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지찬성주사비(金立之撰聖住寺碑)
-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845~857년(문성왕 7~19)
- 유형
- 비문
- 크기
- 글씨크기 2.0cm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보령 성주사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김립지(金立之)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김립지찬성주사비는 본래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聖住里)에 위치한 성주사(聖住寺)에 건립한 비였다. 현재 성주사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만이 남아 있고, 김립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비(聖住寺碑)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성주사터와 그 근처에서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대략 조선중기까지 비가 온전하게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에 김립지찬의 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건립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편에 문성왕대에 활약한 김양(金陽)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그가 857년(문성왕 19)에 사망하였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공덕과 그가 성주사에 머물게 된 배경, 그리고 성주사의 운영 성과 등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편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에 전하지 않는 내용이 일부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성주사(聖住里)가 본래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비문을 지은 김립지(金立之)는 825년(헌덕왕 17)에 왕자 흔(昕)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귀국 후에 추성군[전남 담양군] 태수, 한림랑(翰林郞)을 역임하였으며, 창림사무구정탑지를 지었다.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모아 새긴 것이다.
판독문/해석문
판독문 | 허흥식 | ||
판독문 | 권태원 | ||
판독문 | 황수영 | ||
판독문 | 이난영 | ||
판독문 | 최연식 |
참고문헌
논문 | 2003 | 곽승훈, 2003, 「문헌에 실린 신라 불교 금석문 연구」『실학사상연구』25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논문 | 2001 | 趙仁成, 2001, 「朗慧和尙塔碑銘의 撰述과 崔致遠」『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
논문 | 1998 | 梁承律, 1998, 「金立之의 『聖住寺碑』」『古代硏究』6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會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논문 | 1992 | 權兌遠, 1992, 「聖住寺址의 史略에 관하여」『湖西史學』19·20合 |
논문 | 1973 | 黃壽永, 1973, 「金立之撰 新羅 聖住寺碑(其三)」『考古美術』117, 한국미술사학회 ; 『韓國의 佛敎美術』, 同和出版公社 |
논문 | 1972 | 黃壽永, 1972, 「金立之撰 新羅 聖住寺碑(續)」『考古美術』115, 한국미술사학회 |
논문 | 1969 | 黃壽永, 1969, 「金立之撰 新羅聖住寺碑」『文化財』4, 문화유산관리국 ; 1974, 『韓國의 佛敎美術』, 동화출판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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