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락) 상주국(上柱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撰)하고, (결락) 병부대감(兵部大監) 상주국(上柱國)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이환추(李桓樞)
1는 교서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결락) 그러나 니원(泥洹)이 너무 빠르고, 용화(龍華)
2는 널리 인천(人天)을 주도하겠지만
3, 그 출세(出世)가 너무 늦은 것이 못내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4. 우리나라에서 천축(天竺)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고
5, 설산(雪山)은 더욱 멀며 또한 험로(險路)이다
6. 그러므로 불교(佛敎)가 인도에서 발상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7, 가담(伽譚)
8이 동토(東土)로 전래되지 못하였다. 옛날 성왕(聖王)
9이 있어 중국이 불교전래에 대한 참기(讖記)
10를 적어 남교사(南郊祀) 곁에 묻어 두었는데, 명제(明帝)
11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임금의 몽징(夢徵)과 부합되었다
12. 그리하여 상사(上士)
13가 자취를 이어 (결락) 진단(震旦)으로 와서 불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기존의 세력인 도교(道敎)로부터 반발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평(永平) 10년(67) 도교의 지도자와 불교(佛敎)의 고승간에 법력(法力)의 대결이 있게 되었는데, 마침내 도교(道敎)의 패배로 돌아가자
14, 도교인(道敎人)들은 변수(邊陲)로 도망가거나 또는 자살하였다
15.
이로써 점차 현정(玄情)
16을 밝혀 불교에로 눈을 돌려 법안(法眼)을 엿보게 되었다. 이 때 응진보살(應眞菩薩)인 원각대사가 있었으니
17, 그는 불교의 전파를 위해 중국에 와서 양무제(梁武帝)와 대담하였으나 의기(意氣)가 맞지 아니하여 다시 위(魏)나라로 가서 효무제 임금을 만나 대화하였다. 역시 투합(投合)되지 못하여 결국 숭산(崇山)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간 면벽하다가 천재(天才)인 신광(神光) 혜가(惠可)를 만나 비로소 의기(意氣)가 상투(相投)하였으니,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의 단심(丹心)으로 말미암아 『능가경(楞伽經)』
18과 아울러 정법안장(正法眼藏)인 전심지요(傳心之要)를 전해 주게 되었다. (결락) 그 후로 선종이 크게 진작되고
19 널리 전파되었다. 그로부터 6대(代)
20로 전승하면서 각기 종(宗)을 개천(開闡)하여 거듭 정윤(正胤)
21의 법통을 빛나게 하였다. 따라서 지(枝)와 간(幹)
22이 서로 의지하여 울창하며 영(英)과 화(華)
23가 공발(共發)하여 더욱 향기로웠다
24.
남악(南岳)
25에 이르러 법(法)을 강서(江西)
26에게 전하였고, 그의 방출(傍出)
27인 법손도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결락)
대사의 휘(諱)는 ▨운(▨運)이요
28, 속성은 김씨이니, 계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성한(聖韓)
29에서 강등하여 나물(𨚗勿)
30에서 일어났고, 근본에서 지말(枝末)까지 약 백세(百世)동안 가유(嘉猷)
31를 끼쳤다. 대부(大父)
32는 산극(珊&A3122;)이니, 관직이 본국(本國)의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으며, 아버지는 확종(確宗)으로 여러 번 벼슬하여 본국(本國)의 사병원외(司兵員外)에 이르러 함께 조상의 덕을 선양하면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였다. 어머니는 설씨(薛氏)니, 일찍 (결락) 을 꾸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발원하여
33 그윽이 주미(麈尾)
34를 엿보고 곧 특별한 상서를 얻어서, 드디어 대중(大中) 9년
35 4월 18일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자(聖姿)
36를 지녔고, 어렸을 적에도 전혀 장난을 하지 아니하였다
37. 8살
38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도하면서
39 누구를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하고 슬피 피눈물을 흘렸으며, 능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항상 염장(塩醬)
40을 먹지 아니하였다.
지학지시(志學之時)
41에 이르러 학당으로 책을 끼고 가서 책을 청익(請益)
42함에 있어서는 (결락)
43 천재(天才)로써 다섯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되,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감라입사지년(甘羅入仕之年)
44에 이미 그 명성이 고향에 널리 퍼졌고, 왕자 진(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던 나이
45에는 서울
46까지 명성
47을 떨쳤으니, 어찌 불법에 대한 깊은 숙연(宿緣)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세속을 싫어하여
48 성선(聖善)
49에게 입산 출가할 것을 허락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요구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간절한 정성을 끝내 막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더욱 그 뜻을 굳혔으며, 어머니는 어릴 때 학업을 중단하는 것은
50 마치 단기(斷機)
51와 같다고 설득하였으나 처음 마음먹었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마침내 출진부급(出塵負笈)
52의 길을 떠나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구도의 길을 떠났다
53.그 후로 가야산(迦耶山)
54으로 가서 많은 스님들을 친견한 후, 선융화상(善融和尙)
55에게 예배를 드리고 은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득도하게 되었다
56. 그 후 함통(咸通) 15년
57에 이르러 가야산 수도원(修道院)에서 구족계(具足戒)
58를 받았다. 이어 (결락) 산에서 수하(守夏)
59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니 어찌 만유(滿油)
60의 바리때를 넘치게 했으리요. 뿐만 아니라 부해지낭(浮海之囊)
61도 망가뜨리지 않았으니 그윽이 사의(四依)
62를 앙모하고 경률론 삼장(三藏)의 연구를 발원하였다. 학업을 청할 때에는 침식을 전폐하였고, 책을 펴 놓고 토구(討究)함에는 그 깊고 얕은 천심(淺深)
63의 교리를 철저히 파헤쳤다. 어느 날 선융화상이 이르되 “노승(老僧)이 대중을 떠나 고요히 지낼 곳을 찾으려 한다면서 교소유폐(敎所由廢)
64, 즉 교화하는 일을 그만두고 은둔하겠다는 이유를 말하면서, 수행력이 부족하여 더 이상 지도할 힘도 용기도 없다는 오무여용(吾無餘勇)
65을 주장하면서 너희들을 사방(四方)으로 팔아 넘겨야겠다”하며 “가가여조(可賈汝曹)하리라”하므로 대중들은 갑자기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섭섭함에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득이 암혈(岩穴)을 하직하고 행각의 길을 떠났다. 우연히 어떤 선려(禪廬)의 유지에 이르러 잠깐 비개(飛盖)
66를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전에 어떤 선납(禪衲)이 안거(安居)하던 곳이었다. 안개가 걷힌 후 사방(四方)을 살펴보니 완연(宛然)히 옛날 자신이 살던 곳과 같았기에 자세한 행지(行止)
67를 듣고 깊이 종용(從容)한 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얼마 동안 주석(住錫)하다가 다시 행선지를 운금(雲岑)으로 정하였으니, 곧 설악산(雪岳山::TEXT)이다. “동해 곁에 있는데 선조인 (결락) 대사가
68 적수(赤水)에서 탐주(探珠)
69하다가 서당(西堂)
70의 법인을 전해 받고 청구(靑丘)인 신라로 돌아와서 해동(海東)에 선을 전래하고 초조(初祖)가 되었으니, 그는 후생(後生)을 위하는 뜻으로 선철(先哲)
71의 당부를 깊이 간직하였다.”
그 후 엄명(嚴命)
72을 받들고 진전사(陳田寺)
73에 도착하니, 기꺼운 바는 직접 도의국사의 유허(遺墟)를 답사하며 그 영탑에 예배하고 스님의 진영(眞影)을 추모하여 영원히 제자의 의식을 편 것이니, 마치 니보(尼父)
74가 (결락) 을 스승삼은 것과 같이 인(仁)과 덕(德)을 흠모하며, 맹가(孟軻)
75가 안자(顔子)
76를 희기(希冀)한 것처럼 의(義)를 소중히 여기고 마음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진리가 있으면 능히 알아서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한 동안 도수(道樹)
77에 서지(栖遲)
78하고 선림(禪林)
79에 기거하였다. 도의(道義)보다 먼저 향승(鄕僧)인 항수선사(恒秀禪師)
80가 일찍이 해서(海西)
81에 도달하여 강표(江表)
82 지방으로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묻기를 “서당의 법이 만약 동이(東夷)
83로 흘러간다면 어떤 아름다운 징조가 있는지
84 그 묘참(妙讖)
85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지장(智藏)이 대답하되 “불교의 교의가 쑥대밭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찾아내고(道) 불은 봉애(蓬艾)
86의 꽃봉오리
87에서 왕성하게 불타니(義)
88 청구(靑丘)의 도의선사가 그 기운을 이어 받아
89 선법(禪法)을 전파하리니, 그로부터 만총(萬叢)이 스스로 화창(和暢)하리라
90”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도의국사가 동국에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전파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 성문(聖文)
91을 추인(追認)하였으니, 이는 도의스님의 호를 나타낸 것이다
92. 그로부터 백년 후에 이 사구(四句)가 널리 전하였으니, 마치 우객(羽客)
93이 서로 만남으로써 단구(丹丘)
94의 자(字)를 알게 된 것과 같았다. (결락) 일도(一到)하면 홀연히 백일지명(白日之銘)
95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락) 병(甁)을 휴대하고 삼춘(三春)에 육환장을 짚고 은거(隱居)할 곳을 중현(重玄)의 언덕에서 찾았고 심오(深奧)함을 중묘지중(衆妙之中)에서 탐색하였다. 남쪽으로 옥경(玉京)
96에 이르러 의문지망(倚門之望)
97을 위로하고, 서쪽으로 김해(金海)를 찾아가서 초은(招隱)
98의 거처를 중수하여 회상(會上)을 설치하니 찾아드는 학인이 구름과 같이 운집(雲集)하였고 받아들인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그는 (결락) 유가(瑜伽)의 의룡(義龍)과 (결락) 두 영납(英衲)인 대덕(大德)으로부터 지난날의 도풍(道風)을 듣고,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고는, 간절히 서심(栖心)
99할 마음을 쌓아서 함께 북면(北面)
100의 정성을 펴게 되었다
101. 이 때 높이 하늘 끝을 우러러보고 멀리는 지구의 밖을 보았다. 王의 기운이 바로 술해(戌亥)
102에서 충천하고, 패도(覇圖)
103가 널리 동남(東南)에 떨쳤으니, 여광(呂光)
104 (결락)을 보지 못하였으나, 征 (결락) 초헌을 관사(官舍)
105에 머무르고 왕능(王能)인 장좌승(長佐承)으로 하여금 사사공양(四事供養)
106을 올리되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였다. 드디어 잠깐 위급한 상황을 뒤로 제쳐놓고
107 대중 스님을 시봉함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국부(國父)
108로 여기는 최선필(崔善弼) 대장(大將)은 금탕(金湯)
109과 같은 법성(法城)
110이요, 돌기둥과 같이 견고한 자실(慈室)이었는데 경치가 좋은 영경(靈境)으로 초빙하여 주석하게 하였다. 스님은 여기서 몇 해를 지낸 후 무더운 (결락) 달빛은 유영(柳營)
111을 밝게 비추었으니, 그 향기가 전단향(栴檀香)
112 나무를 뒤집었고, 구름이 난폐(蘭陛)
113에 일어나 그 향기로움이 첨복향의 향기를
114 가득하게 하였다. (결락) 대사는 멀리 남방(南方)으로부터 북쪽으로 와서 소백산사(小伯山寺)를 중수하고 스님을 청하여 그 절에 안거(安居)하게 하였다. 급히 자니(紫泥)
115를 받들어 그윽이 왕의 소박한 간청에 응하여
116 욱금(郁錦)
117으로 옮겨 갔으니 비로소 금회(襟懷)
118에 부합되었다. 연비(蓮扉)
119를 열자마자 대중이 도마(稻麻)처럼 열을 이었고, 모사(茅舍)를 널리 확장하니 (결락) 오랑캐의 세력들이
120 바야흐로 성가(聖駕)
121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장차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정성을 펴고자 하여 잠시 난여(鑾輿)
122를 멈추고 공손히 이굴(理窟)
123로 나아갔으니, 마치 황제(黃帝)가 공동산(崆峒山)에 가서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물은 것과 같으며
124 또한 한만지유(汗漫之遊)
125와도 같았다. 정성을 다하여 설미(雪眉)
126를 앙모하면서 법문 듣기를 기대하였다
127. 그 때 진공대사가 이르되 “제황(齊皇)이 북방으로 행차(幸次)하여
128 (결락)” 문득 기꺼워하였고, 그는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니, 어찌 서로 비교할 수 있으리요
129.
청태(淸泰)
130 4년 봄 2월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르되 “경화(京華)
131에 도착하니 조계종지(曹溪宗旨)
132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연하(輦下)
133에 와 있으니 실로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에서
134 3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한 마음은 아니다.” 그러나 노승(老僧)과 대왕(大王)은 (결락) 이러한 때 이적(二敵)은 평정되고
135, 삼한(三韓)은 태평성세가 되었으니 먼저 제흉(除㐫)의 신책(神策)을 경하하고는 다시 성스러운 위의(威儀)를 축하하였다. 임금께서 재차 스님을 찾아뵙고 또 다시 용안(龍顔)의 감회를 더욱 간절히 하였으며, 거듭 스님이 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136 왕은 자주 찾아뵙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였으나 대사가 (결락) 덕산(德山) 중으로 옮기고서는 서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고 하루 속히 운천(雲泉)
137으로 돌아가서 암곡(岩谷)에서 지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복걸(伏乞)하였다
138. 임금이 스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여러 번 선비(禪扉)
139로 나아가서 문안을 하였다. 대사가 전도(前途)에 전핍(轉逼) 후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기를 원하므로 그 후 고산(故山)
140으로 돌아가서 신사(新舍)를 수축하였다. 길이 급인(汲引)
141하여 탁마 상성하기를 말하고 모두 전제(筌蹄)를 버리고
142 선(禪)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학인(學人)이 묻되 “가섭(迦葉)이란 어떤 분입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가섭이니라.” 또 “석가는 어떤 분입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석가일 뿐 이라”고 하였다. 不待 (결락) 이미 담란(曇鑾)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143 미리 수역(壽域)
144에 왕생할 것을 기약하여 혜원(惠遠)의 뜻을 추종하였다
145. 그러므로 날마다 현리(玄理)를 이야기하여 법을 전수할 제자를 구하다가 홀연히 미병(微病)이 생기고 날로 점점 심해져서
146 천복(天福) 2년 9월 1일 (결락)에서 입적하였다. 햇빛은 참혹하고, 구름은 우울하였으며 강물은 마르고, 땅은 진동하며 산은 무너지는 듯 하였다. 사방(四方) 멀리까지 모든 사람은 슬픔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인봉(隣封)
147까지 모든 사람들이 식음을 전폐하였다. 임금께서도 갑자기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으시고
148 깊이 슬픔에 잠겼다
149. 특사를 보내 조문하는 한편, 장례에 필요한 자량(資粮)도 함께 보냈으니, 왕의 전인(專人)과 문상객들의 왕래가 기로(岐路)에 상접(相接)하였다. (결락) 오직 300여보(步)의 거리였다. 풍황(風篁)
150 소리와 서리 맞은 계수나무와 같은 곧은 자태는 청정 고매한 스님의 정덕(貞德)을 상징하였고
151, 그 자태는 허공에 가득하며 앙모함은 고산(高山)과 같았으며, 헤아리는 지혜는 바다보다 깊었다. 그러므로 사방(四方)으로 다니면서 덕화를 베풀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면서 불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머물렀으니 (결락) 모든 군생(群生)들의 자부(慈父)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도사(導師)가 되었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현양선사(玄讓禪師)
152와 행희선사(行熙禪師)
153 등 4백여 인이 모두 계주(髻珠)
154를 얻고 함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서 마침내 법왕(法王)의 제자가 되었으니
155 길이 (결락) 단심(丹心)은 금(金)과 같고, 지극한 정성은 옥(玉)과 같았다.
바라는 바는 서로 보존하여 방명(芳名)을 후세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고, 함께 의논하여 경사스러움을 미래에 무궁토록 보여 주고자 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외람되게 표장(表章)
156을 내리도록 천감(天鑒)
157에 주청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왕은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라 하고 탑명(塔名)을 보법지탑(普法之塔)이라 추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냥 단조(丹詔)
158를 반포한 것이라고만 하겠는가.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빛나고 고상한 문장(文章)을 엮어
159 법답게 스님의 빛나는 행적을 천양토록 하라 하셨으나
160,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일엽(一葉)일 뿐만 아니라
161 학해(學海)에서도 한낱 미생(微生)에 불과하다
162. (결락)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조잡하게 선문(鮮文)
163을 짓고, 명(銘)하여 가로되
(결락)
(결락)
(결락)
(결락) 허공과 같으며
천인(天人)이 함께 덕화를 사모하고,
도속(道俗)이 모두 덕풍(德風)을 흠모하며
대천(大千)의 세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와 함께 계합(契合)하였네.
이로부터 한 잎의 꽃이 피었으니
그가 바로 조계종의 종조이로다.
탁월하고 고매한 도의국사(道義國師)님
164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학자(學者)들은 모두 피로를 잊고
의사의 문 앞에는 환자가 많네
165.
도(道)에 뜻을 두어 대원(大願)을 세웠으나
이젠 연좌(宴坐)할 기력도 없구나.
갑자기 생(生)을 걷어 열반에 드니
재보(宰輔)
166들이 부음(訃音)을 보고하였다.
(결락)
(결락)
(결락)
세차(歲次) 기해(己亥)
167
8월 15일 세우고,
최환규(崔煥規)는 글자를 새기다.
【음기(陰記)】
소백산(小伯山) 진공대사가 열반에 임하여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계.
모든 대중들에게 당부하노니 나는 지금 이미 해가 서산(西山)에 드리운 것과 같이 죽음 직전에 있으므로
168 살아 있을 날이 수일지내(數日之內)에 있다. 이른 서리가 봄 꽃을 침위(侵萎)시키는 것을 아쉬워하지도 않거늘 어찌 가을의 황엽(黃葉)이 청계(淸溪)에 떨어지는 것을 근심하랴. 이는 본분납승(本分衲僧)의 사체(事體)
169이다. 예도(禮徒)의 종(宗)은 윗사람
170 공경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아랫사람 사랑하길 적자(赤子)와 같이 여길 것이니라. 상하(上下)가 화합(和合)하여 항상 삼가고 예의와 질서가 없이 낭자(浪藉)
171하게 하지 말라. 내가 생존시에도 항상 거칠어 녹폭(&A5714;暴)
172한 사실이 있었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을까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소소한 일로 권속간의 인정에 얽혀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고, 각기 스스로 잘 호지(護持)하여 취의(毳衣)
173와 철발(綴鉢)
174로 가는 곳마다 수행에만 전념하라. 종상이래(從上已來)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풍(門風)에 누(累)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이
175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남북지중(南北之中)에서 이 소백산(小白山)에 주석(住錫)한 7~8년 동안
176 십방(十方)의 납자(衲子)가 본광(本光)을 찾고 본색(本色)을 탐구하면서 어언 여러 해를 지나게 되었다
177. 분(分)을 따라 정진하여 때를 쫓고 세상을 수순하되 특별한 궤칙(軌則)은 두지 말고, 평범한 진리를 따르도록 하라
178. 또 방탕하거나 안일하지 말 것이며, 동량(棟梁)이 되려는 원력 또한 잊지 마라.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를 피하듯 처음부터 행하지 말라
179.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간에 항상 조심하여 여법(如法)하게 수행토록 하라
180. 내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려 하니, 세상(世相)의 뜻으로써 속되게 애통해 하거나 허둥지둥하지 마라
181. 금생(今生)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내(來來) 세세(世世)에는 다 같이 부처님 법석(法席)에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