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 높이 91.0cm 길이 321.0cm, 너비 297.0cm, 이수 높이 109.0cm, 너비 233.0cm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3 고달사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
/각자
/서자
김정언(金廷彦)
/ 이정순(李貞順)
/ 장단열(張端說)
지정사항
보물
연구정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개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 터에 있던 고려초의 선사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의 비이다.
현재 생동감이 넘치는 입체적 조각의 귀부와 이수는 현지에 있고, 비신은 1916년에 무너져 여덟 조각 나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절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양호하여 글자 판독이 가능하다.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장단열(張端說)이 해서체로 썼으며 이정순(李貞順)이 새겨 대사가 입적한 17년 뒤인 975년(광종 26)에 세우고, 탑은 다시 2년 뒤인 977년(경종 2)에 세웠다. 음기에는 12년 만에 탑비를 세우는 일이 끝났다고 기록하였다. 비문은 정간(井間)을 치고 글자를 새겼으며 42행에 1행 70자 내외의 구성을 가진 대형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원종대사의 탄생과 심희(審希)에게 출가하여 당(唐)에 가 투자대동(投子大同)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태조를 만나고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다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고 광종 대에 국사로 책봉되어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고달원이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3대 부동사원(不動寺院)이 된 내용과 문하제자로 5백 여인이 있음을 말하고 4인의 삼강직과 각자(刻字), 탑명(塔名), 송장(送葬), 재(齋), 수비(修碑), 장지필연(掌紙筆硯), 석장(石匠) 등 구체적인 탑비 건립 직책을 열거하였다. 고려 초 불교계의 동향 파악에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국(高麗國) 광주(廣州) 혜목산(慧目山) 고달원(高達院) 고(故) 국사(國師) 증시(贈諡)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탑비명(慧眞之塔碑銘)과 서문(序文).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내봉령(內奉令) 전예부사(前禮部使) 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의 명을 받들어 짓고, 봉의랑좌윤(奉議郞佐尹) 전군부경(前軍部卿) 겸내의승지사인(兼內議承旨舍人) 신(臣) 장단열(張端說)이 왕의 칙[勅奉制]에 따라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관찰해 보건대 태양이 부상(扶桑)으로부터 떠오름에 모든 사람의 우러름이 되고, 부처님께서 천축(天竺)에서 탄생하시니 모든 인류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어 군자의 나라로 하여금 법왕(法王)의 도(道)를 배우게 하였다. 이른바 그 도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 또한 우리들 각자의 신중(身中)에 내재한 것이므로, 도를 깨달음이 높고 깊으므로 도사(導師)가 되었고 덕(德)이 두터우므로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셨다. 이에 그 위대한 자취로 말미암아 드디어 즉심즉불(즉심즉불)의 이치를 개시(開示)하였으니, 그 광명(光明)은 마치 물 위에 나타난 연꽃 같고, 밝기는 별들 가운데 둥근 달과 같았으니 실로 대사(大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니 계림(鷄林)의 하남(河南) 출신이다. 대대손손(代代孫孫) 명문호족(名門豪族)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청규(淸規)이다. 종조(宗祖)를 공경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忠誠) 등 아름다운 행적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으니,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휘(諱)는 용(容)이니 백홍(白虹)의 영기(英氣)와 단혈(丹穴)의 기자(奇姿)를 띠고 태어났다. 노을과 비단처럼 고상(高尙)한 빛을 함유(含有)하였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 새벽 범종(梵鍾)소리의 아운(雅韻)을 풍겼다. 드디어 출세(出世)하여 창부(倉部)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장사현(長沙縣)의 현령(縣令)이 되어 백리(百里)의 관할 영내(領內)에 행춘(行春)의 덕화(德化)를 베풀었고, 화현(花縣)을 만들어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진동하였다. 구중향일(九重向日)하는 일편충심(一片忠心)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그를 기둥처럼 의뢰(依賴)하였고, 지방 향려(鄕閭)에서는 한결같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니, 부덕(婦德)을 두루 닦았고 모의(母儀)는 부유(富有)하여 그 우아함이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告하기를, “원컨대 어머님을 삼아 아들이 되어서 출가(出家)하여 부처님의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므로 묘연(妙緣)에 의탁하여 공경히 자비하신 교화(敎化)를 펴려 합니다”라는 수승한 태몽을 꿈으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삼가 조심함으로써 문왕(文王)과 같은 아들을 출생(出生)하려고 정성껏 태교를 봉행하였다. 부지런히 태교(胎敎)를 닦아 함통(咸通) 10년 용집(龍集) 기축(己丑) 4월 4일에 대사가 탄생하였다. 선아(善芽)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하여 묘(妙)한 결과가 조금도 지지부진(遲遲不進)한 적이 없었다. 드디어 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佛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하고 문득 혜목산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각로(覺路)를 수행하여 비록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율의(律儀)를 의지하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22세 되던 해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로부터 인초(忍草)가 싹을 내고 계주(戒珠)가 빛을 발하는 초기임에도 오히려 도를 배움에 피로(疲勞)를 잊고, 스승을 찾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본사(本師)인 진경대사(眞鏡大師)가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대사도 행장(行裝)을 정돈하여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송계선원으로 따라가서 예족(禮足)의 소충(素衷)을 나타내어 주안(鑄顔)의 현조(玄造)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진경스님께서 이르기를, “백운(白雲)이 천리(千里)나 만리(萬里)에까지 덮여 있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구름이며, 명월(明月)이 전후(前後)의 시냇물에 비추나 오직 달은 하나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에 있을 뿐이다. 대사가 생각하기를, “무릇 도(道)에 뜻을 둔 자가 어찌 일정한 곳에 고정된 스승이 있으랴!”하고, 스님에게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심사문도(尋師問道)할 것을 고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그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라. 나는 자네에게 깊이 징험(徵驗)하였다”면서 기꺼이 떠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멀리 해외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산을 내려와 해변으로 가서 중국으로 가는 선편(船便)을 찾았고,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 봄 송(宋)나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만나 편승(便乘)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운수(雲水)를 바라보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각(行脚)하되 연하(煙霞)를 향하여 자취를 행하였다. 그리하여 큰스님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참방(叅訪)하고, 이름 있는 고적(古跡)은 샅샅이 답사하였다.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 나아가 투자화상(投子和尙)을 친견하였으니, 그의 법호는 대동(大同)이며, 석두산(石頭山) 희천(希遷)의 법손(法孫)이고, 취미무학대사(翠微無學大師)의 적윤제자(嫡胤弟子)이다. 그는 대사의 연꽃 같은 눈, 특수한 자태(姿態), 미간백호(眉間白毫)와 같은 특이한 상모(相貌)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인도(印度)로부터 동류(東流)하여 설법(說法)한 자와 동국(東國)에서 중국에 와서 구학(求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가히 더불어 도담(道談)을 나눌 만한 이는 오직 그대뿐이다”하고 기뻐하였다.
대사는 이때 미언(微言)을 투자(投子)의 혀끝에서 깨닫고 진불(眞佛)이 바로 자신의 신중(身中)에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밀전(密傳)을 계승하며, 정명(淨名)이 문수(文殊)와 묵대(黙對)함을 받들 뿐이겠는가! 대사가 투자화상(投子和尙)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화상이 이르기를, “너무 먼 곳으로 가지 말고 또한 너무 가까운 곳에 있지 말라”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비록 스님의 말씀처럼 원근양처(遠近兩處)가 아닌 곳에도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마음으로 전하는 이치를 체험했으니, 어찌 상대하여 서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그 후 곁으로는 훌륭한 도반(道伴)을 찾아 순례하면서 고명한 선지식을 참방(叅訪)하되, 때로는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 은거할 만한 곳을 찾으며, 혹은 강좌(江左) 지방에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여 진여(眞如)의 성해(性海)에 들어가서 마니(摩尼)의 보주(寶珠)를 얻기도 하였다. 이에 큰 붕새는 천지(天池)에서 변화하고 학(鶴)은 마침내 요해(遼海)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시작도 있고 끝이 있어서 이를 생각하면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타고 정명(貞明) 7년 가을 7월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에 도달하였으며,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창원 봉림(鳳林)으로 가서 진경대사에게 귀국인사를 드렸다. 대사가 이르기를, “마침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구나!”하고, 상봉하게 됨을 크게 기뻐하면서 따로 선당(禪堂)을 꾸미고 대사를 법상(法床)에 오르게 하여 중국에서 보고 배운 법문(法門)을 듣는 한편 구법(求法)하고 무사히 귀국한데 대한 환영연도 겸하였다. 스님은 담좌(譚座)에 앉아 종용(縱容)히 말하되, “사람에는 노소(老少)가 있으나 법에는 선후(先後)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여래(如來)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가섭(迦葉)의 비종(秘宗)을 연설하기도 하였다.
그 후 삼랑사(三郞寺)로 가서 선백(禪伯)이 되었다. 대사가 그곳에서 3년을 지내고 보니 참으로 낙도(樂道)의 청재(淸齋)이며, 또한 참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느꼈다. 그러나 오히려 새들도 편안히 쉬려면 나무를 선택하거늘 내 어찌 포과(匏瓜)에만 매달려 있겠는가. 복견(伏聞)하니 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큰 포부를 품고 응기(膺期)하여 포(褒)를 잡아 성스러움을 보여주려 하니, 마치 하(夏)나라 순(舜)임금이 개혁할 때 고천(顧天)의 명을 받아 주(周)나라를 비롯하여 출일(出日)의 성스러운 나라를 이룩함과 같았다. 이때 대사는 마치 조각달이 허공에 떠있듯이 고운(孤雲)이 산정(山頂)의 바위 사이를 오가듯 고상하였다. 푸른 용(龍)이 창랑(滄浪)을 건널 때 뗏목에 의지할 마음이 없다 하나, 봉새가 허공을 날면서도 오히려 오동나무 가지에 서식할 뜻이 없지 않은 것과 같았으니, 스님은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곧바로 옥경(玉京)으로 나아가 궁중에 들어가서 태조대왕을 근알(覲謁)하였다.
대왕은 대사의 도덕이 고매하고 법신(法身)이 원현(圓現)하신 분이라고 존경하면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왕청(王請)에 따라 주지하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을 크게 교화하였다. 그러나 항상 광주(廣州) 혜목산은 고운 노을이 덮여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써 연좌(宴坐)하기에 가장 적합하며, 구름 덮인 계곡은 선거(禪居)에 가장 좋은 곳이라 여겨 오던 차 다시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사방(四方) 먼 곳에서 법문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천리(千里)를 마치 규보(跬步)와 같이 가깝게 여겨 구름처럼 모여와 바다와 같은 해회(海會)를 이루었으며, 분주히 달려오는 불자(佛子)들에게 선도(善道)로써 끊임없이 지도하여 현문(玄門)에 문법대중(問法大衆)이 제제(濟濟)하였다.
태조가 바야흐로 스님을 존경하여 사자(師資)의 인연을 표하고자 적색 비단으로 만든 하납의(霞衲衣)와 좌구(座具) 등을 송정(送呈)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태조가 승하하니 마치 해가 우천(虞泉)에 지는 것과 같이 천지가 캄캄하였다. 선시(善始)의 아름다운 인(因)을 생각하며 방칙[餝終]의 현로(玄路), 즉 임종의 명복을 장식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였다. 이어 혜종대왕(惠宗大王)이 천조(踐阼)하여 공손한 생각으로 선왕을 받들어 추모하는 효심이 간절하였으며, 인(仁)을 권장하고 속(俗)을 교화하고 부처님을 존중하고 스님들을 높이 받드는 한편 차(茶)와 향(香), 무늬를 놓은 비단 법의(法衣)를 정상(呈上)하였다. 대사 또한 불심(佛心)으로 계도하여 부처님의 신통법력(神通法力)을 펴기도 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공왕(恭王)이 승하(昇遐)하고 정종대왕(定宗大王)이 보업(寶業)을 계승하여 스님의 진풍(眞風)을 첨앙하였으니, 운납가사(雲衲袈裟)와 마납법의(磨衲法衣)를 송봉(送奉)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성조(聖朝)를 깊이 생각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불사공덕(佛事功德)의 기도를 봉행하였다. 어찌 갑작스럽게 궁거(宮車)가 운궐(雲闕)을 떠나며, 홀연히 짚신을 인간세상에서 벗어버리는 때가 올 줄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지금의 임금이 당벽(當璧) 하여 보기(寶基)에 올라 나라를 다스림에 보경(寶鏡)을 잡고 용방(龍邦)의 풍속에 비추며, 지(篪)를 불어 취령(鷲嶺)의 가풍(家風)을 넓혀 더욱 성공(聖功)을 나타내어 한층 더 불화(佛化)를 존숭(尊崇)하였다. 대사는 심왕(心王)의 묘결(妙訣)을 연설하며, 각제(覺帝)의 미언(微言)을 선양(宣揚)하되, 마치 거울이 항상 비춤에 피로함을 잊고 범종(梵鐘)이 언제나 걸려 있어도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학법대중(學法大衆)은 도마(稻麻)처럼 열(列)을 짓고, 문법불자(問法佛子)의 왕래로 도리지혜(桃李之蹊)를 이루었다. 임금께서는 스님을 신향(信向)하는 마음이 깊고, 흠모(欽慕)하는 뜻 또한 지극하였다. 드디어 스님의 호를 증진대사(證眞大師)라 하고 도속(道俗)의 중사(重使)를 보내되 지검(芝檢)을 지참하여 금성(金城)으로 왕림하도록 초빙하였다. 대사는 불도(佛道)를 흥행(興行)하려면 좋은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불법의 유통(流通)을 국왕에게 부촉(咐囑)하신 것을 생각하여 왕궁으로 가기를 결심하였으며, 드디어 호계(虎溪)를 나와 용궐(龍闕)로 나아갔다. 이 때 백설(白雪) 같은 청중(聽衆)과 조정대부(朝廷大夫)인 군영(群英)들이 스님의 법안(法眼)을 우러러 보되 마치 주련(珠聯)과 같았으며, 자안(慈顔)을 대하되 환앙(環仰) 즉 마치 둥근 고리처럼 둘러서서 앙모(仰慕)하였다. 모시고 왕성(王城)에 있는 사나원(舍那院)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임금이 사나원으로 행행(幸行)하여 감사하되 제자(弟子)가 동림(東林)을 바라보듯 존경하였으며, 남간(南澗)을 향하여 정성을 기울였다.
스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함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 바람소리와 같고, 수연부감(隨緣赴感)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귀의하는 마음이 다시 간절하며 찬앙(鑽仰)하는 향심(向心) 또한 더욱 깊었다. 3일을 지낸 후 궁내(宮內)의 중광전(重光殿)에서 법회(法會)를 여니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입고 자전[紫殿法床]에 올랐다. 임금이 스님의 과순(菓脣)을 보고 선열(禪悅)에 잠겼으며 연안(蓮眼)을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환구(環區)가 모두 피석(避席)의 예의를 폈으며 거국(擧國)이 함께 서신(書紳)의 뜻을 바쳤다. 삼귀의(三歸依)의 마음을 더욱 책려(策勵)하고 십선(十善)을 한층 더 닦게 되었다. 내지 개자겁(芥子劫)이 다하고 반석겁(盤石劫)이 다하더라도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한 양인(良因)은 다하지 않으며, 또한 스님의 위대한 업적은 다할 때가 없을 것이라 염원하여 곧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는 스님을 받들어 국사(國師)로 모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으며, 돈독한 정성으로 사자(師資)의 예(禮)를 행하고는 마납가사(磨衲袈裟), 마납장삼(磨衲長衫)과 좌구(座具)·은병(銀甁)·은향로(銀香爐)·금구자발(金釦瓷鉢)·수정염주(水精念珠) 등을 선물로 헌납하였다.
대사는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맑으며 구름 없는 산봉우리처럼 고고하였다. 일심(一心)으로 묘각(妙覺)[부처님]의 교풍(敎風)을 선양하며 천안(千眼)으로 대자(大慈)의 교화를 보였다. 임금께서 크게 기꺼워하여 이르기를, “제자가 깊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도를 깨달았으며 묘한 도리(道理)를 계승하여 미묘한 법을 알았나이다. 앞으로 정성을 다하여 불법을 받들어 실추(失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천덕전(天德殿)에서 크게 법회를 열고 큰 원심(願心)을 발하여 심향(心香)의 일주(一炷)를 태웠다. 대사가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한 번 휘두르고 얼굴을 약간 움직였다. 이 때 청법대중 가운데 어떤 스님이 묻기를, “향상일로(向上一路)란 어떤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일천(一千) 성인(聖人)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천성(千聖)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가섭(迦葉)으로부터 조조(祖祖)가 서로 전하여 온 것은 무엇으로부터 있게 된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다만 천성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증득(證得)하는 것이므로 초조(初祖) 가섭으로부터 서로 전해오는 것이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이러한즉 2조(二祖) 혜가(慧可)가 서천(西天)의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바라보지 않았으며, 달마대사 또한 당토(唐土)에 오지 아니한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비록 천성으로 좇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달마가 부질없이 동토(東土)에 온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문답할 때 인천(人天)이 모두 감응(感應)하였으며 현성(賢聖)도 함께 기꺼워하였다.
꽃비가 공중에 날고, 전단향(栴檀香)의 연기가 태양을 가리우는 상서가 나타났다. 마치 마등(摩騰)스님이 한(漢)나라에 오고, 강승회대사(康僧會大師)가 오(吳)나라에 들어간 때와 같아서 부처님의 크신 공덕과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그 지극함이 이보다 더한 때가 없었다. 이른바 사방이 모두 존경하고 만세토록 모두가 영원히 의뢰하였다. 부처님의 혜일(慧日)이 다시 중흥(中興)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는 인방(仁方)이 크게 변혁할 때이다.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노승(老僧)은 이제 나이 상유(桑楡)1에 임박하고 몸은 포류(蒲柳)처럼 노쇠하였으므로 다만 송문(松門)에 가서 휴족(休足)하면서 궁중인 금궐(金闕)을 향하여 폐하(陛下)에게 귀심(歸心)하기를 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비록 스님의 자안(慈顔)을 연모하나 다만 현지(玄旨)를 준수할 뿐이다. 떠나는 스님이 탄 상헌(象軒)을 바라보면서 전송하였고 안찰(鴈刹)을 우러러 항상 마음을 그곳으로 기울였다. 그 후 자주 성기(星騎)를 보내어 뜻을 전하며 선한(仙翰)을 날려 보내어 정성을 피력하되, 다음과 같은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혜등(慧燈)을 높이 들어 해향(海鄕)을 비추시었고,
진신(眞身)은 적적(寂寂)하나 화광(和光)을 나타냈도다.
패엽경(貝葉經) 연설하여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고,
발우 속 연꽃 피어 고요히 입정(入定)하셨네.
사자후(師子吼) 일음(一音)으로 무명(無明)을 흩어주시니,
이문(二門)이 상(相)을 떠나 진로(塵勞)에서 벗어났도다.
현관(玄關)은 깊고 깊어 산천山川 밖 저 넘어 있어,
그곳을 선망하나 친견할 길 전혀 없네.
이 송덕시와 아울러 오정(烏礻呈)·방천(芳荈)·단요(丹徼)·명향(名香) 등의 선물을 보내어 신심을 표하고 간절히 법력을 빌었다. 대사는 천궐(天闕)에 하직하고 곧 운산(雲山)에 이르렀다. 구름과 칡넝쿨이 얽힌 산림(山林)은 서지(栖遲)하기에 적합하며, 수도하면서 바윗돌로 베개하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기에 편의(便宜)하여 마음으로 열반할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로부터 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대사는 색(色)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여 선정(禪定)과 지혜가 함께 원만하였으며, 지도(至道)를 산중에서 행하고 현공(玄功)을 우내(宇內)에 두루 베풀었으니, 신비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시니 어찌 불(佛)이나 각자(覺者)와 다르겠는가?
현덕(顯德) 5년 세집(歲集) 돈장(敦牂) 8월 월결(月缺) 5일 대사께서 곧 열반에 들고자 하여 목욕한 다음 방 앞에 대중을 모으라고 명하였다. 대중이 모두 뜰 앞에 모였다. 대사가 유훈(遺訓)하여 가로 이르기를,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 나는 곧 떠나려 하니 일심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정진(精進)하라. 마음이 일어나면 곧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따라서 멸하나니, 인심(仁心)이 곧 부처님이거늘 어찌 별다른 종류가 있겠는가? 여래(如來)의 정계(正戒)를 힘써 보호하라! 유훈(遺訓)의 말씀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엄연(儼然)히 가부좌를 맺고 앉아 입적하였으니, 고달원(高達院) 선당(禪堂)이었다. 어희(於戱)라! 동신(東身)에 응(應)한지는 90세이고, 서계(西戒)를 받은 지는 69하(夏)이다. 호계(虎溪)는 소리 내어 오열하고 학수(鶴樹)의 빛은 우울함이 가득하였다. 문생(門生)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여 슬픔에 잠겼으며, 산중의 노스님들은 모두 자신의 노쇠함과 고위(枯萎)함을 탄식하였다. 스님과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들이 함께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암곡(巖谷)을 진동하였다.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으로 옮겨 감실(龕室)을 열고 보니 안색(顔色)이 생전(生前)과 같았다. 터를 고르고 석호(石戶)를 시설하여 유골(遺骨)을 봉폐(封閉)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선월(禪月)이 너무 일찍 빠짐을 개탄하며, 각화(覺花)가 먼저 떨어짐을 슬프다 하시고, 성사(星使)를 보내 곡서(鵠書)로써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진영1정(眞影一井)을 조성하고,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층총(層冢)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象法)을 준수한 것이다. 대사는 심등(心燈)이 강렬하며 정수(定水)는 파랑(波浪)이 없고, 지혜는 바다와 같이 원융하며 자비의 구름은 온 세계를 덮었다. 불법을 배우고 선(禪)을 깨달은 덕행과 마군을 항복받고 세속을 진압한 위릉(威稜)과 입송서학(入宋西學)한 혁혁하고 현현(顯顯)한 공적과 귀국동화(歸國東化)한 미묘(微妙)하고 외외(巍巍)한 법력(法力)은 반도(盤桃)로 하여금 윤색(潤色)케 하였으니, 마치 맑은 물이 광명을 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성스러운 공덕(功德)은 가히 지해(知解)로써 알지 못하며, 그 신비한 덕화(德化)는 가히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무상(無像)한 것이지만 반드시 상(像)으로 말미암아 공(功)을 나타내며, 도체(道體)는 말이 없는 세계이나 반드시 말을 인(因)하여야 교리(敎理)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찌 묘유(妙有)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진공(眞空)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여기 스님의 큰 제자인 양가승통(兩街僧統)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이 있으니, 그들은 법원(法苑)에서의 경종(鯨鐘)이며 선문(禪門)의 귀경(龜鏡)이다.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법광(法光)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교화하였던 옛 고승들의 남긴 빛을 이어받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은밀히 명심경구(銘心警句)를 설하였더라도 만약 위대한 기적(奇跡)을 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어찌 일진(一眞)의 법을 표하여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행장을 모아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유부(幼婦)의 문사(文辭)를 지어 우리 스님의 덕업(德業)을 비석에 기록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가(可)하다”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고(故) 국사(國師) 혜목대사(慧目大師)는 덕행은 높아 구름 위에 있고 복덕(福德)은 넓어 모든 인간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국사의 공훈(功勳)을 적어 비석에 그 무성한 업적을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이 명을 받으니 땀이 온 몸에서 흘러내렸다. 임금께 계수례배(稽首禮拜)하고 여쭙기를, “신은 학식이 천박하여 어두운 밤에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듯 스님의 고매하신 그 경계(境界)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며, 또한 허공에 실을 드리우면 분간하기 어려운 것과 같이 스님의 자재무애(自在無礙)하며 신묘불사의(神妙不思議)한 경지는 필설(筆說)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천근(淺近)한 마재(麽才)로써 스님의 현미(玄微)하고 빛나는 위대한 행적을 기록하려는 것이 마치 섬궁(蟾宮)의 달을 잡으며, 여룡(驪龍)의 턱 밑에 있는 보주를 탐색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나이다. 설사 푸른 하늘이 내려앉아 절구통 위에 걸쳐져 있는 때와, 푸른 바닷물이 줄고 줄어 옷을 벗지 아니하고 바지만 걷어 올리고도 능히 건널 수 있는 때가 다가올 때까지 스님의 큰 공적도 길이 남아 묘한 행적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며, 이로 인하여 감히 성덕(盛德)의 형용(形容)을 아름답게 하며 또한 장래 승사(僧史)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하였다. 거듭 그 뜻을 펴고자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크고도 위가 없는 무상(無上)한 묘각경지(妙覺境地)
높고 멀고 또 깊어 심심미묘(甚深微妙) 그 진종(眞宗)
현(玄)하고 또 현(玄)하여 찾을 길 전혀 없고,
오로지 이심전심 목격(目擊)으로 통함일 뿐.
진유(眞有)의 그 세계는 유(有)이지만 유(有) 아니고,
진공(眞空)의 그 이치는 공(空)이지만 공(空) 아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처럼 물방울이 묻지 않고,
수많은 별들 중엔 둥근 달이 으뜸이듯
온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고,
인천(人天)이 바라보고 모두가 기뻐하네.
생각을 집중하여 현하(玄河)를 바라보고,
지극한 신심(信心)으로 불리(佛理)를 탐구하다.
적정(寂靜)한 선열미(禪悅味)로 무아(無我)에 몰입하고,
법희(法喜)에 배가 불러 태평가(太平歌)를 불렀도다.
허다한 고승대덕(高僧大德) 그 누가 이러한가
고달산(高達山) 원종대사(元宗大師) 그 분 밖에 또 있을까?
울울창창(蔚蔚蒼蒼) 고송(高松)처럼 중중(衆中)에 우뚝하네
사부대중(四部大衆) 존경함이 부처님과 다름없다.
이심전심 그 경지(境地)는 삼매(三昧) 중의 삼매일세.
이르는 그곳마다 광명(光明)이 두루하다
조각배 집어타고 바다를 건너가서
뗏목은 버려두고 당당히 참방(參訪)했다.
가섭(迦葉)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전해 받고,
선법(禪法)을 받은 다음 부상(扶桑)에 돌아와서
불일(佛日)을 중흥코자 곳곳에 전파했다.
법운(法雲)은 뭉게뭉게 천지(天地)를 뒤덮었고,
나라 위해 임금과는 사자연(師資緣)을 맺었도다.
군신(君臣)이 한자리에 우연히 만났으니,
가료(可料)타 불이법문(不二法門) 선정(禪庭)에 함께 했네.
우연히 만난 인연 지혜로 얽혔으니,
계족산(雞足山) 중턱에선 조용히 비추지만,
스님의 그 모습은 언제쯤 다시 보리.
개보(開寶) 8년 용집(龍集) 연헌(淵獻) 10월 일에 세우고, 이정순(李貞順)은 글자를 새기다.
혜목산(慧目山) 고달선원(高達禪院) 국사(國師) 원종대사지비(元宗大師之碑) [제액(題額)]
고려국(高麗國) 광주(廣州) 혜목산(慧目山) 고달원(高達院) 고국사(故國師)이며, 왕이 원종대사(元宗大師)라고 시호를 추증(追贈)한 혜진탑비명(惠眞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내봉령(內奉令) 전예부사(前禮部使) 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의 명을 받들어 짓고, 봉의랑좌윤(奉議郞佐尹) 전군부경(前軍部卿) 겸내의승지사인(兼內議承旨舍人) 신(臣) 장단열(張端說)이 왕의 칙[勅(奉制)]에 따라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관찰해 보건대 태양이 부상(扶桑)으로부터 떠오름에 모든 사람의 우러름이 되고, 부처님께서 천축(天竺)에서 탄생하시니 모든 인류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어 군자의 나라로 하여금 법왕(法王)의 도(道)를 배우게 하였다. 이른바 그 도(道)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 또한 우리들 각자의 신중(身中)에 내재한 것이므로, 도(道)를 깨달음이 높고 깊으므로 도사(導師)가 되었고 덕(德)이 두터우므로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셨다. 이에 그 위대한 자취로 말미암아 드디어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이치를 개시(開示)하였으니, 그 광명(光明)은 마치 물 위에 나타난 연꽃 같고, 밝기는 별들 가운데 둥근 달과 같았으니 실로 대사(大師)가 바로 그분이시다.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니 계림(鷄林)의 하남(河南) 출신이다. 대대손손(代代孫孫) 명문호족(名門豪族)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청규(淸規)이다. 종조(宗祖)를 공경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忠誠) 등 아름다운 행적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으니,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휘(諱)는 용(容)이니 백홍(白虹)의 영기(英氣)와 단혈(丹穴)의 기자(奇姿)를 띠고 태어났다. 노을과 비단처럼 고상(高尙)한 빛을 함유(含有)하였으며, 서리내리는 늦가을 새벽 범종(梵鍾)소리의 아운(雅韻)을 풍겼다. 드디어 출세(出世)하여 창부(倉部)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장사현(長沙縣)의 현령(縣令)이 되어 백리(百里)의 관할 영내(領內)에 행춘(行春)의 덕화(德化)를 베풀었고, 화현(花縣)을 만들어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진동하였다. 구중향일(九重向日)하는 일편충심(一片忠心)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그를 기둥처럼 의뢰(依賴)하였고, 지방 향려(鄕閭)에서는 한결같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니, 부덕(婦德)을 두루 닦았고 모의(母儀)는 부유(富有)하여 그 우아함이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告)하기를, “원컨대 어머님을 삼아 아들이 되어서 출가(出家)하여 부처님의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므로 묘연(妙緣)에 의탁하여 공경히 자비하신 교화(敎化)를 펴려 합니다.”라는 수승한 태몽을 꿈으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삼가 조심함으로써 문왕(文王)과 같은 아들을 출생(出生)하려고 정성껏 태교를 봉행하였다. 부지런히 태교(胎敎)를 닦아 함통(咸通) 10년 용집(龍集) 기축(己丑) 4월 4일에 대사(大師)를 탄생하였다. 선아(善芽)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하여 묘(妙)한 결과가 조금도 지지부진(遲遲不進)한 적이 없었다. 드디어 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道)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 하고 문득 혜목산(慧目山)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각로(覺路)를 수행하여 비록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율의(律儀)를 의지하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22세 되던 해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로부터 인초(忍草)가 싹을 내고 계주(戒珠)가 빛을 발하는 초기임에도 오히려 도(道)를 배움에 피로(疲勞)를 잊고, 스승을 찾되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본사(本師)인 진경대사(眞鏡大師)가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대사(大師)도 행장(行裝)을 정돈하여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송계선원으로 따라가서 예족(禮足)의 소충(素衷)을 나타내어 주안(鑄顔)의 현조(玄造)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진경(眞鏡)스님께서 이르기를, “백운(白雲)이 천리(千里)나 만리(萬里)에까지 덮혀 있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구름이며, 명월(明月)이 전후(前後)의 시냇물에 비추나 오직 달은 하나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에 있을 뿐이다. 대사(大師)가 생각하기를, “무릇 도(道)에 뜻을 둔 자가 어찌 일정한 곳에 고정된 스승이 있으랴!”하고, 스님에게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심사문도(尋師問道)할 것을 고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그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라. 나는 자네에게 깊이 징험(徵驗)하였다.”면서 기꺼이 떠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멀리 해외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산을 내려와 해변으로 가서 중국으로 가는 선편(船便)을 찾았고,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 봄 송(宋)나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만나 편승(便乘)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운수(雲水)를 바라보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행각(行脚)하되 연하(煙霞)를 향하여 자취를 행하였다. 그리하여 큰스님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참방(叅訪)하고, 이름 있는 고적(古跡)은 샅샅이 답사하였다.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 나아가 투자화상(投子和尙)을 친견하였으니, 그의 법호는 대동(大同)이며, 석두산(石頭山) 희천(希遷)의 법손(法孫)이고, 취미무학대사(翠微無學大師)의 적윤제자(嫡胤弟子)이다. 그는 대사의 연꽃같은 눈, 특수한 자태(姿態), 미간백호(眉間白毫)와 같은 특이한 상모(相貌)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인도(印度)로부터 동류(東流)하여 설법(說法)한 자와 동국(東國)에서 중국에 와서 구학(求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가히 더불어 도담(道談)을 나눌 만한 이는 오직 그대 뿐이다.”하고 기뻐하였다.
대사는 이때 미언(微言)을 투자(投子)의 혀끝에서 깨닫고 진불(眞佛)이 바로 자신의 신중(身中)에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밀전(密傳)을 계승하며, 정명(淨名)이 문수(文殊)와 묵대(黙對)함을 받들 뿐이겠는가! 대사가 투자화상(投子和尙)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화상이 이르기를, “너무 먼 곳으로 가지 말고 또한 너무 가까운 곳에 있지 말라.”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비록 스님의 말씀처럼 원근양처(遠近兩處)가 아닌 곳에도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마음으로 전하는 이치를 체험했으니, 어찌 상대하여 서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그 후 곁으로는 훌륭한 도반(道伴)을 찾아 순례하면서 고명한 선지식을 참방(叅訪)하되, 때로는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 은거할 만한 곳을 찾으며, 혹은 강좌(江左) 지방에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여 진여(眞如)의 성해(性海)에 들어가서 마니(摩尼)의 보주(寶珠)를 얻기도 하였다. 이에 큰 붕새는 천지(天池)에서 변화하고 학(鶴)은 마침내 요해(遼海)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시작도 있고 끝이 있어서 이를 생각하면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타고 정명(貞明) 7년 가을 7월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에 도달하였으며, 배에서 내리자 마자 곧바로 창원 봉림(鳳林)으로 가서 진경대사(眞鏡大師)에게 귀국인사를 드렸다. 대사가 이르기를, “마침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구나!”하고, 상봉하게 됨을 크게 기뻐하면서 따로 선당(禪堂)을 꾸미고 대사를 법상(法床)에 오르게 하여 중국에서 보고 배운 법문(法門)을 듣는 한편 구법(求法)하고 무사히 귀국한데 대한 환영연도 겸하였다. 스님은 담좌(譚座)에 앉아 종용(縱容)히 말하되, “사람에는 노소(老少)가 있으나 법(法)에는 선후(先後)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여래(如來)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가섭(迦葉)의 비종(秘宗)을 연설하기도 하였다. 그후 삼랑사(三郞寺)로 가서 선백(禪伯)이 되었다. 대사가 그곳에서 3년을 지내고 보니 참으로 낙도(樂道)의 청재(淸齋)이며, 또한 참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느꼈다. 그러나 오히려 새들도 편안히 쉬려면 나무를 선택하거늘 내 어찌 포과(匏瓜)에만 매달려 있겠는가. 복견(伏聞)하니 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큰 포부를 품고 응기(膺期)하여 포(褒)를 잡아 성스러움을 보여주려 하니,마치 하(夏)나라 순(舜)임금이 개혁할 때 고천(顧天)의 명을 받아 주(周)나라를 비롯하여 출일(出日)의 성스러운 나라를 이룩함과 같았다. 이때 대사는 마치 조각달이 허공에 떠있듯이 고운(孤雲)이 산정(山頂)의 바위 사이를 오가듯 고상하였다. 푸른 용(龍)이 창랑(滄浪)을 건널 때 뗏목에 의지할 마음이 없다 하나, 봉새가 허공을 날면서도 오히려 오동나무 가지에 서식할 뜻이 없지 않은 것과 같았으니, 스님은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곧바로 옥경(玉京)으로 나아가 궁중에 들어가서 태조대왕을 근알(覲謁)하였다. 대왕은 대사의 도덕이 고매하고 법신(法身)이 원현(圓現)하신 분이라고 존경하면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왕청(王請)에 따라 주지하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을 크게 교화하였다. 그러나 항상 광주(廣州) 혜목산(慧目山)은 고운 노을이 덮혀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써 연좌(宴坐)하기에 가장 적합하며, 구름 덮힌 계곡은 선거(禪居)에 가장 좋은 곳이라 여겨 오던 차 다시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사방(四方) 먼 곳에서 법문(法門)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천리(千里)를 마치 규보(跬步)와 같이 가깝게 여겨 구름처럼 모여와 바다와 같은 해회(海會)를 이루었으며, 분주히 달려오는 불자(佛子)들에게 선도(善道)로써 끊임없이 지도하여 현문(玄門)에 문법대중(問法大衆)이 제제(濟濟)하였다.
태조가 바야흐로 스님을 존경하여 사자(師資)의 인연을 표하고자 적색 비단으로 만든 하납의(霞衲衣)와 좌구(座具) 등을 송정(送呈)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태조가 승하하니 마치 해가 우천(虞泉)에 지는 것과 같이 천지가 캄캄하였다. 선시(善始)의 아름다운 인(因)을 생각하며 방칙(칙終)의 현로(玄路), 즉 임종의 명복을 장식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였다. 이어 혜종대왕(惠宗大王)이 천조(踐阼)하여 공손한 생각으로 선왕을 받들어 추모하는 효심이 간절하였으며, 인(仁)을 권장하고 속(俗)을 교화하고 부처님을 존중하고 스님들을 높이 받드는 한편 차(茶)와 향(香), 무늬를 놓은 비단 법의(法衣)를 정상(呈上)하였다. 대사 또한 불심(佛心)으로 계도하여 부처님의 신통법력(神通法力)을 펴기도 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공왕(恭王)이 승하(昇遐)하고 정종대왕(定宗大王)이 보업(寶業)을 계승하여 스님의 진풍(眞風)을 첨앙하였으니, 운납가사(雲衲袈裟)와 마납법의(磨衲法衣)를 송봉(送奉)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성조(聖朝)를 깊이 생각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불사공덕(佛事功德)의 기도를 봉행하였다. 어찌 갑작스럽게 궁거(宮車)가 운궐(雲闕)을 떠나며, 홀연히 짚신을 인간세상에서 벗어버리는 때가 올 줄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지금의 임금이 당벽(當璧) 하여 보기(寶基)에 올라 나라를 다스림에 보경(寶鏡)을 잡고 용방(龍邦)의 풍속에 비추며, 지(篪)를 불어 취령(鷲嶺)의 가풍(家風)을 넓혀 더욱 성공(聖功)을 나타내어 한층 더 불화(佛化)를 존숭(尊崇)하였다. 대사는 심왕(心王)의 묘결(妙訣)을 연설하며, 각제(覺帝)의 미언(微言)을 선양(宣揚)하되, 마치 거울이 항상 비춤에 피로함을 잊고 범종(梵鐘)이 언제나 걸려 있어도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학법대중(學法大衆)은 도마(稻麻)처럼 열(列)을 짓고, 문법불자(問法佛子)의 왕래로 도리지혜(桃李之蹊)를 이루었다. 임금께서는 스님을 신향(信向)하는 마음이 깊고, 흠모(欽慕)하는 뜻 또한 지극하였다. 드디어 스님의 호를 증진대사(證眞大師)라 하고 도속(道俗)의 중사(重使)를 보내되 지검(芝檢)을 지참하여 금성(金城)으로 왕림하도록 초빙하였다. 대사는 불도(佛道)를 흥행(興行)하려면 좋은 시기를 놓쳐서는 안될 뿐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불법(佛法)의 유통(流通)을 국왕에게 부촉(咐囑)하신 것을 생각하여 왕궁으로 가기를 결심하였으며, 드디어 호계(虎溪)를 나와 용궐(龍闕)로 나아갔다. 이 때 백설(白雪)같은 청중(聽衆)과 조정대부(朝廷大夫)인 군영(群英)들이 스님의 법안(法眼)을 우러러 보되 마치 주련(珠聯)과 같았으며, 자안(慈顔)을 대하되 환앙(環仰) 즉 마치 둥근 고리처럼 둘러서서 앙모(仰慕)하였다. 모시고 왕성(王城)에 있는 사나원(舍那院)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임금이 사나원(舍那院)으로 행행(幸行)하여 감사하되 제자(弟子)가 동림(東林)을 바라보듯 존경하였으며, 남간(南澗)을 향하여 정성을 기울였다.
스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함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 바람소리와 같고, 수연부감(隨緣赴感)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귀의하는 마음이 다시 간절하며 찬앙(鑽仰)하는 향심(向心) 또한 더욱 깊었다. 3일을 지낸 후 궁내(宮內)의 중광전(重光殿)에서 법회(法會)를 여니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입고 자전[紫殿(法床)]에 올랐다. 임금이 스님의 과순(菓脣)을 보고 선열(禪悅)에 잠겼으며 연안(蓮眼)을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환구(環區)가 모두 피석(避席)의 예의를 폈으며 거국(擧國)이 함께 서신(書紳)의 뜻을 바쳤다. 삼귀의(三歸依)의 마음을 더욱 책려(策勵)하고 십선(十善)을 한층 더 닦게 되었다. 내지 개자겁(芥子劫)이 다하고 반석겁(盤石劫)이 다하더라도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한 양인(良因)은 다하지 않으며, 또한 스님의 위대한 업적은 다할 때가 없을 것이라 염원하여 곧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는 스님을 받들어 국사(國師)로 모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으며, 돈독한 정성으로 사자(師資)의 예(禮)를 행하고는 마납가사(磨衲袈裟), 마납장삼(磨衲長衫)과 좌구(座具)·은병(銀甁)·은향로(銀香爐)·금구자발(金釦瓷鉢)·수정염주(水精念珠) 등을 선물로 헌납하였다.
대사는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이 맑으며 구름 없는 산봉우리처럼 고고하였다. 일심(一心)으로 묘각[妙覺(부처님)]의 교풍(敎風)을 선양하며 천안(千眼)으로 대자[大慈(관세음보살)]의 교화를 보였다. 임금께서 크게 기꺼워하여 이르기를, “제자가 깊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도를 깨달았으며 묘한 도리(道理)를 계승하여 미묘한 법을 알았나이다. 앞으로 정성을 다하여 불법(佛法)을 받들어 실추(失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천덕전(天德殿)에서 크게 법회를 열고 큰 원심(願心)을 발하여 심향(心香)의 일주(一炷)를 태웠다. 대사가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한 번 휘두르고 얼굴을 약간 움직였다. 이 때 청법대중 가운데 어떤 스님이 묻기를, “향상일로(向上一路)란 어떤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일천(一千) 성인(聖人)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천성(千聖)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가섭(迦葉)으로부터 조조(祖祖)가 서로 전하여 온 것은 무엇으로부터 있게 된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다만 천성(千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증득(證得)하는 것이므로 초조(初祖) 가섭(迦葉)으로부터 서로 전해오는 것이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이러한즉 2조(二祖) 혜가(慧可)가 서천(西天)의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바라보지 않았으며, 달마대사 또한 당토(唐土)에 오지 아니한 것입니까?”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비록 천성(千聖)으로 좇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달마가 부질없이 동토(東土)에 온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문답할 때 인천(人天)이 모두 감응(感應)하였으며 현성(賢聖)도 함께 기꺼워하였다.
꽃비가 공중에 날고, 전단향(栴檀香)의 연기가 태양을 가리우는 상서가 나타났다. 마치 마등(摩騰)스님이 한(漢)나라에 오고, 강승회대사(康僧會大師)가 오(吳)나라에 들어간 때와 같아서 부처님의 크신 공덕과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그 지극함이 이보다 더한 때가 없었다. 이른바 사방이 모두 존경하고 만세토록 모두가 영원히 의뢰하였다. 부처님의 혜일(慧日)이 다시 중흥(中興)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는 인방(仁方)이 크게 변혁할 때이다.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노승(老僧)은 이제 나이 상유(桑楡)에 임박하고 몸은 포류(蒲柳)처럼 노쇠하였으므로 다만 송문(松門)에 가서 휴족(休足)하면서 궁중인 금궐(金闕)을 향하여 폐하(陛下)에게 귀심(歸心)하기를 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비록 스님의 자안(慈顔)을 연모하나 다만 현지(玄旨)를 준수할 뿐이다. 떠나는 스님이 탄 상헌(象軒)을 바라보면서 전송하였고 안찰(鴈刹)을 우러러 항상 마음을 그곳으로 기울였다. 그 후 자주 성기(星騎)를 보내어 뜻을 전하며 선한(仙翰)을 날려 보내어 정성을 피력하되, 다음과 같은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혜등(慧燈)을 높이 들어 해향(海鄕)을 비추시었고,
진신(眞身)은 적적(寂寂)하나 화광(和光)을 나타냈도다.
패엽경(貝葉經) 연설하여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고,
발우속 연꽃 피어 고요히 입정(入定)하셨네.
사자후(師子吼) 일음(一音)으로 무명(無明)을 흩어주시니,
이문(二門)이 상(相)을 떠나 진로(塵勞)에서 벗어났도다.
현관(玄關)은 깊고 깊어 산천(山川) 밖 저넘어 있어,
그곳을 선망하나 친견할 길 전혀 없네.
이 송덕시와 아울러 오정( 烏礻呈 )·방천(芳荈)·단요(丹徼)·명향(名香) 등의 선물을 보내어 신심(信心)을 표하고 간절히 법력(法力)을 빌었다. 대사는 천궐(天闕)에 하직하고 곧 운산(雲山)에 이르렀다. 구름과 칡넝쿨이 얽힌 산림(山林)은 서지(栖遲)하기에 적합하며, 수도하면서 바윗돌로 베개하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기에 편의(便宜)하여 마음으로 열반할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로부터 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대사는 색(色)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여 선정(禪定)과 지혜가 함께 원만하였으며, 지도(至道)를 산중에서 행하고 현공(玄功)을 우내(宇內)에 두루 베풀었으니, 신비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시니 어찌 불(佛)이나 각자(覺者)와 다르겠는가?
현덕(顯德) 5년 세집(歲集) 돈장(敦牂) 8월 월결(月缺) 5일 대사께서 곧 열반에 들고자 하여 목욕한 다음 방 앞에 대중을 모으라고 명하였다. 대중이 모두 뜰 앞에 모였다. 대사가 유훈(遺訓)하여 가로이르기를,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 나는 곧 떠나려 하니 일심(一心)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정진(精進)하라. 마음이 일어나면 곧 법(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법(法)도 따라서 멸하나니, 인심(仁心)이 곧 부처님이거늘 어찌 별다른 종류가 있겠는가? 여래(如來)의 정계(正戒)를 힘써 보호하라! 유훈(遺訓)의 말씀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엄연(儼然)히 가부좌를 맺고 앉아 입적하였으니, 고달원(高達院) 선당(禪堂)이었다. 어희(於戱)라! 동신(東身)에 응(應)한지는 90세이고, 서계(西戒)를 받은지는 69하(夏)이다. 호계(虎溪)는 소리내어 오열하고 학수(鶴樹)의 빛은 우울함이 가득하였다. 문생(門生)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여 슬픔에 잠겼으며, 산중의 노스님들은 모두 자신의 노쇠함과 고위(枯萎)함을 탄식하였다. 스님과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들이 함께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암곡(巖谷)을 진동하였다.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慧目山)으로 옮겨 감실(龕室)을 열고 보니 안색(顔色)이 생전(生前)과 같았다. 터를 고르고 석호(石戶)를 시설하여 유골(遺骨)을 봉폐(封閉)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선월(禪月)이 너무 일찍 빠짐을 개탄하며, 각화(覺花)가 먼저 떨어짐을 슬프다 하시고, 성사(星使)를 보내 곡서(鵠書)로써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진영1정(眞影 一井)을 조성하고,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층총(層冢)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象法)을 준수한 것이다. 대사는 심등(心燈)이 강렬하며 정수(定水)는 파랑(波浪)이 없고, 지혜는 바다와 같이 원융하며 자비의 구름은 온 세계를 덮었다. 불법을 배우고 선(禪)을 깨달은 덕행과 마군을 항복받고 세속을 진압한 위릉(威稜)과 입송서학(入宋西學)한 혁혁하고 현현(顯顯)한 공적과 귀국동화(歸國東化)한 미묘(微妙)하고 외외(巍巍)한 법력(法力)은 반도(盤桃)로 하여금 윤색(潤色)케 하였으니, 마치 맑은 물이 광명을 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성스러운 공덕(功德)은 가히 지해(知解)로써 알지 못하며, 그 신비한 덕화(德化)는 가히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무상(無像)한 것이지만 반드시 상(像)으로 말미암아 공(功)을 나타내며, 도체(道體)는 말이 없는 세계이나 반드시 말을 인(因)하여야 교리(敎理)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찌 묘유(妙有)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진공(眞空)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여기 스님의 큰 제자(弟子)인 양가승통(兩街僧統)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이 있으니, 그들은 법원(法苑)에서의 경종(鯨鐘)이며 선문(禪門)의 귀경(龜鏡)이다.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법광(法光)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교화하였던 옛 고승들의 남긴 빛을 이어받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은밀히 명심경구(銘心警句)를 설하였더라도 만약 위대한 기적(奇跡)을 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어찌 일진(一眞)의 법(法)을 표하여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행장을 모아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유부(幼婦)의 문사(文辭)를 지어 우리 스님의 덕업(德業)을 비석에 기록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가(可)하다.”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고(故) 국사(國師) 혜목대사(慧目大師)는 덕행은 높아 구름 위에 있고 복덕(福德)은 넓어 모든 인간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국사의 공훈(功勳)을 적어 비석에 그 무성한 업적을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이 명을 받으니 땀이 온 몸에서 흘러내렸다. 임금께 계수례배(稽首禮拜)하고 여쭙기를, “신(臣)은 학식이 천박하여 어두운 밤에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듯 스님의 고매하신 그 경계(境界)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며, 또한 허공에 실을 드리우면 분간하기 어려운 것과 같이 스님의 자재무애(自在無礙)하며 신묘불사의(神妙不思議)한 경지는 필설(筆說)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천근(淺近)한 마재(麽才)로써 스님의 현미(玄微)하고 빛나는 위대한 행적을 기록하려는 것이 마치 섬궁(蟾宮)의 달을 잡으며, 여룡(驪龍)의 턱 밑에 있는 여의주를 탐색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나이다. 설사 푸른 하늘이 내려앉아 절구통 위에 걸쳐져 있는 때와, 푸른 바닷물이 줄고 줄어 옷을 벗지 아니하고 바지만 걷어올리고도 능히 건널 수 있는 때가 다가올 때까지 스님의 큰 공적도 길이 남아 묘한 행적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며, 이로 인하여 감히 성덕(盛德)의 형용(形容)을 아름답게 하며 또한 장래 승사(僧史)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하였다. 거듭 그 뜻을 펴고자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크고도 위가 없는 무상(無上)한 묘각경지(妙覺境地)
높고 멀고 또 깊어 심심미묘(甚深微妙) 그 진종(眞宗)
현(玄)하고 또 현(玄)하여 찾을 길 전혀 없고,
오로지 이심전심 목격(目擊)으로 통함일 뿐.
진유(眞有)의 그 세계는 유(有)이지만 유(有) 아니고,
진공(眞空)의 그 이치는 공(空)이지만 공(空) 아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처럼 물방울이 묻지 않고,
수많은 별들 중엔 둥근 달이 으뜸이듯
온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고,
인천(人天)이 바라보고 모두가 기뻐하네.
생각을 집중하여 현하(玄河)를 바라보고,
지극한 신심(信心)으로 불리(佛理)를 탐구하다.
적정(寂靜)한 선열미(禪悅味)로 무아(無我)에 몰입하고,
법희(法喜)에 배가 불러 태평가(太平歌)를 불렀도다.
허다한 고승대덕(高僧大德) 그 누가 이러한가
고달산(高達山) 원종대사(元宗大師) 그 분 밖에 또 있을까?
울울창창(蔚蔚蒼蒼) 고송(高松)처럼 중중(衆中)에 우뚝하네
사부대중(四部大衆) 존경함이 부처님과 다름없다.
이심전심 그 경지(境地)는 삼매(三昧) 중의 삼매일세.
이르는 그곳마다 광명(光明)이 두루하다
조각배 집어타고 바다를 건너가서
뗏목은 버려두고 당당히 참방(參訪)했다.
가섭(迦葉)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전해받고,
선법(禪法)을 받은 다음 부상(扶桑)에 돌아와서
불일(佛日)을 중흥코자 곳곳에 전파했다.
법운(法雲)은 뭉게뭉게 천지(天地)를 뒤덮었고,
나라 위해 임금과는 사자연(師資緣)을 맺었도다.
군신(君臣)이 한자리에 우연히 만났으니,
가료(可料)타 불이법문(不二法門) 선정(禪庭)에 함께 했네.
우연히 만난 인연 지혜로 얽혔으니,
계족산(雞足山) 중턱에선 조용히 비추지만,
스님의 그 모습은 언제쯤 다시 보리.
개보(開寶) 8년 용집(龍集) 연헌(淵獻) 10월에 세우고,
이정순(李貞順)은 글자를 새기다.
【裏面】
건덕(乾德) 9년 세차(歲次) 신미(辛未) 10월 21일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개독(開讀)할 때 황제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국내의 사원(寺院) 중에 오직 3처(三處)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門下)의 제자들이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3처(三處)란 이른바 고달원(高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 등이다. 주지(住持) 삼보(三寶)는 모름지기 국주(國主)의 힘을 의지하여야 하나니, 그 까닭인즉 석가여래께서 출세(出世)하사 이르시기를, “불법의 외호(外護)를 국왕과 대신들에게 부촉(咐囑)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신(臣)이 이로써 우리 황제폐하께서도 지극하신 정의(情誼)로 깊이 석문(釋門)의 묘리(妙理)를 경중(敬重)하시고, 함께 양인(良因)을 맺어 이 규칙이 영원히 유통(流通)되도록 하였다.
문하제자인 도(道)·속(俗) 등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重大師 同光
重大師 幸近
大師 傳印
大德 金鏡
三重大師 訓善
重大師 俊解
大德 勝演
大德 義光
大師 全狀
大德 僧&C0101;
和尙 幸希
和尙 幸海
和尙 幸位
僧摠 戒定
大統 談弘
大德 幸吉等 五百餘人
三剛典 院主僧 孝安
典座僧 幸崇
直歲僧 法元
維那僧 幸溫
門下刻字僧 幸言 慶然 宗能 廣規
塔名使 太相 神輔
副使 佐尹 令虛
送葬使 正輔 信康
副使 佐尹 圭康
齋使 元尹 守英
祿僧史 英順
修碑使 卿 圭凝
直務 憲規
掌持筆硯官 眞書 左直學生 李弘廉
石匠 仍乙希
병인년(丙寅年)에 비탑공사(碑塔工事)를 시작하여 정축년(丁丑年)에 준공하였다.
院主僧 孝安
典座僧 幸崇
維那僧 幸溫
直歲僧 法圓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