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묘지명은 원석이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남아 있고,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 12과 『동문선』 125에도 실려 있다. 그 내용이 거의 같은데, 원석에 의하여 번역한다.)
추증된 시호 장경공(莊景公) 묘명<題額>
고려국 중대광 첨의찬성사 상호군 평양군(高麗國 重大匡 僉議贊成事 上護軍 平壤君) 조 장경공(趙 莊景公) 묘지명
예전에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이미 천하를 통일하여 멀리 있는 나라까지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우리 충헌왕(忠憲王, 高宗)이 귀부하고 충경왕(忠敬王, 元宗)이 힘쓴 일을 아름답게 여겨,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은전을 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황제의 딸을 충렬왕(忠烈王)에게 시집보내니, 그 이실(貳室, 離宮)
1에서 맞아준 은혜와 날마다 세 번씩 만나준 총애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었다. 이 때를 당하여 어질고 유능한 신하가 모두 나와서 열심히 보좌하여 삼한(三韓)의 왕업(王業)을 빛내었는데, 정숙 조공(貞肅 趙公)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분이었다. 정숙공의 이름은 인규(仁規)인데, 관직은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미 중흥의 공을 이루고 상상(上相)의 지위에 있으니, 훈공과 나이로 빛나는 원로대신이 되었다. 여러 아들이 있어서 모두 능히 가문을 이어 공명과 부귀가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공은 그 중에 막내였다.
공의 이름은 위(瑋)이고, 자는 계보(季寶)이며, 평양 상원(平壤 祥原)
2 사람이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추증된 영(瑩)의 손자이고, 사재경(司宰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조온려(趙溫呂)공의 외손이며, 관군만호(管軍萬戶) 나유(羅裕)공의 사위이다. 아홉 살 때에 문공(門功)으로 창희궁권무(昌禧宮權務)에 임명되고, 다시 섭호군(攝護軍)으로 옮겼으며, 다섯 번 옮겨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경술년(충선 2, 1310)에 밀직좌부대언(密直左副代言)에 임명되고 <네 번 옮겨서 우대언(右代言)이 되었으며,>
3 을묘년(충숙 2, 1315)에 언부전서(讞部典書)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총부전서(摠部典書)로서 행평양윤사(行平壤尹事)에 임명되었다가, 또 다음해에는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어나갔다. 북계(北界)에는 성질이 사나운 사람들이 많고 남방(南方)의 풍속은 또한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공은 한결같이 은혜를 베풀며 위력으로 누르지 않고 무사하기를 기약하였다. 송사를 다스리는 여가에는 술을 마시고 사냥을 나가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덕을 알지 못하다가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사모하게 되었다.
연우(延祐)
4 말년에 충숙왕(忠肅王)이 심왕(瀋王, 暠)과 사이가 벌어지자 어떤 이가 공을 이간하므로 원윤(元尹)을 제수하여 한산한 직책에 두었는데, 일이 다 진정되고 나자 충숙왕이 공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았다. 계유년(충숙 복위2, 1333)에 지밀직(知密直)에 임명되고, 을해년(충숙 복위4, 1335)에는 판밀직(判密直)으로 옮겼으며, 조금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되었다. 이 때에 충숙왕이 정사를 게을리 하여 재상에게 맡기니, 공은 큰 가닥을 잡은 채 작은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나 발언은 강직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탄복하여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고 말하면서 총재(冢宰)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무인년(충숙 복위 7, 1338) 윤월(閏月)에 일로 인해 면직되었는데, 이 때 재상에게 봉작을 잇게 하는 관례에 따라 평양군(平壤君)으로 봉하여졌다.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자 상황도 따라서 변하였으므로, 공은 집으로 물러나 날마다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지정(至正)
5으로 연호를 고치던 해(충혜 복위2, 1341) 봄에 화(禍)를 일으키기를 즐기는 자가 공이 손님들과 더불어 나라의 정책[國是]를 논의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영릉(永陵, 忠惠王)이 몹시 노하여 한밤중에 명을 내려 복주목(福州牧)
6으로 좌천시키고, 호위하는 군사를 붙여 압송하게 하면서 한 시각도 지체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매우 급하게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달려갔는데, 마음이 자못 즐겁지 못하여 점차 화기(和氣)가 손상되었다. 이미 집으로 돌아 왔을 때에는 병이 들어 걷기가 어려웠고 말도 어둔해져서 백방으로 치료하여도 효험이 없었다. 정해년(충목 3, 1347) 가을에 승진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졌으나 병으로 사은(謝恩)하지 못하였다. 무자년(충목 4, 1348) 11월 을사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이다.
부인 나씨(羅氏)는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으며, 아들 흥문(興門)을 낳았는데 지금 소부윤(小府尹)이고, 손자 한 명이 있다.
이듬해 3월 기미일에 송림원(松林原)에 장례지냈다. 장례를 지내려하면서 형인 원(元)의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묘지명을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였다. “우리 조카가 바야흐로 만 리나 되는 곳에서 상을 치르러 급하게 와서 청탁할 겨를이 없으므로, (내가 대신) 청하는 것입니다. <내 아우의 평소의 뜻은 그대가 알고 있는 바이니 바라건대 묘지명을 써주십시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7 우리 아우의 덕과 행적은 진실로 옛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다시 한 번 일어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위로해 주어야 할 터이지만, 아, 이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또 그가 죽은 것이 비록 국휼(國恤) 중이라고는 하나,
8 여러 사람들이 시호를 의논하면서 이름을 바꾸었고 관에서 일을 도와주어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덕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어찌 명(銘)을 짓지 않겠습니까.” 곡(穀, 李穀)이 승낙하고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이 재능을 내리면서 이 사람에게 더욱 후하게 하였다.
어떻게 후한가, 훌륭한 임금을 만났고 좋은 어버이를 두었도다.
진실로 평양(平壤)은 그 품성이 순박한데
정숙공의 아들이요, 충숙왕의 신하로서
이미 능히 있는 힘을 다하여 효도하였고 또 몸을 다 바쳐 충성하였다.
이빨을 주면서 뿔을 제거하는 것은 하늘이 주는 재능이 고르지 않다는 것인데
덕은 주면서 수(壽)를 빼앗았으니, 하늘이 혹 어질지 않은 것인가.
내가 공의 묘에 명을 지으니, 그 슬픔은 곧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
부끄러움 없는 글을 엮어서 이 단단한 옥돌에 새기노라.
지정(至正) 9년 기축년(충정 1, 1349) 청명(淸明)에 봉훈대부 중서사전부(奉訓大夫 中瑞司典簿) 이곡(李穀)이 짓고, 후학(後學) 한수(韓脩)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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