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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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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지는 경주의 창림사(昌林寺 : 남산(南山) 서쪽 기슭 포석정(鮑石亭) 동북쪽에 있다)에 있던 무구정탑(無垢淨塔) 안에 들어 있던 것으로, 조선 1824년(순조(純祖) 24, 갑신년(甲申年))에 한 석공이 탑을 깨뜨리고 그 안에 있던 다라니경(陀羅尼經)의 사경문(寫經文)과 함께 발견한 동판(銅版) 위에 적혀 있던 것이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내용은 국왕인 경응(慶膺 : 文聖王)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무구정탑을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이 시기에 많이 제작된 무구정탑과 그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글을 지은 김립지(金立之)는 지금은 비편만이 전하는 「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825년(헌덕왕(憲德王) 17) 5월에 왕자 흔(昕)을 따라 당(唐)에 건너가 유학하였고, 그 후 돌아와 한림랑(翰林郞)으로서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이 탑지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으로 김립지의 「성주사사적비」와 김육진(金陸珍)이 글을 지은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도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의 한 경향을 알 수 있다.
국왕 경응(慶膺)이 무구정탑을 만들고 바램을 기록한 글.
한림랑(翰林郞)으로서 새로이 추성군(秋城郡) 태수(太守)를 제수받은 김입지(金立之)가 국왕의 명을 받아 지음.
듣건대 경전에서 말하기를 공덕을 짓는 데에는 만가지의 방법이 있지만, 만물에 무한한 이로움을 주는 것은 탑을 짓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생각컨대 국왕께서는 여러 겁(劫) 동안 선행(善行)을 행하셔서 지위가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에서 으뜸이 되셨습니다. 이제 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고해(苦海)에 떠다니면서 육도(六途)에 순환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장차 그들을 구원할 길을 만들어 부처의 정토로 이끌고자 하시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하시고서 전국의 匠人 중에 뛰어난 사람을 뽑고, 여러 산의 좋은 돌을 골라 캐어서 여러 층 탑을 만들고 사리를 그 안에 넣었습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이 공덕이 멀리는 하늘이 끝나는 저편 너머까지, 위로는 높고 높은 곳 너머까지 미쳐서 저 꿈틀거리는 모든 영혼들에게까지 이익되고자 합니다. 또한 국왕께서는 영원히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주인이 되시고, 업보가 다하여 돌아가시는 날을 당하셔서는 곡식을 나누어 (보시한) 이름이 가장 높은 자리에 들기를 원합니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9년, 을해(乙亥)년 4월 윤(閏)달 일에 세움.
왕명을 받은 수조탑사(修造塔使)는 (국왕의) 종제(從弟)이며 사지(舍知)로써 웅주(熊州) 기량현령(祁梁縣令)인 김예(金銳).
도감(都監) 수조 대덕(修造 大德)은 판정법사(判政法事)인 계현(啓玄).
검교(檢校) 수조 승(修造 僧)은 전봉덕사(前奉德寺) 상좌(上座)인 청현(淸玄).
혜지(專知) 수조 승(修造 僧)은 강주(康州) 함안군(咸安郡)의 군통(郡統)인 교장(敎章).
동(同) 감수조사(監修造使)는 (국왕의) 종숙(從叔)이며 武州長史인 金繼宗.
동(同) 감수조사(監修造使)는 (국왕의) 종숙(從叔)이며 새로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을 제수받은 김훈영(金勳榮).
검교사(檢校使)는 아간(阿干)으로서 전임(前任)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원필(金元弼).
검교부사(檢校副使)는 명주(溟州) 별가(別駕)인 김의령(金嶷寧).
혜지(專知) 수조관(修造官)은 세택(洗宅) 대나마(大奈末)로써 서림군(西林郡) 태수(太守)인 김양박(金梁博).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은 전임(前任) 창부사(倉府史)인 김기언(金奇言).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은 전임(前任) 창부사(倉府史)인 김박기(金朴基).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원래 상문사(祥文師)로서 경덕왕(景德王)대에 한림(翰林)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이나 고려의 기능과 비교할 때 국왕의 조서나 외교문서 등을 작성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9 직관(職官) 중(中)
祥文師 聖德王十七年改 爲通文博士 景德王 又改爲翰林 後置學士 ↩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현재의 담양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6 지리(地理) 3
秋成郡 本百濟秋子兮郡 景德王改名 今潭陽郡 ↩
김입지(金立之)는 헌덕왕(憲德王) 17년 (825)에 왕자 김흔(金昕)을 따라 중국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파견되어 당(唐)의 국자감(國子監)에서 수학한 사실이 나오고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의하면 별도의 성주사비(聖住寺碑)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그 비로 추정되는 비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의하여 만든 탑. 이 경전에 의하면 법(法), 곧 다라니를 사서(寫書)하여 99(혹은 77) 개의 소탑(小塔)에 넣어 탑(塔)을 만들거나, 탑(塔)을 중수(重修)할 때 탑 속에 봉안하면 큰 공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나 시기에 비하여 8세기의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경전에 근거한 무구정탑(無垢淨塔)이 비교적 많이 만들어지는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이 창림사탑 외에 다음의 것들이 있다.
전황복사탑(傳皇福寺塔 : 706년), 불국사 석가탑(佛國寺 釋迦塔 : 757년), 동화사 민애대왕석탑(桐華寺 敏哀大王石塔 : 832년), 봉화 취서사탑(奉化 鷲棲寺塔 : 867년), 황룡사 9층탑(皇龍寺 九層塔 : 871년), 중화삼년명 금동원투(中和三年銘 金銅圓套 : 883년), 해인사 묘길상탑(海印寺 妙吉祥塔 : 895년) (姜友邦, 1991 「佛舍利莊嚴論」 佛舍利莊嚴). ↩
신골(身骨), 유신(遺身), 영골(靈骨) 등으로도 번역되며 한량없는 6바라밀을 수행하고 계(戒), 정(定), 혜(慧)를 닦은 공덕으로 생긴다. 원래는 석가의 몸에서 나온 것을 말하였는데 후에는 다른 고승이나 수행자에게서 나온 것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법신(法身)사리라고 하여서 불교 경전을 탑속에 넣고서 사리로 여기기도 하였다. ↩
‘行’은 관위가 관직보다 높을 때에 쓰는 말이다. 반대로 관직이 관위보다 높을 때에는 ‘守’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직관지(職官志) 외관조(外官條)에는 현령(縣令)을 제17위의 선저지(先沮知)부터 제8위의 사찬(沙飡)까지 담당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行’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량현은 사지보다 낮은 관위가 담당하는 규모의 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6 지리(地理) 3
湯井郡 本百濟郡 (중략) 領縣二 (중략) 祁梁縣 本百濟屈直縣 景德王改名 今新昌縣 ↩
경문왕(景文王) 8년 (868)에 모반을 꾀한 것으로 인하여 사형에 처해지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는 이 탑이 세워진 문성왕 17년으로부터 13년 이후의 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경문왕(景文王) 8년,
春正月 伊飡金銳 金鉉等 謀反伏誅 ↩
범어의 Bhadanta에서 온 말로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스님을 가리킨다. 원래는 부처를 일컫던 말인데 뒤에는 승려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승려의 관직으로 사용되었는데 신라에서는 이것이 관직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조(職官條)에 정관(政官)을 정법전(政法典)이라고도 했다고 하며 승려를 관장하는 기관이라고 하였는데, 판정법사(判政法事)는 이 정법전을 관장하는 관직이었던 것 같다. 판(判)은 고관이 하위의 기관을 관장할 때에 쓰는 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0 직관(職官) 하(下)
政官 (或云政法典) 始以大舍一人 舍二人爲司 至元聖王元年 初置僧官 簡僧中有才行者充之 有故則遞 無定年限 ↩
성덕왕(聖德王) 때 창건된 절로서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景德王)이 부왕(父王)을 위하여 12만근의 큰 종을 만들어 달려고 하였는데 혜공왕(惠恭王) 7년에 완성되었다. 국보 99호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바로 이것이다. 이후 이 봉덕사는 북천(北川)에 묻히게 되어 종은 영묘사(靈妙寺)로 옮겼는데(조선(朝鮮) 세조(世祖) 5년), 현재는 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창녕에 있는 「인양사(仁陽寺) 금당(金堂) 치성문(治成文)」에는 인양사에 곡식을 제공한 서울(경주)의 여러 절 가운데 하나로서 나오고 있다. ↩
성주(寺主), 도유나(都唯那) 등과 함께 사찰 삼강(三綱)의 하나로 절안의 승려를 통솔하고 온갖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
함안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이며, 군통(郡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국에 18명이 있었던 것으로 전국의 큰 군에 배치되어 승정(僧政)을 관장했던 승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0 직관(職官) 하(下)
國統 一人 (一云 寺主) (중략) 州統 九人 郡統 十八人 ↩
무주(武州)는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6 지리(地理) 3,
武州 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
장사(長史)는 사마(司馬)라고도 했으며 각 주(州)에 1명씩 파견되어 행정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관위는 사지(舍知)부터 대나마(大奈麻)까지가 담당하였다. ↩
사수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地理) 1,
固城郡 本古自郡 (중략) 領縣三 … 泗水縣 本史勿縣 景德王改名 今泗州 ↩
아간(阿干)은 아찬(阿飡)혹은 아척산(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도 하며 제6위의 관등이다. ↩
집사시랑(執事侍郞)은 집사부(執事部)의 차관으로 정원은 2인이고 관위(官位)는 나마(奈麻)에서 아찬(阿飡)까지가 담당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시랑(侍郞)이라는 명칭이 경덕왕(景德王)대에 전대등(典大等)으로부터 바뀐 것이라고 하였지만 경덕왕 이전인 성덕왕(聖德王) 18년에 건립된 감산사(甘山寺) 아미타조상기(阿彌陀造像記)에도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나타나고 있어 그 이전부터 그러한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8 직관(職官) 상(上),
執事省 本名 稟主 (或云租主) 眞德王五年改爲執事部 (중략) 典大等二人 眞興王二十六年置 景德王六年改爲侍郞 位自奈麻至阿飡爲之 ↩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職官志)에는 별가(別駕)라는 관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전주별가(全州別駕) 영웅(英雄)이 보이고 있어 당시에 실재한 관직임은 틀림없다. 원래 중국에서는 주(州)의 자사(刺史)에 대한 보좌관으로 나타나고 있어 신라에서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되어 직관지의 주조(州助)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0 직관(職官) 하(下) 외관(外官)
州助 (或云州補) 九人 위자내마지중아손위지 ↩
세택(洗宅)은 『삼국사기』직관지(職官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확한 역할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직관(職官) 중(中),
洗宅 景德王改爲中事省 後復故 大舍八人 從舍知二人
그런데 이기동(李基東)은 왕실 측근의 문한관(文翰官)으로 추측하여 경덕왕대(景德王代)의 개혁정치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李基東, 1978,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 『歷史學報』77). ↩
서림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지역에 해당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地理) 3 웅주(熊州),
西林郡 本百濟舌林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는 창부(倉部)는 있으나 창부(倉府)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동일한 기구로 생각된다. 창부의 사(史)는 말단의 하급관리로서 병부(兵部)와 마찬가지로 선저지(先沮知)에서 대사(大舍)까지가 담당하였다. 그 수는 원래 8명으로 진덕왕때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후 점차 수가 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8 직관(職官) 상(上)
倉部 昔者倉部之事兼於稟主 至眞德王五年分置此司 令二人 (중략) 史八人 眞德王置 文武王十一年加三人 十二年加七人 孝昭王八年加一人 景德王十一年加三人 惠恭王加八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