)은 고독하지 아니하여 이웃이 있고, 구슬은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이르러 오므로,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圓空國師) 신칙(神則)과 영암사(靈岩寺) 적연국사(寂然國師)의 고매(高邁)한 달경(達境)과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에게 수법(受法)한 5명(五名)의 권속(眷屬) 등 명공(名公) 학도(學徒)들이 왕의 명령에 따라 함께 모였고, 그 밖에도 바로 대각국사의 문하에 투신(投信)한 제산(諸山)의 명공(名公) 학도(學徒) 삼백여 명과 전오문(前五門)의 학도 일천여인(一千餘人)도 함께 모였다.
건통(乾統)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굉강(宏綱)을 거양(擧揚)하면서, 우수한 학자 일백명을 뽑아 봉은사(奉恩寺)에 있게 하고, 천태종의 경론(經論) 일백이십권으로써 고시(考試)를 보아 현량(賢良) 사십여인(四十餘人)을 선발하였으니, 선국(先國)의 초기에 대행(大行)하였던 조계(曹溪)·화엄(華嚴)·유가(瑜伽)·궤범(軌範)등으로 더불어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일러 사대업(四大業)이라 하였다. 국사가 입적한 후 앞의 오종문파(五宗門派)가 각기 차례로 본종(本宗)이었던 본사(本寺)로 되돌아갔지만, 오직 국사의 문하에는 의호(依怙)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건통 4년 갑신(甲申) 6월 일에 조판(詔判)으로 국사 이하 칭행(稱行)에 있어 천태종의 6법권(法眷) 중에 국사가 시조(始祖)라고 결정하였다.
대송(大宋) 건염(建炎) 원년, 대금(大金) 천회(天會) 7년(195) 기유(己酉) 5월 일에 성지(聖旨)에 따라 대각국사가 송나라에 가서 천태교(天台敎)를 전하여 왔다. 고려의 초기에는 천태종의 대법(大法)이 유행하지 않았던 것을, 시흥(始興)한 그 공업(功業)이 적지 아니하므로,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에 해동의 천태시조(天台始祖)인 대각국사의 비를 세웠으나,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태종도 점차로 침체할가 하는 부분이다. 병신년(丙辰年)에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논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비를 세웠다. 그리고 법손이 계속 이어 주지(住持)하여 선사(先師)의 빛나는 도덕이 실추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그의 법자(法子) 법손(法孫)의 모직(謨職)의 명단을 음면(陰面)에 나열하여 후세인들의 관람(觀覽)에 공(供)하려 한다.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대선사(大禪師) 덕린(德麟)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순성(順成)·신웅(信雄)
삼중대사(三重大師) 이서(利諝)
중대사(重大師) 신지(信之)·세청(世淸)·간영(幹英)·창연(暢連)·도능(道能)·형여(瑩如)·현준(賢俊)·관순(觀純)·지선(志宣)·도충(道沖)·학련(學連)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선사(禪師) 익종(翼宗)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선사(大禪師) 순선(順善)·교웅(敎雄)
선사(禪師) 의관(懿觀)·석선(碩先)·유서(惟諝)
삼중대사(三重大師) 당준(唐俊)
중대사(重大師) 혜정(惠定)·신각(神覺)·원호(元浩)·각현(覺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신사(禪師) 경란(景蘭)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관호(觀皓)
중대사(重大師) 혜평(惠平)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선사(禪師) 연묘(連妙)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유청(流淸)·양소(懹素)
삼중대사(三重大師) 제승(齊承)·수겸(首謙)
중대사(重大師) 관명(觀明)·계제(契濟)·서여(偦如)·영원(穎源)·홍윤(弘允)·존현(存玄)·영감(英鑒)·자성(資誠)·정륜(靖倫)·자진(資眞)
대사(大師) 안수(安樹)・지룡(智龍)
대선사(大禪師) 순선(順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삼중대사(三重大師) 자서(滋庶)
삼중대사(三重大師) 강진(講眞)·상령(尙玲)·각표(覺標)·각초(覺初)·자조(資照)·유고(惟古)·각관(覺觀)·영모(令模)·정웅(挺雄)
대사(大師) 승린(僧麟)·승원(承遠)·면조(沔照)·존기(存己)
대덕(大德) 탄순(誕純)·교간(敎干)·제기(齊己)·각진(覺眞)
대선사(大禪師) 교웅(敎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경인(景仁)·중제(衆濟)·덕소(德素)·원백(元白)
대사(大師) 지성(知性)·해원(解圓)·숙명(淑明)
대덕(大德) 공변(工辯)·덕숭(德嵩)·덕성(德成)·사중(師中)·진탑(眞塔)·현묵(賢黙)
선사(禪師) 의관(懿觀)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지실(至實)
선사(禪師) 현소(玄素)·남정(南挺)·담순(曇順)·석유(釋猷)·현석(玄碩)·상겸(尙謙)·처공處恭)·준평(俊平)·형신(瑩神)·묘관(妙觀)・신조(神照)
대덕(大德) 관승(觀勝)·순고(純古)·관소(觀素)
선사(禪師) 순성(順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청(壽淸)
중대사(重大師) 천언(天彦)·원승(元承)·국영(國英)·학현(學玄)·성진(性眞)·경충(景沖)·준(俊機)·지충(智沖)
선사(禪師) 유청(流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녹만(綠萬)·도가(道可)·체진(諦眞)
대덕(大德) 승연(昇衍)·영택(靈澤)·당이(唐伊)·인지(仁智)·심지(心智)
선사(禪師) 유서(惟諝)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담린(曇麟)
대덕(大德) 원미(元美)
선사(禪師) 신웅(信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관승(冠承)
대사(大師) 제식(齊軾)
선사(禪師) 회소(懷素)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사(大師) 영엄(永嚴)
대덕(大德) 영존(永存)
삼중대사(三重大師) 이서(利諝)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영간(領干)
삼중대사(三重大師) 석승(釋承)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선호(禪浩)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청(壽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신백(神白)
중대사(重大師) 세청(世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영순(領純)
그러나 사제(師弟)의 이름이 전후에 나열된 것은 감히 좋은 것은 못되나, 장차 만재(萬載)의 후에 그 기본(基本)을 말미암아 동요(動搖)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정사년(丁巳年) 8월 일에 성지(聖旨)에 따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와 판관(判官)에 권농사(勸農使)를 겸한 문림랑(文林郞)이며 예빈주부(禮賓注薄)인 김표민(金表民)과 천수사(天壽寺) 주지(住持) 홍진(洪眞)과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수청(壽淸), 그리고 천수사의 의학(義學)인 묘관(妙觀)과 중대사(重大師)인 상령(尙玲) 등의 감독하에 비석을 세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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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02
이병욱, 2002, 「의천·소현·이자현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韓國宗敎史硏究』10
논문
2000
齋藤忠, 2000, 「開城市靈通寺跡の大覺國師碑の現狀について-付 大覺國師の墓域の新發見-」『朝鮮學報』106·107, 일본 조선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