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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 신행선사비(斷俗寺 神行禪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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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단속사신행선사비는 본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위치한 단속사(斷俗寺)에 세웠던 비였으나 조선후기에 분실되었다. 현재 비의 전문은 탁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한국금석문을 모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따르면, 비의 높이는 5척 7촌(약 1.7m), 너비 2척 5촌(1.35m)이었다고 한다. 비문에 신행선사는 속성은 김씨로서 704년(성덕왕 3)에 태어나 30세에 출가하고,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禪宗)을 배웠으며, 귀국 후에 교화활동을 펴다가 779년(혜공왕 15)에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신생선사가 입적한 지 35년만인 813년(헌덕왕 5) 9월 9일에 선사를 기리기 위한 목적에서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당시에 병부령(兵部令)으로서 수성부령을 겸임하고 있었던 김헌정(金獻貞)이고, 글씨를 쓴 이는 동계사문(東溪沙門) 영업(靈嶪)이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초기 선종사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비는 신행선사가 입적한지 35년만에 선사를 현창하기 위한 목적에서 원화(元和) 8년(헌덕왕 5, 813) 9월 9일에 건립되었다. 원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에 조선시대 후기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따르면 높이 5척 6촌, 폭 2척 5촌이었다고 한다. 서체는 행서(行書)로서 서풍(書風)이 왕희지체에 가깝다. 총 29행에 각 행은 63자씩이다.
찬자(撰者)는 황당위위경국상병부령겸수성부령이간(皇唐衛尉卿國相兵部令兼修城府令伊干) 김헌정(金獻貞)이며 서자(書者)는 동계사문(東溪沙門) 영업(靈業)이며, 각자(刻者)는 미상이다.
이 비는 8세기 신라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비문의 주인공인 신행이 7세기에 중국 달마계통의 선을 처음 전래한 법랑(法朗)을 계승하고 있는 점, 스스로 당에 건너가 신수(神秀)계통의 북종선(北宗禪)을 배우고 귀국한 점, 그 문하에서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를 개창한 도헌(道憲)이 배출된 점 등에서 이 비문은 신라의 초기선종사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자료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①제액, 찬자, 서자
②서(序)
도입부: 夫法之體也~卽我神行禪師 受其記焉
가계, 출가수행: 禪師 俗姓金氏~遂以知生風燭 解滅水泡
입당유학: 遠涉大洋~尊重瞻仰 不可殫載矣
귀국후 행적: 然後 還到雞林~此則 導師隱顯理必然
입적과 立碑 과정: 故生平七十有六~齊登涅槃之岸云爾
③명(銘): 其詞曰~咸臻覺道 速詣眞場
④건비연대(建碑年代)
신행선사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 생몰기간: 성덕왕 3년(704)~혜공왕 15년(779).
속성(俗姓) 김씨(金氏). 동경(東京) 어리인(御里人).
증조부의 형이 진평왕대의 안홍(安弘), 부(父)는 급간(級干) 상근(常勤).
- 733년(30세 성덕왕 32): 출가하여 운정률사(運精律師)에게서 2년간 수학.
- 거산(踞山) 법랑선사(法朗禪師)에게서 3년간 선(禪)을 수학.
- 법랑(法朗) 입적후 중국 유학.
북선종(北宗禪) 신수(神秀)의 법손인 지공(志空)에게서 수학.
- 지공(志空) 입적후 귀국. 교화활동.
- 779년(76세 혜공왕 15) 10월 21일 남악(南岳) 단속사(斷俗寺)에서 입적.
- 813년 신행과 동문수학한 삼륜선사(三輪禪師)가 주도하여 부도와 비석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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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남동신
해동의 돌아가신 신행선사의 비
당의 위위경이며 국상 병부령 겸 수성부령인 이찬 김헌정이 짓고
동계사의 중 영업이 씀
무릇 법의 본체는 이름지을 수도 없고 모습을 그릴 수도 없으니, 지혜에 눈멀고 귀먼 자는 그 추이를 관찰할 수가 없다. 마음의 본성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니, 이치에 우매한 자는 그 근원을 측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학이든 무학이든 겨우 향기로운 절밥을 맛볼 뿐이요, 이승이든 삼승이든 어찌 약나무의 과일을 얻을 수 있으리오. 선나라고 하는 것은 말단에 즉해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오묘한 문이요, 마음으로 인해서 도(道)로 올라가는 그윽한 길이다. 거기에 귀의하는 자는 무수한 세월동안 지은 죄를 녹일 수 있고, 그것을 생각하는 자는 무수한 세계의 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여러 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수행을 쌓고 공덕을 이루어 깊고 또 깊게 그 극치를 이룸에 있어서랴. 더구나 지위가 35불(佛)의 단계에 오르고 명성이 온 세계에 뻗쳤으며, 부처의 씨앗을 잇고 법의 등불을 전함에 있어서랴. 곧 우리 신행선사께서 그러한 수기를 받으셨다.
선사의 속성은 김씨요, 동경 어리 사람이다. 급간 상근의 아들이요, 선사 안홍의 형의 증손이다. 선행을 쌓고 마음을 훈습하였으며, 예전에 감성(感性)으로 인하여 나이 30 무렵에 출가하여 운정율사를 섬겼다. 바리때 하나와 옷 한벌만 가지고 2년동안 고행을 닦았다. 다시 법랑선사가 호거산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곧 그곳으로 가서 심오한 뜻을 삼가 받았다. 아직 7일이 지나지 않아서 스승이 옳고 그름을 시험삼아 묻자, ‘마음이 그대로 무심(無心)’이라는 말로써 미묘하고 그윽하게 대답하였다. 스승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착하구나. 마음등불의 법이 모두 네게 있구나” 하였다. 열심히 구하기를 3년만에 스승이 입적하자, 자신을 잊고 통곡을 하였으며, 사모함이 지극하였다. 마침내 사는 것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고 죽는 것은 물거품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멀리 큰 바다를 건너 오로지 부처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다. 위험한 파도를 탈수록 마음을 편안히 하겠다는 생각을 흔들리지 않게 하였으며, 험난한 바다를 대할수록 계율을 지키겠다는 뜻을 더욱 채찍질하였다. 맹세가 견고한데다가 부처의 신령스런 위엄을 입어서 외로운 항해가 곧장 나아가 저편에 닿을 수 있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변경을 어지럽히자, 여러 주부(州府)에 명하여 전부 체포하게 하였다. 관리가 (선사를) 우연히 만나 힐문하자, 선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는 신라에서 태어나 불법을 구하고자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관리는 마음대로 놓아줄 수가 없어서 선사를 240일 동안 구금하였다. 이때 함께 구금된 사람들은 감시인이 없는 것을 틈타서 쇠사슬을 풀고 휴식하며 모두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느냐” 하였다. (선사가) 답하기를, “아! 나는 예전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끝내 사슬을 풀고 쉬지 않았으니, 이는 곧 욕됨을 참고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자취요, 빛을 지녔으면서도 빛을 감추는 행적이다. 사태가 해결되자 지공화상에게 나아갔다. 화상은 곧 대조선사에게 입실한 사람이었다. 아침 저녘으로 열심히 숭앙하기를 이미 3년이나 지나서야 (화상이) 비로소 마음을 열고 진리를 전수하였다. 미세한 티끌을 허물지 않고서 문득 모든 경전의 요점을 포착하였으며, 마음을 쓰지 않고서 무수한 부처의 세계를 두루 노닐었다. 항상 본성의 바다 깊은 근원에서 헤엄치고 놀았으며, 진공의 그윽한 가에까지 날아다녔다. 화상이 입적할 때가 되어서 선사에게 관정하고 수기하며 말하기를, “가거라! 존경스런 인재여. 너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서 미혹된 나루터를 깨치게 하고 깨달음의 바다를 높이 떨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 입적하였다. (선사는) 이때 확 트이면서 미증유의 것을 얻었으니, 지혜의 등불이 허공에 뛰고 선정의 물이 선의 바다로 모였다. 그래서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거나 듣고나서 (선사를) 존중하고 우러러본 일을 이루 다 실을 수가 없다.
그런 뒤에야 신라로 돌아와서 여러 몽매한 이들을 인도하였는데, 도의 근기가 있는 자를 위해서는 ‘마음을 보라(看心)’는 한마디로 가르치고, 그릇이 익은 자를 위해서는 수많은 방편을 보여 주었다. 한 시대의 비밀스런 전적에 통하였으며 삼매의 밝은 등불을 전하였으니, 실로 부처의 해가 동쪽에서 다시 떠오르고 법의 구름이 동쪽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설사 세 가지 신통력을 포괄하고 십방(十方)을 에워싸도록 그 자취를 서술하고 그 공적을 베낀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일부분의 덕인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도(道)의 몸이 땅처럼 유구하고 지혜의 목숨이 하늘처럼 유장한 것을 바랄 뿐이다. 아! 감응의 주체가 이미 다하였으니, 감응되는 바가 바야흐로 옮기겠구나. 이는 곧 인도하는 스승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이치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나이 76세인 대력 14년(혜공왕 15) 10월 21일 남악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이날 하늘이 어두워지니 해와 달과 별이 그 때문에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니 만물이 이로 인하여 떨어졌다. 단물이 나오는 샘이 문득 마르자 물고기가 그 속에서 놀라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꺾이니 원숭이와 새가 그 아래에서 슬피 울었다. 이에 세속인과 승려가 함께 감화를 받고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찬양하였다. 혹은 이상한 향기를 맡았는데 지팡이 처럼 공중을 날아와 번개같이 달아났으며, 혹은 상서로운 구름을 보았는데 술잔처럼 시냇물을 타고 와서 비처럼 흩어졌다. 피눈물을 흘리며 화장을 하고 온 마음으로 뼈를 장사지낸지가 거의 36년이나 되었다. 그곳은 곧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만길이요 흐르는 물이 천길이었다. 이름을 감추고 귀를 씻을 수 있는 은둔처요 세상을 버리고 자취를 감출 깊은 서식처였다. 선정의 못이 깊고 맑으니 지혜의 햇빛을 깊이 감추고, 공의 수풀이 쓸쓸하니 선풍의 메아리를 길게 노래한다. 북쪽으로는 홀로 선 높은 봉우리에 의지하고 서쪽으로는 삼장(三藏)의 먼 계곡을 이웃하였다. 어스름 달은 산마루에 걸렸고 금빛 구슬은 연못 밑에 버렸다. 어찌 지리가 높고 험한 것만 생각하리오. 또한 신령들의 동굴이로다. 『대당서역기』에 이르기를, “계족산 석실에서 마하가섭이 법의를 간직한 채 미륵보살을 기다린다” 하였으니, 어찌 여기가 그곳이 아니겠는가. 대대로 바위라 칭하였는데, 이제 보니 여기에 있도다.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그 형상이 문과 같으니, 문이 열릴 기약이 그 얼마쯤인가를 알지 못하겠다. 이와 같은 성인의 자취는 그 수가 하도 많아서 상세히 다 말할 수가 없을 따름이다. 지금 우리 삼륜선사는 숙세에서 여러 오묘함을 심고 본래 삼신을 갖추어서, 마음에 자성이 없고 깨달음을 타인으로 말미암지 않았으며, 함께 도업을 닦고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었었다. 이 때에 안선하는 여가에 세상을 깊이 염려하며 말하기를, “형체가 없는 이치는 불상을 세우지 아니하면 볼 수가 없고, 말을 떠난 법은 글을 짓지 아니하면 전할 수가 없다. 슬프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구슬을 품고 돌아갔으니, 곤궁한 아들이 재보를 얻을 날이 몇날이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유명한 장인을 불러 (선사의) 신령스런 영정을 그리고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보존하고 지계(持戒)의 향을 불사르고 선정의 물을 뿌렸다. 앞서간 성인께 간절한 정성을 바치고 장차 말세에 귀감을 삼았다. 현명한 조정에 크게 숨은 현인과 도의 경계에 마음을 부친 선비와 위제를 힘써 생각하는 귀인과 열반을 뒤따르는 무리가 있어 서로 돌아보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들 여러 사람은 함께 무한한 부처님을 받들며 똑같이 무수한 스님들을 생각하렵니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계수나무 동산에서 붉은 기운을 받고 금나무 가지에서 구슬같은 나뭇잎을 따며, 말방울을 나누고 봉황의 수레를 몰아 청하 위에서 목욕하며 쉬고 거천(巨川)에 배를 띄워 황옥 아래에서 춤을 추었다. 큰 집의 동량이 되어 세상에 볼만한 거리가 여기에 성하였다. 성하면 반드시 쇠퇴함은 옛사람이 전하는 말이다. 슬프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 왔으니, 죽을 때도 뉘라서 함께 가겠는가. 순식간이라 세월의 빠름을 알지 못하니, 위아래를 쳐다보아도 옳고 그름이 있을 리 없도다. 만약 불타는 집같은 세속에서 탈출하여 번뇌를 벗어난 경지에 오르고 일체의 생존을 끊어 한결같은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라면, 가르침의 그물이 갈래가 많다지만 삼각(三覺)만한 것이 없고, 도움이 되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지만 수희(隨喜)가 최고이다. 그래서 충직한 관리에게 명하고 정결한 스님네를 권하여 이 유한한 재물을 가지고 저 무궁한 복을 짓도록 하였다. 이에 명산에서 돌을 취하고 깊은 계곡에서 나무를 베어다, 푸른 구슬을 새기고 절을 얽었다. 바라건대 만고의 큰 자취를 드러내니 천년을 지나도록 시들지 말지어다. 이른바 사람이 도를 넓힌다 하였으니, 어찌 빈말이겠는가. 석가모니가 법을 남기면서 국가에 부탁하셨으니,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저는 거칠고 재주가 없어 송구스럽게도 부끄러울 뿐이다. 선사의 현묘한 교화를 찬양하며 문득 짧은 감회를 기록하고자 하는데 아직 한마음도 깨끗이 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삼학(三學)의 집에 오르리오. 바라건대 반딧불의 불빛으로 태양의 밝고 큰 빛을 돕는 꼴이니, 미리 알고 남보다 앞서 생각한다고는 하지만, 어찌 손가락을 구부려서 달을 찾고 달걀을 열어서 새벽을 재촉할 수 있으리오. 오직 원하건대 하늘 못이 마를지라도 소원의 바다는 끝이 없고, 장마에 불타고 가뭄에 물이 넘칠지라도 비명은 굳게 보존될지어다. 그런 뒤에 한없는 유식자와 어리석은 생령들이 신령한 기물에 법의 물을 붓고 마음의 밭에 도의 싹을 키워서, 애욕의 진흙에서 영원히 벗어나 하나같이 열반의 언덕에 오를지어다.
사에 이르기를,
깊도다 깨달음의 바다여, 헤아리기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고요하고 고요하며 화락하고 화락할 뿐.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 삼학(三學)으로 으뜸을 삼았으니,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사의 뜻 전할 뿐 말로는 통하기 어렵도다.
애초에 부처로 인하여 일어나 동쪽으로 왔으니,
누가 능히 신령스럽게 해석하였는가 곧 우리 선사이시다.
부모를 이별하고 가정을 버리고 번뇌의 울타리를 벗어나,
산에 들어가 도를 찾고 바다를 건너 자취를 더듬었다.
빛을 숨겨 고통을 받고 열심히 생각하여 공을 이루니,
스승과 제자가 만날 때마다 눈을 마주치며 상봉하였다.
정신을 모아 벽관을 닦아 당나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신라로 돌아와 여러 몽매한 이들을 인도하였다.
근기에 따라 만물을 응대하니 약을 줌이 무궁하였다.
여기의 인연이 이미 다하여 저 천궁으로 승화함에,
빈 계곡에 형체를 남기고 구름 봉우리에 그림자를 벗었다.
뜻을 같이한 무리들이 몰려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나,
자애로운 빛이 이미 사라졌으니 추모하는 그리움 어찌 다하리오.
참다운 스님 한분 있어 친히 법의 요체를 이었는데,
정신은 한결같음을 이해하였고 마음은 온갖 오묘함을 감추었다.
말도 아니요 침묵도 아닌 채 그대로 고요하고 그대로 빛났으며,
선정에서 나와 잠시 생각하고 지식이 얕음을 슬퍼하였다.
신령한 모습을 채색하여 그렸으니 모습이 틀리지가 않았고,
다시 부도를 만들고 재차 공덕을 닦았으니,
만고천년에 불법을 전하는 법칙이다.
신라 3성 중 김씨가문 출신이요 안홍의 자손이라,
한마음은 바다와 같이 모든 계곡물을 받아들이는 왕이다.
앞서서 수행하고 격려하며 공평히 구별할 것을 결원하여,
고루 법의 비를 적시고 함께 부처의 빛을 만났다.
맑은 물에 배띄웠고 황옥에 동량이 되었으니,
세속의 소망이 이로써 번성해졌다.
뜻밖에 굴러온 것은 꿈과 같아 영화와 몰락이 무상하며,
열반은 아득하니 어찌 저량(貯糧)하지 아니하랴.
수행이 정결한 스님을 권하고 충량한 선비를 뽑아,
명문을 돌에 새기고 땅을 점쳐 불당을 이루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마를지언정 이 서원은 어그러지지 말고,
날이 가고 달이 가더라도 이 글은 오래 빛날지라.
위로는 유정천으로부터 아래로는 금강산까지
꿈틀대는 모든 생령과 한없는 삼계(三界)가
선의 기쁜 밥을 먹고 해탈의 국을 마셔서
모두 깨달음의 길에 이르고 속히 참된 도량에 나아갈지니.
원화 8년(헌덕왕 5; 813) 계사 9월 9일 무오에 세우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二乘: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성문승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며, 연각승은 혼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대승(大乘)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기완성에 머무르고 대중구제를 소홀히 하는 소승(小乘)불교의 성자(聖者)이다. ↩
三乘: 깨달음에 이르는 세가지 실천법 또는 그러한 사람.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보살승(菩薩乘). 이 가운데 보살승은 6바라밀을 닦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 ↩
禪那: 범어(梵語) dhyāna의 음사(音寫). 줄여서 그냥 선(禪)이라고 한다. 의역은 정(定) 또는 정려(靜慮). 합쳐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수행법. 마음을 하나의 목적물에 집중시킴으로써 마음의 산란함을 막고 지혜를 몸에 모아서 진리를 꿰뚫는 수행법. ↩
三千: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략(略). 인도인의 세계관에 의하면,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둘레에 구산팔해(九山八海)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사는 하나의 소세계(小世界)이다. 위로는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에서 아래로는 땅 밑의 풍륜(風輪)까지 포함한다. 이 소세계(小世界)를 천 개 모은 것이 소천세계(小千世界)이며, 소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를 이루고, 다시 중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이룬다. 이 대천세계는 대중소(大中小)의 세 단계 천세계(千世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하나의 대천세계는 하나의 부처가 교화하는 범위이므로 이것을 일불국(一佛國)이라고 본다. ↩
安弘: 579~640. 안함(安含)과 동일인으로 추정됨. 진평왕과 선덕왕대의 신라 고승. 이찬(伊飡) 시부(詩賦)의 손자. 601년(진평왕 23) 수나라에 유학가서 5년 후에 서역승인 비마진체(毘摩眞諦), 농가타(農加陀) 및 중국승려와 함께 귀국하였다. 수(隋) 문제(文帝)의 불교치국책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황룡사에 머물면서『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였으며, 따로『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남겼다. ↩
斷俗寺: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동쪽에 있었던 사찰. 748년(경덕왕 7) 대내마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763년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선종소속이었다가 조선초기에 교종소속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폐사가 되었다. 현재 단속사지동삼층석탑(보물 72)과 서삼층석탑(보물 73) 및 최치원의 독서당이 있다. ↩
記: 현장(玄奘)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雞足石室 ~ 守法衣待慈氏”는『대당서역기』권9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권51, p.919 중-하)에서 인용.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때 제자 가운데 가섭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그에게 불법을 부탁하면서, 아울러 자신이 입던 금란가사를 미륵보살이 출세할 때까지 지니고 있다가 전해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
雞足: 계족산. 범어로는 Kukkuṭapāda-giri(屈屈吒播陀山). 또는 존족산(尊足山). 중인도 마가다국(摩揭陀國)에 있던 산. 3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현장이 갔을 무렵에는 정상에 탑이 있었다고 한다. 가섭이 여기서 입적하였음. ↩
慈父懷玉而歸 窮子得寶幾日: 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 장자(長者)의 아들이 어려서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하여 성장하면서 곤궁해졌다. 우연히 장자가 아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자식은 두려워서 또 도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장자는 계책을 세워 그를 고용인으로 삼고 점차 중용하여 마침내 자기의 친아들임을 확신시키고 일체의 재보를 주었다. 이 곤궁한 아들은 소승의 사람들을, 재보는 대승의 가르침을 비유한 것이다. ↩
韋提: 위제희부인(韋提希夫人). 비제희(毘提希), 폐제희(吠提希), 사유(思惟), 사승(思勝), 승묘신(勝妙身) 등으로도 불림. 석가모니 당시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왕후이자 아사세왕의 어머니. 아사세왕이 부왕인 빔비사라왕을 탑에 유폐하자 위제희부인이 몰래 음식물을 갖다 주었는데, 나중에 아사세왕이 어머니인 위제희부인조차 탑에 유폐시켰다.『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이 왕사성(王舍城)의 비극을 인연으로 하여 부처가 위제희의 고뇌를 제거하고자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관법(觀法)[16관] 설법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