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慶州 鍪藏寺址 阿彌陀佛 造像 事蹟碑)
-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801년(애장왕 2) 추정
- 유형
- 비문
- 크기
- 귀부 가로 168cm, 세로 110cm, 높이 58cm, 이수 높이 65cm, 너비 81cm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산1-9
- 서체
- 행서(行書 : 왕희지(王羲之) 글자 집자(集字))
- 찬자 /각자 /서자
- 김육진(金陸珍)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보물
- 연구정보
개관
이 비는 조선(朝鮮) 영조(英祖) 38년 경진년(庚辰年 : 1760)에 홍양호(洪良浩)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경주(慶州) 내동명(內東面) 암곡리(暗谷里)에서 발견하였다가 다시 그 소재를 잃은 것을 순조(純祖) 17년 정축년(丁丑年 : 1817)에 김정희(金正喜)가 경주 일대를 뒤져 깨진 비석 두 부분을 다시 찾은 것으로, 청(淸)나라 사람 유승간(劉承幹)이 편찬한『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부록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자료 조사 과정중 무장사지(鍪藏寺址) 부근에서 귀부(龜趺), 이수(螭首) 및『해동금석원』에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한 부분이 다시 발견되어 소개되었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처음에는 이 비석의 글씨가 비문의 찬자(撰者)인 김육진(金陸珍)의 글씨로 잘못 여겨졌었지만, 실제 글자 자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集字)한 것이고 김육진은 단지 문장만을 지었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김립지(金立之)가 문장을 짓고 건립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나「성주사비(聖住寺碑)」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 비석은 신라 제39대 소성(성)왕(昭成(聖)王)의 왕비인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왕이 죽은 후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만들고서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삼국유사(三國遺事)』의 무장사미타전조(鍪藏寺彌陀殿條)에 소개되어 있다. 현재는 비문이 많이 결락되어 있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편자가 이 비문의 기록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전하는 세 개의 비편 중 (2)는 제3행과 5행에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데 이것은 비편 (1)의 제5행과 7행의 아랫 부분이 여백으로 남아 있는 것과 이어지는 것으로써, 2~3 글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1)의 앞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판독문/해석문
판독문 |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정밀실측조사보고서』 | ||
판독문 | 中吉功 | ||
판독문 | 朝鮮金石總覽 | ||
판독문 | 劉喜海 | ||
판독문 | 허흥식 | ||
판독문 | 최연식 | ||
판독문 | 문명대 |
참고문헌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會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단행본 | 1980 | 文明大, 1980, 『韓國彫刻史』, 悅話堂 |
논문 | 1931 | 小田幹治郞, 1931, 「慶州?藏寺彌陀殿碑解說」『小田幹治郞遺稿』 |
단행본 | 1919 | 中樞院編, 1919, 『朝鮮金石總覽』上 |
논문 | 1914 | 小田幹治郞, 1914, 「?藏寺碑の發見」『朝鮮及滿洲』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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