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전해지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띤 단철제(鍛鐵製)의 의기(儀器)이다. 칼의 전장(全長)은 약 74.9cm로, 도신(刀身)이 65cm이며 나머지는 자루 부분이다. 도신 하부, 즉 아래에서 1 / 3 되는 지점이 오래 전부터 절단되어 있다. 도신 좌우에 3개씩의 각형(角形)의 지인(枝刃)이 칼 끝부분을 향해 서로 어긋나게 돋혀 있다. 좌우의 지인은 모두 6개라서 육차모(六叉鉾)라고 하는 별칭도 있으나, 도신까지 합해 칠지도라 불리운다.
도신의 표면과 이면에는 금상감(金象嵌)의 명문이 있는데 표면 34자, 이면 27자 총 61자이다. 철면의 녹과 상감의 박락(剝落) 때문에 해독하기가 극히 곤란하여 확실한 자는 20여 자에 불과하며, 표면 말단부의 세 글자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명문의 서체는 전체적으로는 4, 5세기 석각(石刻)에 보이는 해서(楷書)에 가까운 서체이지만 그 중에서 2, 3세기의 석문(石文)에 자주 나타나는, ‘팔분서(八分書)’의 예서(隸書)에 가까운 예서체의 문자와 행서체(行書體)의 문자가 혼효되어 있다.
명문의 내용을 보면, 표면은 기년(紀年)·재질(材質)·도명(刀銘)·길상구(吉祥句) 여부로 논란되는 부분과 제작자 또는 제작소 등이고, 이면은 백제(百濟)와 왜(倭)의 관계를 밝혀줄 수 있는 구절이다.
(2) 연구사
칠지도 명문은 1873년 석상신궁(石上神宮)의 궁사(宮司)였던 관정우(管政友)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 이후 100여 년 이상 진행되어온 연구성과를 시기별로 간단히 살펴본 후, 주제별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칠지도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대략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관정우(管政友)의 명문에 대한 소개 이후부터 1945년까지로 칠지도 명문이 학계의 학문적 연구대상이 된 시기이다. 그러나 문자의 해독에만 치우쳤을 뿐 명문의 내용에 관해서는 연호 비정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표면 맨 첫부분에 나오는 연호가 태시(泰始)인가(管政友), 태초(泰初)인가에(星野恒) 관심이 두어졌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52년조의 ‘칠지도(七枝刀)’와 동일물이라고 간주하여 칠지도를 백제(百濟)가 왜(倭)에 헌상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제2기는 1945년 이후 복산민남(福山敏男)·비본두인(榧本杜人) 등에 의해 칠지도 명문에 대한 판독과 해석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1960년대 김석형(金錫亨)이 이들의 연구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이 시기의 연구는 칠지도 연구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 전체 글자수가 61자(표면 34자, 이면 27자)로 확정되었다는 점, 둘째 명문의 연호는 태화(泰和)이며 이것은 동진(東晉) 태화(太和) 4년(369)에 해당된다고 한 점, 셋째 ‘백제(百濟)’, ‘왜왕(倭王)’ 등의 글자가 새롭게 해독됨으로써 이것이 한일관계사상의 중요 자료로 주목된 점이다. 복산(福山)·비본(榧本)에 이어 서전장남(西田長男)·삼품창영(三品彰英)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연구 결과, 칠지도는 동진 태화 4년에 백제에서 만들어 왜에 바쳤다는 백제헌상설(百濟獻上說)이 일본학계의 통설(通說)이 되었다.
일본학자들이 주도하였던 제1·2기의 연구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서, 초기조일관계사상(初期朝日關係史上)에서 칠지도를 검토한 김석형에 의해 그간의 연구는 보다 활성화되었는데, 이 제3기는 정설(定說) 재검토기라고 할 수 있다. 김석형은 3, 4세기의 일본열도내(日本列島內)에 삼한(三韓) 삼국(三國)의 분국(分國)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분국설(分國說)을 발표하면서 칠지도에 대한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로서 태화 4년은 5세기의 어느 해에 해당되며, 칠지도 표면의 후왕(侯王)은 이면(裏面)의 왜왕(倭王)과 동일인(同一人)으로 칠지도는 백제왕이 그에게 신속(臣屬)한 위치에 있던 지방왕인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의미가 된다(백제하사설(百濟下賜說)).
한편 김석형의 주장에 크게 자극을 받아 이를 비판하려는 입장에 선 율원붕신(栗原朋信)은 태화 4년을 동진의 태화 4년으로 보고 비본(榧本)의 ‘기생성진(奇生聖晉)’이라는 판독에 의거하여 성진을 동진으로 봄으로써 백제와 왜의 교섭 속에서 동진이라는 존재를 개입시켰다. 동진이 백제의 종주국(宗主國)의 입장에서 백제를 시켜 왜에게 주었다는 것이다(동진하사설(東晉下賜說). 김석형의 백제하사설과 율원(栗原)의 동진하사설은 백제헌상설이라는 기존의 정설에 재검토를 촉구함으로써 이후 칠지도의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제4기는 19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김석형·율원(栗原)의 연구 등에 힘입어 칠지도에 대한 연구의 방향도 보다 다양해지고 새로운 시각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판원의종(坂元義種)·상전정소(上田正昭) 등이 김석형의 견해를 보다 발전시켜 백제의 우위성을 강조했는가 하면, 이병도·손영종은 태화(泰和)가 백제 연호라는 설을 계승하여 그 뒤의 일진(日辰)과 결부시켜 각각 372년, 408년이라고 비정했다. 한편 산미행구(山尾幸久)는 율원(栗原)의 설을 지지하여 동진에서 만들어진 칠지도를 백제에서 입수, 글자를 새겨 다시 왜에 보냈다는 주장을 했다. 이와 아울러 연호 문제에 있어 이진희의 북위(北魏) 태화(太和) 4년(480)설도 제기되었으며, ‘기생성음(奇生聖音)’의 성음을 불교(佛敎)나(村山正雄) 도교(道敎)와(山尾幸久) 관련시켜서 살펴보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도 나타났다.
지금까지 칠지도에 관한 연구를 시기별로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이제 명문의 내용 중 논란이 되어온 부분들을 하나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칠지도의 제작 연대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연호(年號) 문제이다. 표면 맨 첫 부분에 나오는 연호에 대한 판독에 있어 그것을 태시(泰始) 또는 태초(泰初)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해당 연대는 모두 서진(西晉) 태시(泰始) 4년; 268), 복산(福山)·비본(榧本) 등의 명문에 대한 본격적인 판독이 있은 이후 태화(泰和)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물론 두번째 글자인 ‘화(和)’자가 분명하게 판독되지는 않지만 ‘화(禾)’편만은 확실하다는 입장에서 많은 연구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태화 4년이라 할 때도 이것이 과연 어느 나라, 어느 시기의 연호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복산(福山) 이래 대부분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를 동진의 태화(太和)에 비정하여 태화 4년은 369년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369년에 칠지도가 제작되어,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52년조의 기사처럼 372년 일본에 헌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석형이 태화(泰和)는 중국에 없는 연호이고 일본에서는 7세기에나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백제의 연호일 수밖에 없으며, 태화 4년은 5세기의 어느 해일 것이라고 추정한 이래 대부분의 한국인 연구자들은 삼국시대 금석문 가운데 중국 연호뿐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예도 있기 때문에 백제의 연호로 볼 수 있다고 했다(이도학은 동진 연호로 봄). 태화가 백제 연호라고 보는 견해 중에서도 연대 비정에 있어서는 근거하는 바가 각각 달라 이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기사와 관련시켜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 연호(372)로 보거나(이병도), 뒤의 월·일(月·日)과 일진(日辰)에 부합되는 연대를 찾는 과정에서 408년(전지왕 4)으로 보는 입장이 제기되었다(손영종). 한편 이진희는 표면의 ‘후왕(侯王)’이라는 명문을 백제의 왕·후(王·侯)제도의 성립과 관련시켜 이를 북위의 태화(太和) 4년(480)에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472년 고구려의 백제 침입시 개로왕의 구원 요청을 북위가 거절한 것을 볼 때 과연 백제에서 북위의 연호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 연호 문제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 한 명문 전반에 걸친 정황 판단에 의존할 수박에 없는데 그것이 중국 연호냐, 백제 연호냐 하는 차원을 떠나 칠지도 자체의 금상감 기술과 같은 제작 기법이나 서체, 전체 명문의 내용과 관련시켜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 올바를 듯하다.
다음은 월․일(月․日)과 일진(日辰) 부분이다. “□월 십□일 병오정양(□月 十□日 丙午正陽)”의 ‘□월(□月)’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6, 5, 4, 정월설이 제기되었는데 처음에는 ‘육(六)’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시되다가 복산(福山) 이후 대체로 ‘오(五)’로 읽혀 왔다. ‘□일(□日)’에 해당하는 부분 또한 종래 ‘일(一)’로 읽혀 오다가 현재는 대부분 ‘육(六)’으로 읽힌다. 날짜와 일진(日辰)이 불일치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병오일(丙午日)은 작주(作鑄)의 길일(吉日)로서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실제의 일진(日辰)일 필요는 없다고 보아 앞의 연호와는 전혀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병오(丙午)라는 일진(日辰)이 단순한 길상구(吉祥句)가 아니라 실제 일진(日辰)이라고 판단하여 앞 연호와 관련시킨 연구도 있다. 5월 13일로 판독을 하고, 또 5월 16일의 일진(日辰)은 병오가 아니라 을미(乙未)에 해당되기 때문에 칠지도가 제작된 4~5세기경 5월 13일이 병오일로 되는 해는 408년(전지왕 4)으로서 전지왕이 즉위년에 태화(泰和)로 건원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손영종). 또 이를 5월 11일로 읽어 이것이 병오일에 해당되는 해는 북위의 태화 4년(480)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 이 구절이 길상구냐 아니냐의 여부는 다른 경명(鏡銘)이나 도검명(刀劍銘) 등과 비교해서 판단을 내려야겠지만, 무조건 길상구로 치부해버리는 데서 벗어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다른 금석문에서 일진(日辰)의 중요성이 비교적 크기 때문에 일진(日辰)을 가지고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칠지도 제작 주체, 더 나아가 칠지도의 전체적 성격과 관련하여 “의ᚐ공후왕(宜ᚐ供侯王)”이라는 문구가 주목된다. ‘의(宜)’ 다음 자에 대해 복(復), 공(供) 등의 설이 제기되었지만 복산(福山)·비본(榧本) 이후 ‘공공(供供)’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일본학자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와 관련시켜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봉헌, 즉 ‘바친다’는 의미로 보지만, 공(供)은 ‘준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공’을 형용사로 보아 ‘공공(恭恭)’의 의미로 해석하는 설도 제기되었다. 이 문구는 후왕의 성격을 단순한 길상구냐, 아니면 백제에 실재(實在)한 제도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실재의 제도로 본다면 이면의 백제왕·왜왕이라는 문구와 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할 듯하다. 따라서 백제왕이 왜왕에 대해서는 적어도 동격(同格) 이상의 존재임이 확인되는 것이다.
왜왕이라는 구절에 대해 백제헌상설의 입장에서는 이를 금석문에서 신분이 높은 고위고관(高位高官)이나 부귀한 사람을 뜻하는 상용(常用)의 길상구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만, 백제하사설이나 동진하사설에서는 이를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나타내는 신분질서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석형이 이면의 왜왕과 후왕을 동일시하여 왜왕은 백제왕의 신하된 지방왕이라고 한 이래 그의 견해를 계승한 상전(上田)이 태화 4년(369) 단계에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칭했던 것이라 했으며, 판원(坂元)에 의해 후왕이라는 존재가 백제국제하(百濟國制下)에 있어서의 일종의 관작, 신분질서로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라 주장되었다. 특히 판원(坂元)은 본래 후왕이라는 것은 백제왕 아래 각지에 배치된 왕·후·태수제(王·侯·太守制)의 일환으로 파악되어야 할 존재라고 보았다. 김석형의 견해에 대해 3~5세기 백제왕이 천자를 자임(自任)한 사료적 근거도 없고 5세기 말까지 왜왕이 백제왕에게서 천자(天子)-신속후왕(臣屬侯王)의 처우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반론을 펴기도 하지만(村上), 백제-왜 사이에 이런 신속(臣屬) 관계는 없었다 하더라도 백제가 천자국으로 자처하면서 중국의 후왕격(侯王格)에 해당하는 왜왕을 자신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썼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진희는 후왕을 왕·후·태수제(王·侯·太守制)와 연결시켜 그것이 성립된 시기는 5세기 중반경이라는 입장에서 태화 4년을 480년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한편 동진하사설 또한 후왕과 왜왕을 동일시하기는 하지만 칠지도 작성의 주체로서 동진이라는 존재를 상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후왕(侯王) 문제는 당시 후왕이라는 것이 백제의 지명+왕·후·태수제(王·侯·太守制)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검토해야 하는데, 왕·후·태수제가 문헌사료상으로는 5세기 중·후반에 확인되고 지방지배의 한 형식으로서 기능했다고 해도 그것의 선구적인 형태는 보다 이른 시기에 동아시아 제국(諸國)의 세력관계 속에서 기능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음은 이면의 “백제ᚐ세ᚐ기생성음(진) 고위왜왕지조(百濟ᚐ世ᚐ奇聖音(晉) 故爲倭王旨造)”의 문제이다. 제(濟)는 자(滋)로 판독이 되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백제라 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세(世)’자 앞 글자는 ‘왕(王)’자로 추정되며, ‘세(世)’자 다음의 글자도 불분명한데, 대체로 ‘자(子)’로 보는 듯하다.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 부분은 ‘백제왕과 세자’ 또는 ‘백제왕의 세자’로 해석되는데, 백제왕과 세자라고 볼 때 왕은 근초고왕(近肖古王), 세자는 그의 자(子)인 귀수(貴須)가 된다. 가장 문제되는 부분은 역시 ‘기생성음(奇生聖音)’의 마지막 글자가 ‘음(音)’이냐 ‘진(晉)’이냐의 문제이다. 복산(福山)이 ‘성음(聖音)’으로 판독한 이후 대체로 ‘성음(聖音)’설을 지지하여 이것을 불교 또는 도교와 관련시켜 보기도 하고, 기생(奇生) 또는 기생성음(奇生聖音) 전체를 인명(人名)으로 보기도 한다. 인명으로 보는 경우는 기생성음(奇生聖音) 전체가 귀수왕(貴須王)의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와(西田) 기생(奇生)은 귀수(貴須)․구수(仇首)의 통음차(通音借)이고 성음(聖音)은 경칭적(敬稱的)인 의미의 인명(人名) 어미(語尾), 또는 セシム(왕자)를 의미하는 경어(敬語)로서 귀수왕자(貴須王子)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三品). 그러나 앞에 왕세자(王世子)라고 밝히고 있는데, 또 다시 왕자(王子)라는 의미의 경칭어미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 비본(榧本)의 성진(聖晉)이라는 판독과 태화가 동진 연호라는 것을 근거로 칠지도의 배경에 동진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성진(聖晉)으로 비정하여 “생(生)을 성진(聖晉)에 의존하는 까닭에”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판독상으로는 “백제왕세자기생성음(百濟王世子奇生聖音)”이 가장 타당할 듯한데, 성음(聖音)을 관음(觀音) 등의 용법에도 보이는 것처럼 특수한 불교 용어로 보아 불타(佛陀)의 소리, 석존(釋尊)의 은택(恩澤) 등으로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기생성음(奇生聖音)을 구체적인 인명으로 볼 것이냐가 다시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성음(聖音)을 불교와 관련시켜 보는 견해에 대해 불교 신봉 전의 백제가 이런 용어를 사용했겠느냐 하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최근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소수림왕대(372)보다 훨씬 앞선 4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점을 감안할 때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도 침류왕대에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정도는 지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기생성음(奇生聖音)에 대한 해석은 “고위왜왕지조(故爲倭王旨造)” 문구의 해석과도 관련이 된다. 기생(성음)(奇生(聖音))을 인명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왜왕체(倭王替)(지(旨))’로 읽어 왜(倭)의 오왕(五王)의 최초에 위치한 찬(讚)일 것이라고 보고 이를 응신천황(應神天皇)에 비정한 것이 대표적이다(서전(西田)). 또 ‘왜왕지(倭王旨)’를 ‘왜왕의 뜻’으로 해석하여 왜왕의 명령 내지 희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봄으로써 백제헌상설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지(旨)’는 형용사에서 부사로 전화한 것으로 ‘지조(旨造)’는 정제(精製 : 정교하게 만들다)·교조(巧造 : 교묘하게 만들다)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 제기되어 주목된다. 이는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는 평등한 것으로 칠지도는 하사품도 헌상품도 아닌, 백제에서 왜국에 보내준 증품(贈品)이라는 입장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칠지도가 의례적(儀禮的)인 주구(呪具)라는 점을 감안할 때 명문의 내용상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은 일단 주목된다. ‘조(造)’ 앞의 글자를 부사로 보는 것은 수전(藪田)의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칠지도 명문 자체를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 무렵의 위작(僞作)으로 보는 그는 ‘지(旨)’가 아니라 ‘경(敬)’으로 판독하여 “왜왕의 은혜 때문에 경조(敬造)해서”라고 해석하기는 했지만, ‘지(旨)’자를 반드시 명사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제시한 점에서 상당히 시사적이다.
마지막으로 칠지도 명문의 표면과 이면의 관계를 보기로 하자. 동진하사설과 백제하사설 주장자들이 표면과 이면을 관련시키기 전까지 초기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칠지도 명문의 표면과 이면은 독자적인 내용을 가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표면의 명문은 불특정인(不特定人)에 대한 일반적·형식적인 문장으로 상투적인 길상구(吉祥句)가 관철되어 있는 데 반해 이면에는 칠지도 제작 주체의 특수 구체적인 의도가 표현되어 있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 후 동진하사설이나 백제하사설 주장자들이 표면의 태화(泰和)와 이면의 성음(聖音), 표면의 후왕(侯王)과 이면의 왜왕(倭王)을 관련시켜 백제와 왜의 관계를 특수한 역사적 관계 속에서 규정지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에 대해 표면의 명문은 경명(鏡銘)·도명(刀銘) 일반에 공통된 상용어구(常用語句)의 연철(連綴)에 불과하고, 이면의 명문은 이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실질적 내용, 즉 제(濟)·왜(倭) 양왕(兩王) 통교(通交)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神保公子). 또 한편 칠지도에 있어 동진의 개입설을 계승하여 동진제의 원칠지도(原七支刀)를 상정하기도 한다. 즉 원칠지도는 불특정인에 대해 상용의 길상어를 연철한 표면의 명문만을 가진 것이었는데 이면의 명문은 백제에서 이것을 방제(倣製)할 때 왜왕에게 사여할 목적으로 해설적(解說的)인 칠지도 연기문(緣起文)을 첨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했던 것이다(山尾幸久).
칠지도 명문은 그 자체로 체재(體裁)를 갖춘 완결된 문장으로 표면과 이면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이면의 ‘차도(此刀)’가 표면의 칠지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점, 표면이 비록 길상구의 연철(連綴)이라고 할지라도 이면의 왜왕(倭王)이 표면의 후왕(侯王)에 해당하는 존재인 점 등을 볼 때 이면의 문장이 표면의 문장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칠지도에 대한 그간의 연구성과를 시기별, 주제별로 개관해 보았는데 칠지도에 대해서는 명문(銘文)만이 아니라 서체(書體)·형상(形狀)·금상감(金象嵌)기술 등의 제작기법과 그것의 용도 등에 대해서도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칠지도가 학문적 연구 목적으로 좀 더 공개될 필요가 있으며 보다 과학적인 연구방법도 도입되어야 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