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위묘지명(崔士威墓誌銘)
- 시대
- 고려
- 연대
- 1075년(문종 29)
- 유형
- 묘지명·묵서명
- 크기
- 높이 50.5 너비 52.0 글자크기 1.3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최사위(崔士威, 961~1041)의 자는 동환(動寰)으로 수주(水州, 지금의 경기도 水原市) 사람이다. 증조 서천(徐遷)은 호장(戶長)이고, 조부 한용(韓用)은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이며, 아버지 융예(融藝)는 대위(大尉)의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 유씨(庾氏)는 김해부 아간(金海府 阿干) 울행(鬱行)의 딸이다. 서리로부터 출발하여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랐으며 벼슬은 태사 삼중대광 내사령(太師 三重大匡 內史令)에 이르렀다. 현화사(玄化寺), 봉은사(奉恩寺), 대묘(大廟)의 건립을 주관하였으며, 보제사 금당(普濟寺 金堂)과 나한전(羅漢殿), 서경(西京)의 사천왕사(四天王寺)와 장락궁(長樂宮)·태조진전(太祖眞殿) 등 15곳의 사찰과 관사를 창립하거나 고쳤다. 현종(顯宗)이 태자로 있을 때에 김치양(金致陽)이 여후(呂后 : 千秋太后 皇甫氏)와 더불어 모의하여 장차 태자를 해치고자 하였는데, 그가 아뢰어 검위(檢衛)를 파견하여 위기를 피하도록 하여 마침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또 관리와 백성들이 공첩(公牒)을 위조하여 공물(貢物)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공이 아뢰어 조사한 뒤에는 그러한 부정이 없어졌다. 또한 현종 9년(1018) 거란(契丹)의 소배압(蕭排押)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에는 이를 물리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현종(顯宗)의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었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슬하에 6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였다. 본 묘지명은 그의 사후 35년 되는 1075년(문종 29)에 막내아들 영언(令言)이 송림현(松林縣 : 지금의 경기도 長湍郡 소속) 경내 송현(松峴)에 개장하면서 만들어 묻은 것이다. 원문에는 고의로 획을 생략한 채 글자를 새긴 것이 많다. 예를 들면 ‘創’을 ‘倉’으로. ‘王’을 ‘三’으로, ‘致’를 ‘至’로 표기한 것 등인데, 이는 당시의 기휘(忌諱)에 따른 결필(缺筆)이라고 보여진다.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김용선 | ||
판독문 | 김용선 | ||
판독문 | 허흥식 |
참고문헌
단행본 | 2012 | 金龍善, 『第五版 高麗墓誌銘集成』, 한림대학교출판부 |
단행본 | 2003 | 任世權·李宇泰, 『韓國金石文集成 : 고려12 묘지명1』28, 한국국학진흥원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단행본 | 1987 | 서울시 편, 『서울금석문대관』2, 서울시, 1987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논문 | 1984 | 崔虎林, 1984, 「高麗初期의 墓誌에 관한 一考察」『韓國學論叢』6,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논문 | 1982 | 朴龍雲, 1982, 「高麗時代 水州崔氏家門 分析」『史叢』26 |
단행본 | 1976 | 劉燕庭, 1976, 『海東金石苑』下, 亞細亞文化社 |
단행본 | 1963 | 李蘭暎, 1963, 『韓國金石文追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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