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光陽 玉龍寺 洞眞大師 寶雲塔碑)
- 시대
- 고려
- 연대
- 958년(광종 9)
- 유형
- 비문
- 크기
- 높이 197.0cm, 너비 106.1cm, 글자크기 1.8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김정언(金廷彦) / 계묵(繼默) / 현가(玄可)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 터에 있던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통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869(경문왕 9)~947(정종 2)]의 비. 비는 파손되어 전하지 않고 비편의 일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비문 전면의 탁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승려 현가(玄可)가 해서로 쓴 것을 계묵(繼黙)이 새겼다. 비문의 구성은 54행에 1행 72자이다. 비문 내용은 통진대사가 태어나 수학하고 도선(道詵)의 제자가 되었다가 무염과 범일을 예방하고 당에 가서 소산광인(疎山匡仁)에게서 조동종을 전수받고 강서노선(江西老善)의 심인도 받아 귀국한 후 견휜의 귀의를 받고 옥룡사에 주석하다 후백제가 패망한 후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에 가서 귀의를 받다 광종대에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판독문/해석문
판독문 | 허흥식 |
光陽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
高麗國光州晞陽縣故白鷄山玉龍寺 制諡洞眞大師寶雲之塔幷序」
通直郎正衛翰林學士賜丹金魚袋臣金廷彦奉 制撰 門弟子沙」
門臣釋玄可奉 制書」
恭惟法身動寂道體希夷塵區懸見聖之心沙界掛求仁之念 大雄西降眞法東傳於是僧會遊吳摩騰赴漢佩梵仙之密印演禪伯之秘宗遂使學 佛化人習禪濟俗盖亦」
生寶月於楞伽之上杳想 金人得玄珠於赤水之中高憑罔象爰囙默默只在心心懸目鏡以西遊苞含衆妙瑩心珠而東返攝化群生釋門高闢於風丘玄道聿興於震域佛者覺也」
師而行之 大師其人矣法諱慶甫字光宗俗姓金氏鳩林人也父益良位閼粲鰲峀降靈毓光華之餘慶鷄林誕粹騰弃葉之彌芳母朴氏行葉風淸心花露裛中饋無非於壺政內和」
自是於家肥於咸通九年相月哉生明夜夢白鼠啣靑琉璃珠一顆而來遂人語曰此物是希代之奇珎迺玄門之上寶懷須護念出必輝光因有娠處心齋戒 如來出世之月二十日」
誕生大師誕彌月以無芋果髫秊而有慶則是法芽尙早勝果逆脩雖居兒戱之中猶在童年之上年登幼學纔傾鼓篋之心德貴老成旣有緇門之志迺告二親曰願得離塵之請覬脩登」
地之因雖乏慧柯惟期法棟父母潛然歎曰成已仁也成物智也合內外之道也汝棲禪而美則美矣我割愛而悲莫悲兮大師志在其親心期卽 佛父母迺曰人所欲者天且從之」
豈昧愛子之因猶有嚴君之拒遂泣而䚷直往夫仁山寺落采因栖學藪未樂禪山迅足空留它心尙住魂交之夕 金僊摩頂提耳迺授之方袍曰汝其衣之所以衛身而行乎且此地」
非心學者栖遲之所亟去之不亦冝乎大師卽以形開因而警戒以爲道之將行時不可失昧爽坐以待旦挈山裝鳥逝乃詣白鷄山謁道乘和尙請爲弟子脩菩薩道入如來家覩奧之眼」
曾開知幾之心旣悟以爲非智無以護其法非戒無以防其違年十有八禀具於月遊山華嚴寺忍草抽芽浮囊濟浪益驗戒香之馥孔彰心石之堅坐雨方終出雲還似復徃白鷄山辭大」
師師因謂曰汝其志不可奪勢不可遏汝以吾爲東家丘末如之何遂笑而聽去自尒遊有泛覽學無常師歷謁聖住無染大師崛山梵日大師譚柄纔揮玄機了見念言于以採玉于以探」
珠道遠乎哉行之則是遂於景福元年壬子春出山翽翽並海飄飄爰傾入漢之心乃告凌波之客許之萬載忻以同行已過秦橋旋臻漢地雲心訪道浪跡尋師乃詣撫州疎山謁匡仁和」
尙仁若曰格汝鯨海龍子耶大師玄言遂颺秘說爰諮許以昇堂因以入室方資目擊旣得心傳仁公大喜因謂曰其有東流之說西學之求者則可與言道者鮮矣東人可目語者惟子誰」
今執手傳燈因心授印汝其盤桃山側撝佛日以再中蒸棗海隅導禪河而更廣必矣自是僧之眞者必詣境之絶者必搜去謁江西老善和尙和尙乃欲聽其言觀其行因謂曰白雲鏆斷」
行人路答曰自有靑霄路白雲那得留和尙以大師捷對不羈颺言無礙乃送之曰利有攸徃時然後行大師以鵬必變於南溟鶴歸於東海思欲罷遊華夏返照桑津適値歸舟因而東」
還天祐十八年夏達全州臨陂郡而屬道虛行之際時不利之初粵有州尊都統甄太傅萱統戎于萬民堰也太傅本自善根生於將種方申壯志雖先擒縱之謀曁謁慈顔倍勵瞻依之志」
乃歎曰遇吾師而雖晚爲弟子以何遲避席拳拳書紳慥慥遂請住州之离地南福禪院大師曰鳥能擇木吾豈匏爪迺以白鷄山玉龍寺者是故師爲樂道之淸齋乃安禪之勝踐雲溪空」
在枕漱最宜遂言於太傅許之移而住焉實謂筏旣捨於歸塘珠復還於舊浦踵慈軒之徃轍繼智炬之餘輝於是絶學者遂相慶曰雖懊頃年泰山有其頽之歎且靦今日介衆無安仰之」
悲摳衣者寔繁有徒曳襶者其麗不億大師一居雲水二紀星霜朗鏡忘罷洪鍾待扣循循然善誘于扶桑頃及乎淸泰三年丙申秋 我 太祖神聖大王躬擐周衣手提漢釼龔行天」
干討丕冒海隅協和三韓奄有四郡加復輯寧君子國瞻仰 梵王家聞大師雲遊西土以有歸霧隱南山而無悶栖眞絶境貯福寰區 太祖於是企望淸風遙瞻白月遽飛」
芝檢徵赴玉京及其目覩鳳來儀耳聞龍變化雖是歸僧之禮方同奉 佛之儀大師乃月過蒼天雲歸碧岫寂寂葆光於塵外玄玄施化於域中所謂不肅而成無爲而治競奔馳於善道」
俱出入於福門未幾龍遽墮髯魚難在藻杞國有天崩之歎咸池無日蘸之光 義恭大王奉以遺風繼之先志注精心而亹亹祈法力以孜孜奄棄人間已歸天上 ▨▨▨▨▨」
文明大王陟崗致美莅阼重光聯華弘天竺之風握鏡照海邦之俗仍飛鳳筆佇降衆軒越三年龍集協洽四月二十日大師將化徃盥浴已訖房前命衆悉至于庭迺遺戒曰我旣將」
行衆其好住塵俗有貴賤空門無尊卑水月澄心烟霞抗跡衣必均服食無異粮止宜以採薇爲裏粮以禪悅爲飫味則是吾徒也適我願兮吾道有何觀行無餘力尒衆致我塔以藏遺體」
碑以紀行事無以爲也不亦宜乎則是瞻玄福於亾師矣言畢入房倚繩床趺坐儼然而示滅于玉龍上院嗚呼存父母體八十春入 菩薩位六十二夏是晨也於玄武山嶺頭有如四」
五介嬰兒之呱呱者日慘香庭風悲寶刹松柏帶哀哀之色人靈含惴惴之聲翌日奉遷神座於白鷄山龕權施石戶封閇 文明大王聞之震悼恨不慗遺乃使駛吊以書曰故玉龍」
禪和尙片月遊空孤雲出岫乘桴西泛掬瑤東歸慈風吹萬里之邊禪月照九天之外者唯實吾師矣故追諡洞眞大師塔 號寶雲仍令國工攻石封層塚越二年門人等開龕覩形面如生」
乃號奉色身竪塔于白鷄山東之雲巖崗遵顧命也尒其霞岑屛擁雲㵎鏡淸誠毓慶之神區乃歸眞之秘宅彼入鷄足山待 慈氏者聯鑣並軏非我而誰大師出世奇姿本自天然以」
仁由已以德分人使禪子莘莘法孫濟濟心燈紹熖行葉傳芳厥有傳法大弟子泉通禪師等並執心器追攀眼訣乃相議曰吾輩確奉先志堅守遺言若不法碣銘勲禪碑勒石則無以爲」
先於是乎在尊祖其所由來遂抗表請幼婦之文辭紀先師之事業 制曰可豈悟號弓遽値勒石仍稽故乃門人等空悲鷄岫之韜光哀深擗地更記虎溪之潛影聲有聞天」
▨今上瓊蕚聯芳瑤圖襲慶聿修 祖業光啓先風常輸百行之誠益勵 三歸之志遂詔翰林學士臣金廷彦曰故玉龍大師身生有截心學無邊去傳 迦葉之玄宗來化靑丘之」
頽俗能以靜利利人世不言其所利大矣哉以爲將酬大士之恩立言不朽須在外孫之作垂裕無窮若宜以鴻筆書勳龜珉紀事示玄蹤於世世旌景行於生生臣汗流浹背拜稽首遂言」
曰臣載筆無能編苦有媿纂色絲而無能爲也分空縷而不亦難乎請筆路斯避 上曰仗義而行當仁不讓臣也玆晨 承詔實無賈勇之餘他日受辛空取效顰之誚斲憂傷手」
求甚剜身遂絆猿心强揺兎翰重宣其義而爲頌曰」
敎無非奧禪無非空道何心外佛卽身中煦之慧晷扇以眞風早認予 佛唯我禪公其一勝葉扶踈鉢花薩蕾休有道光不因詞彩佩印踈山傳燈碧海桃李不言稻麻斯在其二說不可說玄之」
又玄化人有赫弘道無邊 君臣際會士庶因緣洪名絶後懿躅光前其三濟世慈威寰區美利月墜禪庭山頽聖地虀臼屬辭芥城有備雖媿斯文直書其事其四顯德五年歲次敦䍧八月十五日立門生釋繼默鐫字」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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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 이지관 |
고려국(高麗國) 광주(光州) 희양현(晞陽縣)1 고(故) 백계산(白鷄山)2 옥룡사(玉龍寺)3 동진대사(洞眞大師) 보운탑비문(寶雲塔碑文)과 아울러 서문.
통직랑(通直郞)4 정위(正衛) 한림학사(翰林學士)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김정언(金廷彦)5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제자(門弟子) 사문(沙門) 신(臣) 석현가(釋玄可)6는 교지에 의하여 글씨를 쓰다.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법신(法身)은 동(動)과 적(寂)인 양면이 있고, 도체(道體)란 희(希)하고 이(夷)7하여 중생세계 중에 성인(聖人)을 보는 마음을 달아 놓고, 사바세계에 인(仁)을 구하는 생각을 걸어 놓았다. 대웅(大雄)8께서는 서축(西竺)에 태어나셨고, 그 진법(眞法)은 동방으로 전래하였다. 이로부터 강회승(康僧會)는 오(吳)나라에서 전법하고9, 마등대사(摩騰大師)는 한(漢)나라로 와서10 부처님11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선백(禪伯)의 깊은 종지(宗旨)를 연창하였다. 드디어 불법을 배우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선(禪)을 익히게 하여 세속을 구제하였으니, 보월(寶月)이 능가산 위에 떠오름에12 조용히 금인(金人)13을 생각하게 하였다. 현주(玄珠)를 적수(赤水) 중에 찾았음은14 오로지 망상(罔象)15에 의거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묵묵함을 말미암은 것이고, 다만 심중에만 있을 뿐이다. 목경(目鏡)을 찾으려고 서쪽으로 유학하여16 중묘(衆妙)를 터득하였고, 심주(心珠)를 갈고 닦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17 뭇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석문(釋門)18은 풍구(風丘)19에 높이 열렸고, 현도(玄道)20는 진역(震域)21에 크게 중흥하였다. 불(佛)이란 깨달았다는 뜻으로, 그를 스승 삼아 수행(修行)하는 것이니 대사(大師)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법휘는 경보(慶甫)요, 자(字)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구림(鳩林)22 출신이다. 아버지는 익량(益良)이니 관위는 알찬(閼粲)23이었다. 오산(鰲山)24이 내린 악령(岳靈)을 받아 광화(光華)25의 여경(餘慶)을 육성하였고, 계림에서 탄생하여 혁엽(奕葉)26으로 더욱 아름다움을 드날렸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니 품행은 풀잎에 나부끼는 맑은 바람과 같이 우아하고27, 마음은 꽃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과 같이 투명하였다.28 궁중에서는 왕의 수라상에 대한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29 궁 안에서 왕비를 도와 내화(內和)를 도모하였으며30, 이로부터 가문이 크게 창성하였다.31 함통(咸通) 9년32 상월(相月)33 재생명(哉生明)34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흰 쥐가 푸른 유리구슬 1개를 물고 와서 사람의 말을 하되 “이 물건은 희대의 진기한 보물이니, 바로 현문(玄門)의 상보(上寶)이다. 가슴에 품고 호념(護念)하면 반드시 빛나는 광명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신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맑게 하여 재계하다가 음력 4월 20일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한치의 땅도 없었으나35 초년(髫年)36에 이르러서부터 가산이 일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전생에 이미 법아(法牙)를 닦았고37, 승과(勝果)를 역수(逆修)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들과 노는 가운데 있으나, 오히려 동년(童年)의 위에 있었다. 나이 유학(幼學)의 시절이 되어서는 책을 메고 학당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있었으며38, 덕은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귀하였다. 이미 불교에 출가 수도하려는 뜻을 품고는 이친(二親)에 고하되 “세상의 진노(塵勞)를 여의고 출세간(出世間)인 불지(佛地)에 오르는 인연을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록 혜가(慧柯)39의 재질(才質)은 부족하나, 오직 불법의 동량이 되기를 기약하는 마음은 굳게 다짐하였다”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말없이 탄식하고 “기인(己仁)40을 이루고 물지(物智)41를 이룩하여 이미 내외(內外)의 도(道)에 합하였다”면서 “네가 출가하려는 뜻은 좋으나, 너와 헤어짐은 슬프고 또 슬픈 일이라”하자, 대사가 “뜻은 부모의 곁에 있으나, 마음의 약속은 부처님 앞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하늘도 따라 주는 것이거늘 내 어찌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서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울면서 허락하였다.42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43로 가서 삭발하고44,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45 선산(禪山)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빠른 걸음으로 행각(行脚)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밤 꿈에46 금선(金仙)47께서 이마를 만지며 귀를 잡고 방포(方袍)를 주면서 “너는 이 가사를 입어야 하니 그 까닭인 즉 앞으로 이를 몸에 두르고 수행(修行)하되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곳은 심학자(心學者)48의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 곧바로 떠나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하거늘 대사는 잠을 깬 다음, 깊이 생각하되 “이는 앞으로 내가 수도의 길을 떠날 조짐으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겠는가49”하고, 입산하는 행장을 꾸려 마치 새처럼 집을 나와 백계산(白鷄山)으로 나아가 도승화상(道乘和尙)50을 배알하고 간청하되 제자가 되어 보살도를 닦아 여래의 집에 들어가서 오묘한 진리를 보는 지혜의 눈51과 모든 사물(事物)의 근원을 아는 마음을 열도록 지도를 간청했다.52 이미 깨달은 것은 지혜(智慧)가 아니며, 그 불법(佛法)을 옹호할 수도 없으니, 오직 계율(戒律)이 아니면 비위(非違)를 막을 수 없다하여 열 여덟살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53에서 구족계를 받고는 인초(忍草)에서 싹이 돋고54, 또한 부낭(浮囊)55을 굳게 지니 듯하여 계향(戒香)의 향기로움을 더욱 퍼지게 하였고, 마음을 돌과 같이 견고히 하였다.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좌우(坐雨)56인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가57 다시 본사인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스님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도승대사가 이르되 “너의 뜻을 꺾을 수 없으며, 또한 자네의 굳은 의지를 막을 수가 없구나! 너는 나를 동가(東家)의 구(丘)58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에게는 그러한 지도 능력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다”하고59웃으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의 길을 떠나기를 허락하였다.60 그로부터 제방(諸方)으로 행각하되 배움에 있어 일정한 상사(常師)를 두지 아니하고, 성주사의 무염대사(無染大師)61, 굴산사의 범일대사(梵日大師)62 등을 차례로 친견하여 법문을 듣고 현기(玄機)를 깨닫고 생각하기를 ‘옥을 캐고 구슬을 탐색하듯 도(道)가 어찌 먼 곳에 있겠는가. 행하면 바로 그 곳에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63 임자년 봄에 훨훨 산을 나와64 바람처럼 바다를 건너65 중국으로 유학할 마음을 굳혔다.66 마침내 선장(船長)에게 간청하여 편승(便乘)을 허락받아 기꺼이 동행하게 되었다.67 주교(奏橋)68를 지나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운수(雲水)의 마음으로 도를 묻고 여기 저기 선지식을 찾았다. 무주(撫州)69의 소산(踈山)70으로 가서 광인화상(匡仁和尙)71을 친견하였다. 광인화상이 말하되72 “너는 큰 바다73의 용이 되고자 하는가”74 화상(和尙)이 현언(玄言)을 드날리면서 비설(秘說)을 묻고는 곧 승당(昇堂)하게 하여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바야흐로 목격도존(目擊道存)의 심인(心印)을 깨달아 이심전심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다.75 광인화상(匡仁和尙)은 크게 기꺼워하면서 “중국 법통이 해동으로 흘러간다는 설과 서학(西學)을 위하여 중국에 와서 유학하는 구도자 중에 가히 더불어 도(道)를 논할 만한 자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동인(東人) 중에 목어(目語)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76 하였다. 손을 잡아 법등(法燈)을 전하고 마음을 통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준 다음, “그대는 반조산(盤桃山)77 곁에서 불일(佛日)을 도와 다시 중흥하고, 해우(海隅)78의 국민을 잘 순화시키는 한편79 선법(禪法)으로 인도하여 다시 넓힐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훌륭한 큰스님은 반드시 찾아가서 친견하고80, 환경이 절묘한 성지(聖地)는 남김없이 참배하였다.81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화상(老善和尙)을 배알하고82 그의 법문을 들으며, 그의 수행담을 듣고자 하였다. 화상(和尙)이 묻되 “백운(白雲)이 행인(行人)의 길을 봉쇄하며 차단하였구나”83 대답하되 “스스로 청소(靑霄)인 공중 길이 있거늘, 백운(白雲)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화상은 대사의 변재가 민첩하여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답함을 보고84, 곧 인가하여 법을 전해주고는85 “남을 이롭게 할 자신이 생긴 연후에 떠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86 대사는 대붕새는 반드시 남명(南溟)에서 변하고, 학은 모름지기 동해(東海)87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화이(華夏)에서의 구법을 마치고 상진(桑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천우(天祐) 18년88 여름 전주 임피군(臨陂郡)89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못할 정도의 위험한 시기였다.90 그 당시 주존(州尊)91인 도통 태부견훤(太傅甄萱)92은 군대를 통솔하여 만민이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堰城)이었다.93 태부는 본시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으니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비록 일단은 대사를 체포하였다가 석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94 스님의 자안(慈顔)으로 접근하였으나, 존경하는 마음만 더욱 돈독해졌다.95 그리하여 찬탄하되 “우리 스님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지만 제자가 됨을 어찌 늦추겠는가”하면서 모시는 태도가 정성스러우며, 존경하는 마음 또한 돈독하여96 전주의 남쪽97 남복선원(南福禪院)98에 주석하도록 초청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새들도 장차 쉬고자하면 나무를 선택함이거늘, 난들 어찌 포과(匏瓜)99처럼 매달려서만 있으리요”라 했다. 그리고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갔다. 과연 그 곳은 편안히 수도할 수 있는 청재(淸齋)이며, 또한 조용히 참선하기에 알맞는 성지였다.100 구름은 계상(溪上)에 덮여 있고101, 돌을 베고 누워 흐르는 시냇물을 양치질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102 그러나 드디어 태부(太傅)의 초청을 받아 들여 그 곳으로 이주하기로 하였으니 실로 뗏목은 이미 귀당(歸塘)에 버렸고103, 구슬은 다시 구포(舊浦)로 되돌아 왔다고104 하겠다.
자비로 집을 삼아 중생을 교화하던 옛 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105, 지혜(智慧)의 횃불을 높이 들어 육도(六途)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을 구제하던 고승(高僧)들의 여휘(餘揮)를 계승하였다.106 이 때 절학자(絶學者)107들이 서로 경축하면서 말하되 “비록 년전에는 태산이 무너진 탄식이 있었고108, 오늘에는 대중들이 앙모할 대상이 없다는 슬픔이 없음을 기뻐하도다”라 하였다. 이제 존경하며109 따르는110 문도(門徒)가 번창하고 법문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111 대사는 24년 동안112 운수생활(雲水生活)을 하면서 후생(後生)을 지도하였으니, 마치 거울이 물상(物象)을 비추되 전혀 피로함이 없으며, 범종(梵鍾)이 언제나 치기만 하면 울리는 것과 같이 수문수답(隨問隨答)113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리 있고 정연하게 부상(扶桑)114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청태(淸泰) 3년115 가을에 이르러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116 몸에 갑옷을 입고117 손에는 한검(漢劍)을 잡아118 공손히119 천벌(天罰)120을 행하되 해우(海隅)를 괴롭히는 자는 모두 소탕하고121 삼한(三韓)을 협화(協和)하였으므로122 이에 사군(四郡)이 다시 태평한123 군자국124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깊이 신봉하였다. 대사께서 서토(西土)에 가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남산(南山)125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환구(寰區)126를 복되게 하였다. 이 때 태조께서 청풍(淸風)을 바라보고 백월(白月)을 첨앙하듯 숭앙(崇仰)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지검(芝檢)127을 보내 옥경(玉京)128으로 초빙하였다. 눈으로는 대사가 개경으로 왕림함을 보았고 귀로는 용이 변화129함을 들었다. 비록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의례(儀禮)이나 마치 부처님을 받드는 의전(儀典)과 같이 하였다. 대사는 달이 하늘을 지나가고 구름이 푸른 산 바위틈으로 돌아가듯 조금도 걸림이 없고 적적(寂寂)하게 보광(葆光)130을 세상 밖으로 비추었고, 현현(玄玄)하게 역중(域中)131에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른바 엄숙하게 위엄을 보이지 않으나 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져132 선도(善道)로 나아가고, 함께 복문(福門)133으로 출입하도록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조 임금이 승하하였다.134 마치 고기가 수조하(水藻下)에 편안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135 나라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탄식하였고136, 함지(咸池)137에는 일잠(日蘸)의 빛도 없는 듯하다.138 의공대왕139이 즉위하여 부왕(父王)의 유풍을 받들고140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을 미미(亹亹)141하며 법력을 빌어 자자(孜孜)142하다가 문득 세상을 버리고 이미 천상(天上)으로 돌아가셨다. 이어 문명대왕143이 왕위144에 올라145 중광(重光)으로 꽃을 엮어146 천축의 교풍(敎風)인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 거울을 잡아서는 해방(海邦)의 풍속을 비추어 순화시켰다.147 왕은 봉필(鳳筆)148을 보내 스님을 왕궁으로 초빙하였고 중헌(衆軒)으로 내려와 친견하였다.149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용집(龍集)150 협흡(協洽)151 4월 28일에 대사께서 열반에 들고자하여 목욕한 다음, 대중을 방 앞에 모아놓고 유훈하되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대중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진속(塵俗)에는 귀천이 있으나 공문(空門)152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니, 수월(水月)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153 연하(煙霞)와 같이 고상하게 살도록 하라.154
옷은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지 말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 하지 말며, 마땅히 고사리 등 풀뿌리를 캐어 식량을 삼고155 선열(禪悅)로써 포식을 삼을 것이니156, 이렇게 하여야 나의 제자이며 또한 나의 원에 적합할 것이요. 그 밖에 나의 도(道)에 무슨 별다른 관행(觀行)이 따로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가 죽거든 탑으로써 나의 유체(遺體)를 간직하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의 현복(玄福)을 짓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57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房)에 들어가 승상에 기대어 가부좌를 맺고 앉아 엄연(儼然)하게 옥룡사상원(玉龍寺上院)에서 입적하였다.
슬프도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나이는158 80세요, 보살계를 받은 지는159 62하(夏)였다. 이날 아침 현무산(玄武山) 산정160에 4~5명의 젖먹이 어린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161 들렸다. 태양은 향정(香庭)에 처참하게 비추고 바람은 보찰(寶刹)을 슬프게 하며, 송백나무 또한 슬픈 빛을 띠었고, 인령(人靈)은 떨면서 두려워하는 소리를 내었다.162 다음 날 영구를 백계산으로 옮겨 모시고 돌로 감실(龕室)163을 만들어 시신을 그 안에 모셔 봉폐(封閇)164하였다. 문명대왕(文明大王)165이 부음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하여 미리 살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弔書)를 보냈다. “고옥룡선화상(故玉龍禪和尙)은 조각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고고하고, 고운(孤雲)이 한가롭게 날아가는 것과도 같이 조용하셨다.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보배로운 불교를 배우고166 동국(東國)으로 돌아와 그 법을 전파하니167 자비스러운 바람은 만리의 변방까지 불었고, 선정(禪定)의 밝은 달은 구천(九天)의 밖에까지 비추었다. 이와 같은 분은 오직 우리 통진대사 뿐이시다” 그러므로 시호를 동진대사(洞眞大師), 탑호는 보운(寶雲)이라 추증하고, 국공(國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탑을168 세우도록 하였다. 시공한 지 2년 후169 문도들이 감실을 열고 신구(神軀)를 보니 얼굴이 생전과 같아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울면서 색신(色身)을 옮겨 백계산 동쪽 구름 덮인 바위 위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170 주위의 환경은 노을이 덮인 뫼가 병풍처럼 청룡과 백호로 둘러 있고, 구름이 자욱이 덮인 시냇물은 마치 거울과 같이 맑다. 진실로 위인을 길러내는 신구(神區)171이며, 진리를 세계로 돌아가는 비택(秘宅)이 될 만하였다. 대사는 계족산172에 들어가 멸진정에 입정(入定)하여 자씨(慈氏)인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과 같으니 스님의 추모사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다시 누가 하겠는가”라 하였다.173 대사의 신기한 자태는 선천적으로 자연스러웠다.174 인행(仁行)은 스스로 실천하고, 덕행(德行)은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문하에 선객(禪客)은 신신(莘莘)175하고 법손(法孫)은 제제(濟濟)하였다. 심등(心燈)은 계속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였고, 행동은 아름다움을 전하였다. 전법제자인 큰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통선사(泉通禪師) 등이다. 그들은 아픈 마음을 쥐어 잡고176, 열반 직전에 보았던 스님의 얼굴을 추모하면서 서로 의논하되177, 우리가 선사(先師)의 유언만을 고수하고178 그를 지키기 위해 만약 비석을 세워 훈적(勳跡)을 새겨 두지 않으면179 선사(先師)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여겨 비를 세우기로 하고, “존조(尊祖)하는 일로써 대사의 행장을 모아 왕에게 표장(表狀)을 올려 유부(幼婦)의 문장(文章)180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 명하여 선사(先師)의 업적을 기록하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니181 어찌 호곡하면서 슬퍼만 하랴”182 하고, 급히 비석을 세우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스님을 추억하니 문인(門人)들은 스님께서 백계산 기슭에 자취를 감추어183 다시 친견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하다가184, 다시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 있는 호계(虎溪)에 자취를 감추었던 일을 기억하였다.185 이러한 소문이 낱낱이 임금에까지 들렸다. 곧 우리 상(上)이신 정종임금께서는186 경악(瓊蕚)187을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경사스럽게 요도(瑤圖)188를 승습하여 조업(祖業)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선조(先祖)의 가풍을 빛나게 하고 항상 백행(百行)189의 근본인 효도의 정성을 다하는 한편,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 더욱 돈독히 하신 분이었다.190
드디어 한림학사인 신(臣) 김정언(金廷彦) 저에게 명령하시되 “고옥룡대사(故玉龍大師)는 몸을 가짐에 있어서는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191, 심학(心學)192의 도(道)는 그 끝이 없었다. 중국에 가서는 가섭(迦葉)의 현종(玄宗)인 선법을 전해 왔고193, 청구(靑丘)인 본국에 돌아와서는 퇴폐한 풍속을 순화하였으니, 능히 정리(靜利)194로써 인세(人世)를 이익하게 하였으므로 국민들에게 끼친 그 공적은 막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195 이와 같은 대사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모름지기 외손제구(外孫虀臼)의 비문을 지어196 그 위업이 무궁토록 전하려 하니 자네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으로197 대사의 공훈을 적어 비석에 새겨서198 현종(玄蹤)을 세세(世世)에 전해 보이며, 빛나는 행적199을 생생(生生)에 드러내도록 하라”하시었다. 신(臣)이 폐하의 명을 들으니 땀이 흐르고 뼈에 사무쳤다.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신(臣)은 붓을 잡을200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201 절묘(絶妙)한 문장으로 비문을 짓는 일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202 마치 공중에 드리워 진실을 분간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오니203, 청컨대 하명(下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였다.204 상(上)이 이르되 “대저 사람은 의(義)를 의지하여 행할 것이며, 인(仁)을 당하여는 사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신(臣)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을 받아들였으나,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끼쳐 줄 만한 여력이 없다.205 후일 이 비문206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빈축이나, 비방함을 초래할 것이207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마치 서투른 목수(木手)가 손을 다칠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208 그러나 주상의 강하신 명령이 몸을 베어 내는 것과 같았기에209 드디어 떨리고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210, 억지로 붓을 잡게 되었다.211 이상 비문의 뜻을 거듭 선양하려고 게송으로 읊는다.
불타(佛陀)의 교리는 심오하고도 미묘하며
달마의 선지(禪旨)는 공(空)하지 않음이 없네!
도(道)가 어찌 우리들의 마음밖에 있으랴!
부처란 본시 중생의 심중에 있다네.
지혜의 햇빛은 모든 중생 비춰주고212
진리의 강한 바람 무명(無明)을 흩어준다.
일찍이 내가 부처임을 깨달은 이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우리 스님뿐이라네! (其一::TEXT)
높고 넓은 스님의 덕은 풀잎과 같고213
마치 우담발화의 꽃봉오리와 같아214
깊고도 아름다운 스님의 지혜광명215
글로나 말로선216 표현할 길이 전혀 없다.
무주(撫州)의 소산(疏山)217에서 광인(匡仁)의 법218 이어받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해동으로 전해 와서
그 덕망 앙모하여 사방(四方)에서 모여들어219
문 앞에는 삼대처럼 긴 열이 섰도다.220 (其二)
스님의 도덕을 말로는 설(說)할 수 없어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하여 비할 데 없다.
사람을 교화(敎化)함은 태양처럼 혁혁하고,
불도(佛道)를 홍포(弘布)함은 허공같이 끝이 없네.
때때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만나서
지극한 마음으로 설법을 경청하였네!
더 높은 그 명성을 견줄 사람 전혀 없고
위대하신 그 업적 앞에서 비추고 있네! (其三)
자비와 위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드넓은 이 세상에 이타행(利他行) 쉬지 않았네!
열반에 드시니 달은 선정(禪庭)에 떨어졌고,
치솟은 산봉오리 성지(聖地)를 무너뜨렸네!
화려한 문장(文章)으로 비문을 지었으니221
개성(芥城)222 이 끝나더라도 이 비는 남아 있어,
비록 내가 지은 비문 부끄럽긴 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사실만 직필(直筆)하였을 뿐. (其四)
현덕(顯德) 5년223 세차(歲次) 돈양(敦䍧)224 8월 15일 세우고,
문생(門生) 석계묵(釋繼黙)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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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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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 1831 | 劉喜海, 1831, 『海東金石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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