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고려국(太宋 高麗國)의 돌아가신 내사령(內史令)이고 시호 정간공(貞簡公)의 묘지명 및 서문
그윽하게 참으로 하늘이 내린 덕을 지닌 중니(仲尼)
1는 인륜의 도를 넓혔으며, 산악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태어난 중산보(仲山甫)
2는 왕실을 도와 흥하게 하였다. 그 뒤 대대로 학교를 넓혀 빼어난 선비를 잇달아 뽑으니 대들보 같은 신하들이 한(漢)과 당(唐)에 무성하고, 재능 있는 인사들이 진한[辰]과 변한[卞]에 이어졌다. 도량이 강과 바다를 포용하고 식견이 고금을 꿰뚫으며, 문장을 잘 지어 국가의 정책이나 임금의 조칙을 윤택하게 꾸미고, 하늘을 휩싸는 지략을 펴서 국가를 빛나게 보필할 수 있는 이는 우리 정간공(貞簡公)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의 성은 유씨(柳氏)이고, 이름은 방헌(邦憲)이며, 자는 민측(民則)으로, 전주(全州) 사람이다. 증조 기휴(其休)는 성품이 검소하고 곧았으며, 벼슬이 각간(角干)-옛날의 관직명이다-에 이르렀다. 조부 법번(法攀)은 젊어서 무예를 익혀 백제(百濟)
3에 벼슬하여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아버지 윤겸(潤謙)은 자가 수익(受益)으로, 사람됨이 공명 정직하여 문필로서 벼슬하여 검무 조장(檢務 租藏)
4이 되고, 대감(大監)-모두 옛날의 관직명이다-에까지 이르렀다. 어머니 이씨는 담양군(潭陽郡)
5 사람이며, 외조 염악(廉岳)은 식견과 도량이 있어 백제가 장차 어지러워지려 하자 이름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씨는 계묘년(태조 26, 943) 3월에 비로소 임신하여, 갑진년(혜종 1, 944) 정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어린 나이에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으며, 오경(五經)
6 및 그 소의(疏義)를 자세하게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이 17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의 상(喪)을 마치고 나자 명경과(明經科)
7를 보기에 이롭지 않았다. 그 때 광종(光宗)이 처음으로 제술과(製述科)를 주관하여 시부(詩賦)로써 사람을 뽑으니
8, 공이 향공진사(鄕貢進士)
9로 건원(乾元)
10 10년 임신년(광종 23, 9월 5일에 응시하여 한 차례에 과거의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므로
11, 조칙을 내려 공문박사(攻文博士)로 삼았다. 이로부터 옮겨서 광문교서랑(光文敎書郎)이 되었다가 또 광문랑(光文郎)이 더해지고, 다시 국자주부(國子主簿)를 더하였다가 또 사문박사(四門博士)를 더하였다.
옹희(雍熙)
12 4년 정해년(성종 6, 987),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신들에게 책문(策問)을 바칠 것을 명하니, 공이 또 으뜸으로 뽑혔다.
13 임금이 그를 포상하여 어사 우사원외랑(御事 右司員外郞)로 삼고 비어대(緋魚袋)를 내려주었으며,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에 임명하였다. 또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를 더하고, 또 예부낭중(禮部郞中)을 더하였으며 자어대(紫魚袋)를 내려주었다. 통화(統和)
14 13년 을미년(성종 14, 995)에 통직랑(通直郞)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에 임명하고, 또 국자사업(國子司業) 지공거(知貢擧)로 옮겼다.
15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예부시랑(禮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이 하였다. 그 때 목종이 자못 사냥하고 다니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간직(諫職)에 있는 까닭에 자주 항소하는 글을 올렸다. 말이 매우 굳세고 바르며 옛 일을 인용하면서 지금 일을 논하면서도 꺼리거나 가리지 않으니, 임금이 비록 그 말에 따르지는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부끄러워하였다. (통화) 18년 경자년(목종 3, 1000)에 한림학사 지공거(翰林學士 知貢擧)에 임명되고
16, 또 중추부사(中樞副使)를 더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다시 사냥의 일을 간하니, 임금이 또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임금을 섬기고자 하는 절개가 있음을 알아 비서감 중추사(秘書監 中樞使)를 삼았다. (통화) 21년 갑진년(목종 7, 1004)에 칙명을 받들어 「헌화대왕릉신도비(獻和大王陵神道碑)」
17의 비문을 지으니, 임금이 그것을 보고 기뻐 감탄하여 판한림원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감수국사 상주국 정의대부 하동현 개국후 식읍 300호(判翰林院事 左散騎常侍 叅知政事 監修國史 上柱國 正議大夫 河東縣開國侯 食邑 三百戶)를 내렸다. (통화) 24년 병오년(목종 9, 1006)에는 내사시랑평장사 금자흥록대부(內史侍郞平章事 金紫興祿大夫)에 임명하였다.
(통화) 27년 기유년(현종 즉위, 1009)에 명령을 내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삼고, 부친을 봉하여 좌승(佐丞)으로 하고, 모친을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으로, 부인 백씨(白氏)를 상당군대군(上黨郡大君)으로 하였다. 7월에 병이 들었는데, 8월 12일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슬퍼하면서 조서를 내려 “애통합니다, 팔과 다리 같은 신하를 잃었습니다. 슬픕니다, 눈과 귀 같이 의지하던 신하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14일에 관리를 보내어 조문하고, 교서를 내려 시중(侍中)직을 더하고, 시호를 정간공(貞簡公)이라고 추증하였다. 20일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도성의 서산(西山)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향년 66세이다.
29세에 벼슬길에 올라 처음 벼슬할 때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무릇 37년인데, 모두 문물(文物)과 전장(典章)을 관장하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을묘년(현종 6, 1015) 상서도사(尙書都事) 충현(冲玄)이 임금의 은택을 입게 되면서 (공을)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하니, 무덤이 빛나게 되었다.
위대하도다. 행적과 훈공과 명성과 빼어난 재능을 차례로 드러낼 수 있겠으나, 잘 아는 사실을 어찌 번거롭게 갖추어 적겠는가. 지금은 묘역을 옮기는 근본적인 이유만을 적는다. 공이 구원(九原)으로 가신 뒤로 이미 36년이 지났으므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묘도(墓道)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이끼가 현궁(玄宮)에 짙게 끼었다. 효성스러운 아들들이 늘 절기가 바뀔 때마다 경건히 제사를 드리는데, 비록 음성과 용모가 아득하여 바라보지 못하지만 유골은 오히려 남아 있으므로, 몸을 경건하게 씻고 옛 무덤을 열고 새 무덤으로 받들어 옮기고자 하였다. 송악(松岳)
18 북면(北面) 정남쪽[徵音]의 아주 좋은 자리를 택하여 신묘년(문종 5, 1051) 8월 6일 갑신일에 개장하며, 이에 명(銘)을 짓는다.
공이 태어나니 반천(半千)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일이고
임금을 보필하니 그 힘이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정도이니,
경륜의 지혜로움은 방두(房杜)
19에 버금가고
덕행의 등급은 연건(淵騫)
20에 맞먹는다.
곽광(霍光)
21과 같은 기둥이 되니 견고하지 않을 수 없고
부열(傅說)
22의 배는 큰 내를 건넜는데,
기둥이 부러지고 배가 부숴지는 것이 어찌 그리 급하여
공은 떠나가 구천(九泉)으로 들어갔는가.
복상(卜商)
23은 지하의 수문랑(修文郞)
24이 되고
거이(居易)
25는 저승길에서 시를 짓는 신선이 되었으나,
혼령[精]을 거두어 간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덤 속[臺扃]의 긴긴 밤이 40년이나 되었다.
음성과 용모는 비록 볼 수 없으나
뼈와 관목(棺木)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문득 그리워하며 목욕하고 아뢰는 것은
겸하여 묘지를 개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길지(吉地)를 택하여 소가 잠자는 자리[牛眠]를 얻고
좋은 날을 가려서 정토를 이루도록[巢蓮] 도우니,
옛 무덤을 버리고 새 유택(幽宅)에 안치하며
제물과 술을 놓고 몸소 경건하게 고하노라.
“저는 당신의 토전(士田)을 물려받고
가문의 업을 이어 이에 첫 벼슬길에 올랐는데
힘써 보답하고자 하나, 그 대상이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남기고 가신 아름다움을 펴서 장차 멀리 전하고자 하여
이제 평생의 업적을 모두 기록하노니
좋은 돌을 갈고 쪼아 이 글을 새깁니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