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 시대
- 신라
- 연대
- 561년(진흥왕 22)
- 유형
- 비문
- 크기
- 높이 (가장 높은 부분) 약 300cm, (가장 낮은 부분) 115.1cm, 폭 (가장 넓은 부분) 175.7cm, 두께 30.3cm~51.5cm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 서체
- 예서(隷書)와 해서(楷書)의 중간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도지(導智)
- 지정사항
- 국보
- 연구정보
개관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4개가 알려졌다. 이 가운데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561년(진흥왕 22)에 건립한 것으로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창녕읍(昌寧邑) 교상리(橋上里)에 있으며 국보이다. 1914년에 일본인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약 300~115.1cm, 폭 175.5cm, 두께 30.3~51.5cm이다.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글자를 새긴 면만 약간 다듬었다. 글자는 16행이며, 행마다 26자 내외의 글을 새겼다. 일부 글자는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비의 내용은 561년(진흥왕 22)에 진흥왕(眞興王)과 여러 신료들이 창녕에 행차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의 앞부분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표현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拓境碑)로 이해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창녕을 순수하고 세운 기념비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왕과 신료들의 회맹비(會盟碑)로 보기도 한다. 비문에 대등(大等), 사방군주(四方軍主), 주행사대등(州行使大等), 비자벌정조인(比子伐亭助人), 촌주(村主)에 관한 정보가 소개되어 있는데, 현재 이에 근거하여 진흥왕대에 중앙의 관리들은 대등이고, 지방의 주(州)에는 군주, 행사대등 등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중고기 지방행정체계가 주-군-촌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방관으로 군주(軍主)와 당주(幢主), 도사(道使)가 파견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밖에도 중고기 6정(停)군단의 성격, 그것과 주(州)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비문에 전하며, 관등과 6부명, 그리고 촌주의 인명은 중고기 정치제도사 연구에서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노중국 | ||
판독문 | 葛城末治 | ||
판독문 | 최남선 | ||
판독문 | 今西龍 | ||
판독문 | 朝鮮金石總覽 | ||
판독문 | 김창호 | ||
판독문 | 한국고대사연구회 | ||
판독문 | 劉承幹 | ||
판독문 | 노중국 | ||
판독문 | 허흥식 |
참고문헌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논문 | 1997 | 郭丞勳, 1997, 「新羅 哀莊王代 誓幢和上碑의 建立과 그 意義」『국사관논총』74집, 국사편찬위원회 |
단행본 | 1996 | 盧鏞弼, 1996,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一潮閣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國史編纂委員會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논문 | 1991 | 한국고대사연구회, 1991, 「昌寧 眞興王巡狩碑의 調査와 判讀」『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20 |
논문 | 1991 | 김창호, 1991, 「昌寧碑 前半部 記事에 대한 분석」『古文化』39 |
논문 | 1990 | 盧鏞弼, 1990, 「新羅 眞興王 大等의 分化와 그 政治的 背景--昌寧 眞興王巡狩碑 會集人名의 大等관계 부분의 분석을 중심으로--」『歷史學報』127, 역사학회 |
논문 | 1990 | 盧鏞弼, 1990, 「昌寧 眞興王巡狩碑 建立의 政治的 背景과 그 目的--그 敎事部分의 判讀과 內容 分析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70, 한국사연구회 |
논문 | 1983 | 金昌鎬, 1983, 「新羅中古 金石文의 人名表記(Ⅰ)」『大丘史學』22, 대구사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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