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태부인 최씨(樂浪郡太夫人 崔氏) 묘지명<題額>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조청대부 예빈경(朝請大夫 禮賓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작고한 변(㺹)의 딸이고, 작고한 첨의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 보문서대학사 문정공(僉議侍郞贊成事 判版圖司事 寶文署大學士 文貞公) 김구(金坵)의 처이다.
부인은 평생 재산을 모으는 일에 구차하게 마음을 쓰지 않았고, 또한 얻은 것이 있더라도 지나치게 아끼지 않았다. 무릇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에는 가깝고 멀거나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가진 것을 다하여 장만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였다. 문정공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홀로 지낸 지 30여 년이나 되어 집안 살림은 더욱 가난해졌지만, 스스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지켜나갔다.
부인은 성품이 강직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섬기지 않았으므로, 귀신 중에는 두려워하며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황당하고 괴이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83세가 되어 노환으로 임종하기 하루 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름을 향진(向眞)이라고 하였다. 지대(至大)1 2년(충선왕 1, 1309) 7월 4일에 이판활동(泥坂闊洞)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10월 22일에 초산(椒山)에 있는 문정공(文貞公)의 묘 앞에 장례지냈는데, 대개 옛 사람들이 부장(附葬)한 뜻을 본받은 것이다.
부인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여우(汝盂)는 동지밀직사사 문한사학승지(同知密直司事 文翰司學承旨)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죽었다. 큰딸은 정해(鄭瑎)에게 시집갔는데 (정해는) 관직이 도첨의찬성사 연영전대사학(都僉議贊成事 延英殿大司學)으로 죽었고, 딸 역시 사위보다 먼저 죽었다. 2남 종화(宗盉)는 지금 농화부승(穠華府丞)이고, 막내아들은 조계종(曹溪宗)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명을 충장(冲壯)이라 하고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아,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자녀 중 비록 먼저 죽은 자가 있으나, 여러 손자들이 모두 눈 앞에서 화려하고 높은 관직을 역임하고 왕실과 잇달아 혼인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경사스럽다고 할 것이다.
사(詞)를 지어 이른다.83세에 물 흐르듯 가셨으니
하나의 좋은 일은 훌륭한 인연을 이루게 되도다.
예전부터 부인은 왕생의 도리[有相]가 있음을 들어왔는데
하루 전에 출가하여 다시 하늘에서 태어났도다.
이제 부인은 또한 옛 사람처럼 (자신이) 할 일을 다하였으니,
자손이 그에 힘입어 복이 끝없이 이어지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