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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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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4개가 알려졌다. 이 가운데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는 본래 함경남도(咸慶南道) 함흥군(咸興郡)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黃草嶺)(일제시기의 지명)에 있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함흥력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는 화강암으로 비석의 높이는130.3~138.2cm, 폭은 약 50.3cm이며, 두께는 32~24.5cm이다. 비문은 13행으로 행마다 약 33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부의 일부와 좌측부의 상부가 깨어져 나가고, 또 일부 글자의 판독이 어렵다. 비의 내용은 마운령비의 내용을 통하여 복원이 가능한데, 구체적으로 568년(태창(太昌) 원년)에 진흥대왕이 순수하여 돌에 새겨 그것을 기념한 사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善政)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 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 비문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와 더불어 진흥왕이 영토를 함경도 함흥지역까지 넓혔음을 알려주는 증거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태창(泰昌)이라는 연호의 사용, 6부명, 관직과 관등, 인명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사 및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문도인(沙門道人)’이나 『논어』, 『서경』 등에서 인용한 구절 등은 진흥왕대 불교와 유교사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가. 비의 현황
본 비는 원래 함경남도(咸慶南道) 함흥군(咸興郡)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黃草嶺)에 있었는데, 조선 철종 3년(1852)에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영(嶺) 아래의 중령진(中嶺鎭)으로 옮기고 아울러 지명도 진흥리(眞興里)로 고쳤다. 흔히 「황초령비(黃草嶺碑)」라고 불리지만, 황초령이 초방원(草坊院) 부근에 있기 때문에 「초방원비(草坊院碑)」라고도 불렸다.
이 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백겸(韓百謙 : 1547~1629)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이고, 『동국지리지』와 거의 같은 시기의 것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선조 때 신립(申砬)이 이 비를 탁본해 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비는 인조대에 와서 낭선군(郞善君) 우(俁 : 선조의 제12子인 仁興君 瑛의 아들; 1637~?)의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수록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제1석과 제3석만이 유존(遺存)하였다.
그 후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가, 정조 14년(1790) 장진부(長津府) 설치를 계기로 유한돈(兪漢敦)이 제1석을 다시 발견하였다(김정희는 이 비의 재발견자를 유척기(兪拓基)라고 하고 있다). 그 뒤 또다시 매몰되었다가 순조 말·헌종 초년(1835)에 함경도관찰사(咸慶道觀察使)로 나간 권돈인(權敦仁)이 제1석과 제2석을 찾아내었다. 철종(哲宗) 3년(1852)에 김정희와 학문적 인연을 가진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중령진(中嶺鎭)으로 옮기면서 각(閣)을 세우는 한편, 비의 잔편(殘片)을 벽에 박고 그 위에 김정희가 쓴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이라는 액(額)을 걸었다. 고종 광무(光武) 4년(1900) 도내(道內)의 재력가 김씨(金氏)가 비각(碑閣)을 세우고, 본 비와 윤정현이 옮긴 사실을 적은 소비(小碑), 그리고 비각중건기비(碑閣重建記碑) 등 3기(基)를 보존하였다. 현재 이 비는 함흥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비의 재료는 견치(堅緻)한 양질(良質)의 화강암을 물갈이한 것이다. 이 비는 처음 발견될 때 이미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3석은 윤정현이 진흥리로 옮길 당시 소재 불명 상태로 탁본만이 전해졌는데, 1931년에 함흥군 하기천면 은봉리(隱峰里)의 계곡에서 이 마을의 엄재춘씨(嚴在春 : 당시 18세)가 발견하여 1, 2석과 접합(接合)하였다(葛城末治, 1935). 이 단석(斷石)의 발견으로 60자에 가까운 글자가 보완되었다.
금서룡(今西龍)에 의하면 원석(原石)의 높이는 약 151.5cm 내외이고, 비석의 높이는 전면에서는 130.3cm, 후면에서는 138.2cm, 폭은 약 50cm, 두께는 상부가 32cm, 중앙부가 27.6cm, 하부가 약 24.5cm이며, 비면의 폭은 42.7cm이라고 한다.
비면에는 대략 121.2cm 정도의 난격(欄格)을 긋고 그 안에 12행, 행당 약 33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다. 서체(書體)는 김정희에 의하면 중국의 남제(南齊)와 양대(梁代)의 비(碑)나 조상기(造像記)의 것과 비슷하며, 구양순(歐陽詢)의 서체를 따랐다고 한다.
「황초령비」는 상부(上部)의 일부와 좌측부(左側部)의 상부(上部)가 깨어져 나가고, 제2석과 제3석을 접합한 부분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판독에 많은 애로점이 있으나, 나머지 글자들은 선명하다. 그런데 본 비는 같은 해에 만들어진 「마운령비」의 비문과 기본적으로 구조가 동일하고 왕을 수행(隨行)한 인물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의 글자의 상당수는 「마운령비」에 의해 추정(推定) 복원(復元)할 수 있다.
나. 건립 연대와 성격
비석의 상단부가 온전하지 않아 연대를 확정할 수 없지만, 본 비에 보이는 수가인명(隨駕人名)과 「마운령비」에 보이는 수가인명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마운령비」와 같은 해인 진흥왕 29년(56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 비의 성격은 제기(題記)부분으로 보아 진흥왕이 이 지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순수비임을 알 수 있다.
「황초령비」가 발견된 이후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조(眞興王條::TEXT)에는 신라의 동북경(東北境)이 비열홀주(碑列忽州 : 安邊)로 되어 있는데 이 비가 안변을 훨씬 넘어 함흥지역에 세워졌다고 하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일인(日人) 사학자(史學者)들 가운데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이 비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고, 지내굉(池內宏)은 이 비가 원래 철령(鐵嶺) 고개 근처에 있었는데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城)을 쌓을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마운령비」가 발견되어 이 비가 원래 이 지역에 세워진 것이 확인됨으로써 이러한 견해들은 근거를 잃고 말았다.
「황초령비」는 「마운령비」와 더불어 진흥왕대 신라의 동북경(東北境)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신라의 대외팽창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비문에 보이는 부명(部名)·관등명(官等名)·인명(人名) 등은 당시의 정치제도와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沙門道人’이나 ‘乾道’ 등의 자구는 진흥왕대의 사상(思想)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