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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 왕사(王師) 진공지탑(眞空之塔).
… 신(臣) 최광윤(崔光胤)
3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당태종(唐太宗)이 짓고 왕희지(王羲之)가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중에서 집자(集字)
4하여 새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은 미언(微言)으로 교를 세워 비로소 취령(鷲嶺)에서 말씀을 열었으며, 가섭은 묘지(妙旨)로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
5에 들어갔다. 비록 말로는 교리(敎理) 밖에 별도(別途)로 전하였다고는 하나,
6 그윽이 생각건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함께 품수(禀受)하였다. 경희(慶喜)
7는 가섭의 제자가 되었고, 상나화수(商那和修)
8가 아난(阿難)의 법을 전해 받아 제3조(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제12조(祖)인 마명(馬鳴)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면서 묘법(妙法)을 삼승(三乘)에 드리웠고, 제14조(祖)인 용수(龍樹)는 꽃다운 향기를 드날리면서 … 보았다. 그가 주창한 법(法)은 즉상(卽相)이나 이상(離相)이며, 몸이 아니나 곧 몸인 것이다.
강급(降及)… 처음으로 원각대사(圓覺大師)
9가 중국의 양조(梁朝) 때 들어왔고, 비로소 대홍(大弘)
10을 만났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난 다음, 북쪽 위(魏)나라로 가서 효명제(孝明帝)를 만났다. 그리하여 대조(大祖)인 혜가(慧可)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계합(契合)하여 동풍(同風)을 부촉하였다. 그로부터 조법(祖法)을 상승(相承)하되 심등(心燈)을 계승하여 대대로 이어져 단절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달마가 선종을 창립[一花欻現]
11한 이후로 육엽(六葉)
12이 무성하였다. 근래 도일[江西 : 馬祖道一]로부터 해동 신라[海裔]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라서 봉림가(鳳林家)의 제자요,
13 장경(章敬)의 증손
14인 우리의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다시 선종을 천양하였다. 대사의 법휘는 충담(忠湛)이요, 속성은 김씨며, 그의 선조(先祖)는 계림(鷄林)의 관족(冠族)
15이고, 토군(兎郡)
16의 종지(宗枝)
17로서 분파(分派)되어 영광을 누렸으며, 상진(桑津)에 의해 별파(別派)로 갈라졌다.
18 원조(遠祖)는 … 벼슬에 얽매어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았고, 가후(賈詡::TEXT)
19와 같은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녹위(祿位)를 귀함이겠는가.
20 그러므로 고반(考盤)
21과 같이 도(道)를 즐겼다.
22 일찍부터 『장자(莊子)』와 『열자(列子)』 등의의 서적을 전공하였고,
23 초야에 살면서 은사(隱士)를 불러 같이 노래를 읊으며 시정(市井)과 조정(朝廷)
24의 명예를 피하였다. … 어진 아들이니 어찌 어머니[聖善]
25의 마음을 닦음이 없었으랴!
26 이러한 영기(靈寄)로운 태몽을 감득하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희망하던 중
27 함통(咸通)
28 1월 1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특수한 모습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농담은 전혀 하지 않았다. … 초인적(超人的)인 영특한 성품(性品)을 가졌으며 신비한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괴시(槐市)
29에서 경을 배웠고, 행원(杏園)
30에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부모가 관상 보는 사람을 불러 관상을 보였더니
31 “12세[甘羅] 입사(入仕)하는 나이에
32 이르면 이름을 떨침이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20세[賈誼]되던 나이에
33 …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34 대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35 이를 불쌍히 여긴 장순선사(長純禪師)
36가 절로 데리고 가서 상좌를 삼아 득도(得度)시켜 사미계를 받게 하였다. 이전부터 장순처사는 대사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
대사(大師)는 장순장로(長純長老)를 따라 거처를 얻어 … 속진(俗塵)을 여의고 공문(空門)
37에 들어가 바야흐로 승위(僧位)에 올라 부지런히 정진 수도하여 승당도오(昇堂覩奧)하므로 입실건당(入室建幢)하게 하여 전법제자를 삼았으니, 이심전심한 사자(師資)의 정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돈독하였다.
38 빠른 걸음으로 거침없이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였으며, 깨달음의 지파(枝派)가 계속 이어지면서 먼저 시작하여 늦게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지내면서
39 … 우유(優遊)하였다.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를 거듭 중흥하여 마침내 계계승승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능가(楞伽)인 선종이 재흥(再興)할 기회를 엿보면서 발원하여 오다가
40 용기 원년(龍紀 元年)
41에 무주(武州)
42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법상종(法相宗)
43과 율장(律藏)
44을 연구하였다.
… 종지(宗旨)를 들어 도(道)를 토론하면서 학인(學人)들에게 이르되, “처마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면 능히 돌을 뚫으며,
45 두 사람의 마음이 굳게 합쳐지면 능히 쇠도 끊을 수 있다”라 하였다.
46 이와 같이 불을 붙이려고 나무와 나무끼리 마찰하는 것과 같이
47 계속적인 노력과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달통(達通)을 얻게 된 그 원인은 모두 적미(積微)와 같은 작은 일도 쉬지 아니하며, 비록 반걸음[跬步]이라도 계속 전진(前進)한 탓으로 마침내 학해(學海)의 공을 이룩하고, 길이 빛나는 … 성취하였다. 불제자[釋子]인 천일(天日)
48선사가 당시 전후 현실인 흉년과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산야(山野) 곳곳에 말라 흩어진 폭골(曝骨)
49과 아직 썩지 아니한 시신이 낭자한
50 광경을 보고 생각하되 “다른 산중(山中)들은 조용한 곳이 많으니 어찌 피난할 곳이 없겠는가. 이곳은 위험한 곳이므로 오랫동안 거주(居住)할 생각을 끊었다.” … 배를 타고 가서
51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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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그 길로 곧바로 운개사(雲蓋寺)
53를 찾아가서 부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大師)는 구름 덮인 산골에 살면서 석상(石霜)
54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학인을 지도하고 있었다. … 대사가 멀리 떨어져 … 도남(圖南)
55의 웅지를 품고, 분지를 발하여 구름을 덮을 수 있는 날개를 펼치며
56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는 서원이 날로 향상하여 불일(拂日)하는 예장나무 가지
57처럼 높이 흔들 것을 알았다.
58 어느 날 대사가 이르되 “네가 이곳에 와서 유학(遊學)하되 마치 천우교목(遷于喬木)
59과 같이 다시 정진할 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곳인 보소(寶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 그 후 하동(河東)으로 가서 자악선원(紫嶽禪院)
60에 입방하여 처음부터 성전(聖典)을 연구하고 다시 우혈(禹穴)
61지방을 탐방하고, 그로부터 영적(靈跡)을 답사하는 행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연대(燕臺)
62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천우(天祐) 15년
63 6월에 …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 학인(學人)들이 함께 와서 친견하고 환희에 가득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뼉을 치면서 앙모하였다.
64 그리하여 수개월 동안 선(禪)을 논하고 수년간 법문을 물어 왔다.
65 마치 도안법사[彌天]
66가 입을 벌리고 이왈(離曰)
67이 입술을 놀리는 것과 같아서
68 어로(語路)의 발단을 헤아리며, 언어(言語)의 단서를 잘 짐작하였다. 이 때 양지(兩地)에서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
전쟁의 기미가 나타남을 걱정하다가 홀연히 김해를 떠나 개경[玉京]
69을 향해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치 가장 아름다운 금[摩勒]
70이 다시 퍼진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우담바라
71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았다. 태조는 공손히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모시고 … 모든 중신과 궁내인(宮內人)들이 법문을 청함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앉아 상왕(象王)
72의 설(說)을 토(吐)하니, 거듭 경의를 표하며,
73 제자(弟子)의 예의를 펴고, 들은 법어(法語)를 낱낱이 기록한 다음,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 청정한 정려(精廬)
74로 옮겨 모셨다. … 어느 날 다시 단겸(丹慊)
75을 떠나 경기(京畿)
76에 도착하였으므로 왕은 별도로 옥당(玉堂)을 꾸며서 승탑(繩榻)
77에 오르시게 하고 대사(大師)에게 묻되, “과인(寡人)이 어려서부터 위무(威武)는 숭상하였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알지 못함이니, 어찌 … 존망(存亡)의 뜻을 …를 분별하겠습니까? 기쁘게 여기는 바는 명제(明帝)가 꿈을 꾸고 노력한 것
78과 같이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니,
79 이것은 마치 한(漢)나라 명제(明帝)인 세종(世宗)이 마등과 법란을 만남과,
80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보지공(寶誌公)을 만난 것도
81 이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향화(香火)의 인연
82을 맺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길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신심(信心)을 표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흥법선원(興法禪院)
83을 중건하고 스님을 여기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길상지(吉祥地)가 오히려 지난날의 미덕(美德)을 논하게 되니, 복을 맞이하는 명당(明堂)
84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이곳을 세상을 마치려는 종신지지(終身之地)
85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선원을 크게 확장한
86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진취됨이 마치 안개와 같았다. 옛 계율을 따르자 … 모두가 불법 중흥주라는 말하였다. 직접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절에 가도 거절되고 더불어 말조차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의 유숙도 허락받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대사(大師)가 평소에 이러한 편벽된 생각이 있었겠는가. 덕의 부유(富有)함은 … 좌품(座品)의 … 과 달랐다.
천복(天福) 5년(태조 23, 940)
87 7월 18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이르되 “만법(萬法)
88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하고, 적연(寂然)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얼굴빛은 생전(生前)과 다름이 없었다. 세속 나이는 72세요, 승랍은 … 이었다. 땅은 진동하고 산은 무너지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해는 처참하였다. … 그리하여 산곡(山谷)에는 애도와 슬픔이 가득하였고,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천인(天人)들은 모두 절학(絶學)의 슬픔을 더하였으니, 어찌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지 아니하랴! 제방(諸方)의 사서(士庶)들은 모두 스님의 열반에 대해 울면서 통곡하였다. 따라서 과인(寡人)도 갑자기 열반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간절히 스님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마지못했다. 특히 종림(宗林)의 선백(禪伯)이고, 말세(末世)의 고황(古皇)으로 …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시고 뭇 중생의 우러름을 어겼도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89 그 진실인 법체(法體)는 길이 남아 있다.
90 그러므로 먼저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고,
91 뒤에는 숲이 없어지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슬퍼하도다.
92 바라는 바는 조속히 명체(明禮)를 갖추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하고,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 탑호를 … 지탑(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대사(大師)는 설산(雪山)에서 성도하고,
93 연동(煙洞)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94 18대(代)의 조종(祖宗)을 전하였고,
95 3천년의 선교(禪敎)를 통괄하였으니,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범하게 교화한 공적
96을 열거한다면 비록 지구[黃輿]라고는 하나, … 모든 향기는 사라지고, 문득 호접(胡蝶)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니,
97 수(水) … 망기(忘機) … 생전(生前)에 스님과 과인(寡人)은 마치 갈매기[狎鷗]
98처럼 친했던 감회를 일으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화(敎化)와 도덕이 무한(無限)함을 나타내고자 하니,
99 참으로 인도[身毒]
100의 풍속을 드날리고, 축건(竺乾)의 법을 부연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도 제자 5백여 명이 … 높고 푸른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고, 넓은 발해 바다가 … 전답(田畓)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나에게 진정(陳情)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碑文)
101을 주청하였다. 이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마침내 나는 윤허(允許)를 받았으니,
102 바라는 바는 스님의 무위덕화(無爲德化)
103를 나타내어 마치 물과 구름처럼 영원(永遠)히 썩지 않게 하려고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다. 애통한 마음으로 가능한 데로 제구(虀臼)
104를 지어 문인(門人)을 위로하고, 민(閔) … 지심(之心). 아름다움을 백대(栢臺)
105로 돌리고, 국사(國士)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명(銘)을 짓는다.
… 옷소매를 모은 현명한 신하, 치마를 여민 …
… 보배를 감추고 법인을 알았네.
자비의 그 배는 풍랑(風浪)에 빠졌고
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었네.
은빛 난 석등(石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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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영원히 비추리.
【陰記】
영봉산(靈鳳山) 고국사(故王師) 진공대사탑음(眞空大師碑陰)대개 듣건대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107 마침내 그물을 여는 것과 같은 인정(仁政)을 베풀었고,
108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 서축(西竺)에서 발상한 불교
109가 중국에 전래(傳來)된 이후, 유일(唯一)한 호법왕(護法王)일 뿐만 아니라 보지공(寶誌公)스님을 친견하고 마주 앉아 동방(東方)의 풍속을 이야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가 널리 홍포되기 시작하였다. 위(魏)나라 손권(孫權)은 조신(朝臣)들을 모아 거마(車馬)로써 강승회(康僧會)스님을 맞아들여
110 존경하여 왕과 함께 동울(東菀)에서 놀았으며, 또한 같은 여(輿)를 타고 함께 다니기도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도 삼한(三韓)이 각립(角立)하여 아직 누가 승리할 것인지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없었으나, 이젠 고려 일국(一國)이 웅비(雄飛)
111하여 문득 전쟁의 우열을 가렸고, 멀리에서 성덕(聖德)을 입고, 널리 … 대사(大師)께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112 정기가 사유(四乳)와 같고,
113 눈에는 두개의 눈동자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찰(梨察)은 원황(元皇)의 자리에 있었음이 마치 불도징(佛圖澄)이 후조의 고조인 석륵(石勒)의 귀의를 받음과 같다 하겠다.
114 그러나 오히려 … 스님들은 시정(市井)에 내주(來往)하기를 싫어하고, 뜻이 산가(山家)의 울창한 숲 속에서 수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은 곧 해국(海國)
115의 고요한 곳에 주(住)하게 되었으니, 질질(秩秩)
116한 군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를 희망하였다. 련기(憐其) … 대사께서는 이제 낙토(樂土)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자 커다란 일축의 글을 구중(九重)의 궁궐
117로 보내왔다. 과인(寡人)이 대사와 더불어 정(情)의 깊음이 아교와 칠보다 더하였고,
118 의리는 … 동국을 불국화(佛國化)하려는 서원이었다. 흥법선원이 비록 고사(古寺)이긴 하나, 오히려 동방(東方)에 있어서 화상(和尙)의 생전(生前)에 길이 중생을 교화할 곳을 삼았던 절이다.
119
대사의 재가제자(在家弟子) … (以下는 『金石苑』에 의함).주반(州官)통현상좌(通玄上座)낭중(郞中)
120:민회타(旻會朵)
121 광휴장로(廣休長老) 김순타(金舜朶)
시랑(侍郞)
122:흥림타(興林㭐)
123 혜태장로(惠泰長老) 수영타(秀英㭐)
상타(上㭐) 신희타(信希㭐)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