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이색묘지(李穡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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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석은 문헌 서원 부근에 있다. 처음 비석은 세종 15년(1433년)에 세웠으나, 조선 현종 7년 병오에 다시 세웠다. 처음 비문의 찬자는 하륜(河崙)인데,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은 공부(孔俯)라고 한다. 제액을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다시 세울 때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목은선생비음기(牧隱先生碑陰記)」를 첨가하였다. 본문의 글씨는 이색의 12대손 이수경(李壽慶)이 썼고,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하륜이 지은 묘지명은 『동문선』 제129권에 「유명 조선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목은선생 이문정공 묘명 병서(有明朝鮮國 特進輔國崇祿大夫 韓山伯 牧隱先生 李文靖公 墓銘幷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문헌 서원은 이곡과 이색 등을 배향하기 위해 조선 선조 27년(1594년)에 세워졌고 161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문헌 서원에는 『목은문집』과 『가정문집』이 보관되어 있고, 영당에는 목은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문헌 서원은 1969년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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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민
고려 문하시중 목은 선생 이공 신도비명(高麗 門下侍中 牧隱先生 李公 神道碑銘) [전액(篆額)]
유원 고려국 목은선생 신도비명 병서(有元高麗國 牧隱先生 神道碑銘幷序)
하공[하륜(河崙)]의 옛 글은 「유명조선국 원선수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 본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시문정공 이공 신도비(有明朝鮮國 元宣授 朝列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 本國 特進輔國崇祿大夫 韓山伯 諡文靖公 李公 神道碑)」라 되어 있으나. 지금 고친다.
문인 분충장의정란정사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겸판상서사사 수문전대제학 감춘추관사 영경연서운관사 진산부원군 하륜(門人 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政丞 判吏曹事 兼判尙瑞司事 修文殿大提學 監春秋館事 領經筵書雲觀事 晉山府院君 河崙) 찬(撰)
중국의 진사(進士)로서 이학(理學)을 동방에서 처음 제창하여 동방을 울리고 벼슬이 왕국(王國)의 상상(上相)에까지 이른 사람은 한산(韓山) 목은선생(牧隱先生)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성산(星山) 초은선생(樵隱先生)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더불어 예위(禮圍, 과거 시험장)를 맡았을 때, 윤(崙)은 재주가 없는 몸이지만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제자의 예를 잡은 지가 30여년이 되었다. 공이 졸했으나 직무로 인하여 나아가 영위에 울지 못하였으므로 여태까지 슬픔이 잊히지 않더니, 이제 그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한다. 윤(崙)은 사실 아마도 그 덕과 아름다움을 형용하지 못하겠지만, 의리에 비추어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다. 대대로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조부 자성(自成)은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증직받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賛成事)를 증직하였다. 아버지 휘 곡(穀)은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지내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賛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를 하였다. 호는 가정(稼亭)이고, 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원통(元統) 계유년에 실시한 제과(制科)에서 합격하여 시와 문이 일시에 높아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원나라 요양현군(遼陽縣君)이요, 본국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다.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의 날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비할 바 없이 영오(穎悟)하여, 글을 읽으면 문득 외웠다. 지정 신사년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나이가 14세였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공이 예에 따라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보(補)해지매,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다. 경인년에 가정(稼亭)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음해 정월에 졸하자, 공이 분상하여 상기를 끝까지 지켰다. 계사년 여름에 본국 예부(禮部)의 고시에 으뜸으로 합격하고,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었다. 가을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향시(鄕試)에 제1로 합격하였다. 갑오년 봄에 경사(京師)에서 회시(會試)를 볼 때 전(殿) 뜰에서 대책(對策)을 바쳐 크게 독권관(讀卷官)의 칭도를 받아서, 제2 갑(甲) 제2명 급제(及第)에 합격되었다. 이로써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칙임(勅任)하였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오자 왕이 각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취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필도치(王府必闍赤)가 되었다가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올랐다. 이로부터 본국의 관직을 제수(除授)받을 때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다.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본원(本院)의 예임(禮任)을 맡았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었다.
공은 천하가 어지럽게 됨을 보고 어머니가 늙었음을 칭탁(稱託)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 본국이 관제(官制)를 고치자,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으로써 문무(文武)의 선(選)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여덟 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정방(政房)을 없애고 이부(吏部)와 병부(兵部)를 뽑는 제도를 되살리려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정유년에 국자재주(國子祭酒)의 고시를 맡고, 지합문(知閤門)으로 왕부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옮겼다. 무술년에 동료들이 모두 나라 일을 말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미움을 입어 좌천이 되었다. 이 때, 왕은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 사람들에게 비할 수 없다.” 하고는,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승진시켰다. 여러 번 직임을 옮겨서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기밀(機密)에 참여한 지 무릇 7년에 계옥(啓沃, 군왕을 개도함)함이 실로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왕이 남으로 거둥을 하게 되었을 때, 공이 왕을 좇아 호위하고 협찬해서 능히 수복(收復)의 공을 이룩하여, 훈일등(勳一等)에 책정되고 철권(鐵卷)을 받았다. 계묘년 원나라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주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단성보리공신(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端誠保理功臣)의 호를 주었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을사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써 수협역서(搜挾易書, 과거장에 들어갈 때 소지품을 수색하는 일과 시험 답안지를 다른 글씨로 써서 신원을 모르게 하는 일)의 법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정미년 원나라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다. 무신년에 판개성 겸성균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이때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成均館)을 다시 창건하고는, 일대에 경술(經術)이 있는 자를 골라서 나누어 생도를 가르치게 하되, 모두 다른 벼슬에 있으면서 학관을 겸하게 하였던 것이다. 공이 날마다 여러 학관으로 더불어 나누어 가르친 뒤에 서로 토론하고 변석도 해서 해가 저물도록 일체 게으름이 없었다. 이에 학자들이 옛 습속을 바꾸어 유풍(儒風)이 한결같이 새로워졌다. 그 해 여름에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에게 육경(六經)의 뜻을 시험하여 급제(及第) 7명을 뽑을 제, 공으로 하여금 독권(獨卷, 채점)을 하게 하였다. 기유년 또 동지공거가 되어 삼장통고(三場通考, 과거 시험 때 초장, 중장, 종장을 둠)의 법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왕이 듣고 시행하였다.
처음에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 동쪽 언덕에 세우자고 하였으나, 그 땅이 협소하다 하여 다시금 마암(馬巖) 서쪽 땅을 살펴보았다. 그 땅이 너무 굉장하였으므로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은 글을 올려 중지할 것을 청했다. 왕이 노하여 유탁 등을 옥에 가두어 죽이려 하여 공으로 하여금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공이 그 죄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왕은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게다가 법으로 볼 때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근일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影殿) 건립의 역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비록 이것으로 죄를 준다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이 죄를 받는 것은 글을 올렸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왕께서는 생각하소서.” 왕이 더욱 노하여 글 짓도록 재촉하기를 더욱 급히 하였다. 공이 엎드려 여쭙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고의로 만들어서 그 죄를 얽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비(定妃)의 궁(宮)에 옮겨 거처하고는 조석을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 행신(幸臣) 신돈(辛旽)이 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왕에 청해서 공을 하옥(下獄)할 것을 청하고 왕명을 따르지 않는 죄명을 주려 하였다.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외람되게 위의 알아주심을 입어서 포의(布衣)에서 발신하여 달관(達官)에까지 이르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임금의 덕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개진(開陳)하여 숨김이 없으려 하였다. 그런데 이제 왕께서 유시중(柳侍中)을 죽이려 하시는데, 내가 감히 극진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만 왕의 이름이 천하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게 되실까 두려워해서였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그 말을 갖추어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이 드디어 깨닫고 유탁 등을 방출시켰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공에게 말하기를, “명일에 목욕하고 조정에 들면 내가 장차 사과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왕이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신해년(1371년)에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그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공신호를 더하여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賛化)라 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들일 때마다 반드시 주위를 깨끗이 하고 향을 태우고는, 말하기를,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역시 그 짝이 드무니,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9월에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이듬해(1372년) 6월에 왕명으로 본직(本職)에 기복(起復)하도록 하매, 공이 힘껏 사퇴하였다. 계축년(1373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갑인년(1374년) 가을에는 왕이 훙하였다. 공은 요양현군(遼陽縣君)이 졸한 뒤에 슬픔을 표시하느라 몸이 훼손되어 병을 얻었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정사년(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輔節同德賛化)의 호가 내리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1382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계해년(1383년)에 다시 한산군에 봉하였고, 갑자년(1384년)에 부원(府院)을 더하였으며, 을축년(1385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옮겼다. 병인년(1386년)에 또 지공거가 되었다. 공이 무릇 다섯 차례나 고시를 맡아서 명사를 뽑은 바가 많았다.
무진년(1388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두고자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사를 내어 요(遼)를 치려하였다. 그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義)를 들어 군사를 돌려 최영의 무리를 잡아 물리치고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이제 국가에 틈이 생겼는데, 왕은 어려서 친히 조회할 수 없으므로, 집정(執政)한 자가 마땅히 가야 할 것입니다. 노신(老臣)이 감히 자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들었다 하여 굳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국은을 받은 바가 지극히 도타우므로 늘 죽음으로써 갚고자 하였습니다. 실로 나라의 명(命)을 천자(天子)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비록 죽어도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고는 곧 명나라에 가서 상세히 주달하였다.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특례로서 대우하여 은총을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1389년) 여름에 귀국하여 가을에 병으로 번무(繁務)를 풀어 줄 것을 청하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한 뒤, 공이 자기게 붙지 않음을 미워하는 자가 공을 탄핵해서 장단현(長端縣)에 안치되었다가, 경오년(1390년) 4월에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
5월에 유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 등 몇 10명을 청주(淸州)에 가두어 장차 준법(峻法)을 쓰려하여 죄목을 꾸미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정의와 천명으로 자처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하늘에서 별안간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성문이 파괴되고 관사가 다 잠기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붙잡아 겨우 화를 면할 정도였다. 역마를 달려 이를 나라에 보고하니, 모두 놓아 보내라고 허락하였다. 청주의 부로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고을이 있은 뒤로 이런 극심한 수재가 없었다. 이것은 공 등의 일에 원한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본래부터 공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여러 차례 소환하려 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이 문득 배척하였다. 신미년(1391년) 겨울에 공이 함창(咸昌)으로부터 소환되어 와서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다. 임신년(1392년) 4월에 다시 금주로 귀양갔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이배되었다.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조선 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무고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망령되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 감히 무복(巫服)할 수 있겠는가? 죽어서는 바른 귀신이 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조정에 들리매, 왕이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에 옮기었다. 공과 동시에 귀양간 자들도 공의 힘을 입어 많이들 보전되었다.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을해년(1395년) 가을에는 관동(關東)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대로 거기에 머물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옛 친구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공이 뵙고 물러 갈때는 반드시 중문까지 나와서 보내었다.
병자년(1396년) 여름 5월에 공이 여강(驪江)에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다. 5월 7일에 병이 위급하게 되었는데, 어떤 중이 와서 자신들의 도(道)인 불법(佛法)을 설하려 하였다. 공은 사절하여, “사생의 이치에 대해서는 내 이미 의혹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곧 졸하니, 나이 69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왕이 반찬을 감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와 장사를 예(禮)로써 행하였다. 그리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관구를 모시고 한주로 돌아와, 11월 갑인일에 가지원(加智原)에 장사하였다.
공은 자품이 청수(淸粹)하고 학문이 정민(精敏)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받들어 벽옹(辟雍, 성균관)에 들어갔다. 문학이 넓고 행검이 돈독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힘썼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는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으로써 자기의 책무로 삼으매,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나라의 사명(辭命)을 맡은 것이 몇 10년이 되었지만, 늘 조정의 칭도를 받았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붓을 잡으면 곧 쓰되, 글과 이치가 정도(精到, 지극히 정밀함)하여 일시에 절묘(絶妙)하였다. 문집(文集) 55권을 남겼다. 초은(樵隱)이 박학하고 감식(監識)이 있어서 선배를 논하더라도 칭도함이 적었으나, 오직 공에게대해서는 감탄하여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天才)로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상시 사람을 맞이하고 외물을 접함에 있어서 혼연하여 일단의 화기(和氣)가 감돌았으며, 벼슬을 하여 정무를 처리할 때는 의논이 절실하고 명확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지니기에 힘쓰고, 조금도 명예에 가깝게 하는 누가 없었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아 간단한 식사 끼니조차도 비록 여러 차례 결핍되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하게 지내어, 때때로 산수(山水)를 접하여 놀면서 스스로 소일을 하였다. 방외(方外, 주로 불교)의 사람이라도 종유(從遊)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구사하는 자가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공이 이단(異端)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기롱을 하였으나, 공과 같은 달리(達理)한 밝음으로서 어찌 환망(幻妄)의 설이 족히 믿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가 역책(易簀, 돌아가심)할 때의 한 마디 말을 보아서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 영가(永嘉) 권씨(權氏)는 원나라 명위장군(明威將軍)이며 우리나라 화원군(花原君)인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나라 태자좌찬선(太子左賛善)이며 우리나라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인 한공(漢功)의 손녀이다.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지켜 살림의 있고 없는 문제로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 지밀직사사(推誠翊衛功臣知密直司事)였다. 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였으며, 병진년 과거에 올라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았다.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그 다음 종선(種善)은 사헌집의(司憲執義)로 임술년 과거에 올랐다. 지밀직(知密直)의 아들은 넷인데, 맏아들 맹유(孟㽥)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요, 다음 맹균(孟畇)은 예문직제학(藝文直提學)으로 을축년 과거에 올랐으며, 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직장(司僕直長)이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簽書)는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사재소감(司宰小監)이요, 다음 숙규(叔畦)는 사수주부(司水注簿)요, 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副司直)이요, 다음 숙묘(叔畝)는 공조의랑(工曹義郞)이요, 다음은 숙복(叔福)이요, 다음은 숙치(叔畤)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집의는 아들이 셋인데, 맏아들은 계주(季疇)요, 둘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한(韓, 청주)의 영재로서,
가정(稼亭)을 보익하였도다.
패옥 같은 그의 문장으로,
중국 황제의 뜰에서 대책(對策)으로 급제했네.
아, 빛나는 문정공(文靖公)이,
실로 경(經)을 전하였도다.
일찍이 벽옹(성균관)에 들어가
그 향기를 크게 풍기었고,
나란히 을과(乙科)에 합격하고
차례로 옥당 벼슬에 올랐네.
그 울림 더욱 커서,
국가의 빛이었더니,
거두어 동국으로 돌아와서
온 나라에 스승이 뒤었네.
의리에 정미하여,
위로 정자(程子)ㆍ장자(장횡거)를 이었고,
문장이 고고하여,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을 내리 보았네.
도가 몸에 쌓이어서,
처사함이 안상(安詳, 평온하고 온화함)하였고,
덕은 나이와 함께 높고,
위(位)는 암랑(巖廊, 조정)에 으뜸이었네.
사명을 받들어 전대(專對, 사신으로 나감)하여,
천자에게 존경받고,
돌아오자 한가함을 빌었으니,
진퇴(進退)가 다 옳았도다.
다만 시세(時勢)가 어렵고
하늘 뜻은 아득하기만 하였도다.
이래도 재액을 밟아 접질리매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네.
태산이 무너졌나니,
길 가던 사람도 눈물 뿌리는구나.
아, 선생이시어,
그 덕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자손이 뒤를 이어
복록이 다하지 않으리다.
나의 명이 아첨 없으니
먼 앞날에도 보리이다.
고려 문하시중 목은 선생 이공 신도비명(高麗 門下侍中 牧隱先生 李公 神道碑銘) [전액(篆額)]
유원 고려국 목은선생 신도비명 병서(有元高麗國 牧隱先生 神道碑銘幷序)
하공[하륜(河崙)]의 옛 글은 「유명조선국 원선수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 본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시문정공 이공 신도비(有明朝鮮國 元宣授 朝列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 本國 特進輔國崇祿大夫 韓山伯 諡文靖公 李公 神道碑)」라 되어 있으나. 지금 고친다.
문인 분충장의정란정사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겸판상서사사 수문전대제학 감춘추관사 영경연서운관사 진산부원군 하륜(門人 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政丞 判吏曹事 兼判尙瑞司事 修文殿大提學 監春秋館事 領經筵書雲觀事 晉山府院君 河崙) 찬(撰)
중국의 진사(進士)로서 이학(理學)을 동방에서 처음 제창하여 동방을 울리고 벼슬이 왕국(王國)의 상상(上相)에까지 이른 사람은 한산(韓山) 목은선생(牧隱先生)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성산(星山) 초은선생(樵隱先生)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더불어 예위(禮圍, 과거 시험장)를 맡았을 때, 윤(崙)은 재주가 없는 몸이지만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제자의 예를 잡은 지가 30여년이 되었다. 공이 졸했으나 직무로 인하여 나아가 영위에 울지 못하였으므로 여태까지 슬픔이 잊히지 않더니, 이제 그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한다. 윤(崙)은 사실 아마도 그 덕과 아름다움을 형용하지 못하겠지만, 의리에 비추어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다. 대대로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조부 자성(自成)은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증직받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賛成事)를 증직하였다. 아버지 휘 곡(穀)은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지내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賛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를 하였다. 호는 가정(稼亭)이고, 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원나라 지배하의 조정에서 원통(元統) 계유년에 실시한 제과(制科)에서 합격하여 시와 문이 일시에 높아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원나라 요양현군(遼陽縣君)이요, 본국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다.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의 날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비할 바 없이 영오(穎悟)하여, 글을 읽으면 문득 외웠다. 지정 신사년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나이가 14세였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공이 예에 따라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보(補)해지매,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다. 경인년에 가정(稼亭)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음해 정월에 졸하자, 공이 분상하여 상기를 끝까지 지켰다. 계사년 여름에 본국 예부(禮部)의 고시에 으뜸으로 합격하고,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었다. 가을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향시(鄕試)에 제1로 합격하였다. 갑오년 봄에 경사(京師)에서 회시(會試)를 볼 때 전(殿) 뜰에서 대책(對策)을 바쳐 크게 독권관(讀卷官)의 칭도를 받아서, 제2 갑(甲) 제2명 급제(及第)에 합격되었다. 이로써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칙임(勅任)하였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오자 왕이 각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취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필도치(王府必闍赤)가 되었다가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올랐다. 이로부터 본국의 관직을 제수(除授)받을 때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다.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본원(本院)의 예임(禮任)을 맡았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었다.
공은 천하가 어지럽게 됨을 보고 어머니가 늙었음을 칭탁(稱託)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 본국이 관제(官制)를 고치자,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으로써 문무(文武)의 선(選)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여덟 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정방(政房)을 없애고 이부(吏部)와 병부(兵部)를 뽑는 제도를 되살리려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정유년에 국자재주(國子祭酒)의 고시를 맡고, 지합문(知閤門)으로 왕부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옮겼다. 무술년에 동료들이 모두 나라 일을 말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미움을 입어 좌천이 되었다. 이 때, 왕은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 사람들에게 비할 수 없다.” 하고는,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승진시켰다. 여러 번 직임을 옮겨서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기밀(機密)에 참여한 지 무릇 7년에 계옥(啓沃, 군왕을 개도함)함이 실로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왕이 남으로 거둥을 하게 되었을 때, 공이 왕을 좇아 호위하고 협찬해서 능히 수복(收復)의 공을 이룩하여, 훈일등(勳一等)에 책정되고 철권(鐵卷)을 받았다. 계묘년 원나라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주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단성보리공신(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端誠保理功臣)의 호를 주었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을사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써 수협역서(搜挾易書, 과거장에 들어갈 때 소지품을 수색하는 일과 시험 답안지를 다른 글씨로 써서 신원을 모르게 하는 일)의 법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정미년 원나라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다. 무신년에 판개성 겸성균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이때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成均館)을 다시 창건하고는, 일대에 경술(經術)이 있는 자를 골라서 나누어 생도를 가르치게 하되, 모두 다른 벼슬에 있으면서 학관을 겸하게 하였던 것이다. 공이 날마다 여러 학관으로 더불어 나누어 가르친 뒤에 서로 토론하고 변석도 해서 해가 저물도록 일체 게으름이 없었다. 이에 학자들이 옛 습속을 바꾸어 유풍(儒風)이 한결같이 새로워졌다. 그 해 여름에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에게 육경(六經)의 뜻을 시험하여 급제(及第) 7명을 뽑을 제, 공으로 하여금 독권(獨卷, 채점)을 하게 하였다. 기유년 또 동지공거가 되어 삼장통고(三場通考, 과거 시험 때 초장, 중장, 종장을 둠)의 법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왕이 듣고 시행하였다.
처음에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 동쪽 언덕에 세우자고 하였으나, 그 땅이 협소하다 하여 다시금 마암(馬巖) 서쪽 땅을 살펴보았다. 그 땅이 너무 굉장하였으므로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은 글을 올려 중지할 것을 청했다. 왕이 노하여 유탁 등을 옥에 가두어 죽이려 하여 공으로 하여금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공이 그 죄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왕은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게다가 법으로 볼 때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근일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影殿) 건립의 역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비록 이것으로 죄를 준다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이 죄를 받는 것은 글을 올렸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왕께서는 생각하소서.” 왕이 더욱 노하여 글 짓도록 재촉하기를 더욱 급히 하였다. 공이 엎드려 여쭙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고의로 만들어서 그 죄를 얽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비(定妃)의 궁(宮)에 옮겨 거처하고는 조석을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 행신(幸臣) 신돈(辛旽)이 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왕에 청해서 공을 하옥(下獄)할 것을 청하고 왕명을 따르지 않는 죄명을 주려 하였다.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외람되게 위의 알아주심을 입어서 포의(布衣)에서 발신하여 달관(達官)에까지 이르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임금의 덕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개진(開陳)하여 숨김이 없으려 하였다. 그런데 이제 왕께서 유시중(柳侍中)을 죽이려 하시는데, 내가 감히 극진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만 왕의 이름이 천하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게 되실까 두려워해서였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그 말을 갖추어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이 드디어 깨닫고 유탁 등을 방출시켰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공에게 말하기를, “명일에 목욕하고 조정에 들면 내가 장차 사과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왕이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신해년(1371년)에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그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공신호를 더하여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賛化)라 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들일 때마다 반드시 주위를 깨끗이 하고 향을 태우고는, 말하기를,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역시 그 짝이 드무니,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9월에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이듬해(1372년) 6월에 왕명으로 본직(本職)에 기복(起復)하도록 하매, 공이 힘껏 사퇴하였다. 계축년(1373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갑인년(1374년) 가을에는 왕이 훙하였다. 공은 요양현군(遼陽縣君)이 졸한 뒤에 슬픔을 표시하느라 몸이 훼손되어 병을 얻었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정사년(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輔節同德賛化)의 호가 내리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1382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계해년(1383년)에 다시 한산군에 봉하였고, 갑자년(1384년)에 부원(府院)을 더하였으며, 을축년(1385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옮겼다. 병인년(1386년)에 또 지공거가 되었다. 공이 무릇 다섯 차례나 고시를 맡아서 명사를 뽑은 바가 많았다.
무진년(1388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두고자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사를 내어 요(遼)를 치려하였다. 그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義)를 들어 군사를 돌려 최영의 무리를 잡아 물리치고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이제 국가에 틈이 생겼는데, 왕은 어려서 친히 조회할 수 없으므로, 집정(執政)한 자가 마땅히 가야 할 것입니다. 노신(老臣)이 감히 자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들었다 하여 굳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국은을 받은 바가 지극히 도타우므로 늘 죽음으로써 갚고자 하였습니다. 실로 나라의 명(命)을 천자(天子)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비록 죽어도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고는 곧 명나라에 가서 상세히 주달하였다.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특례로서 대우하여 은총을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1389년) 여름에 귀국하여 가을에 병으로 번무(繁務)를 풀어 줄 것을 청하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한 뒤, 공이 자기게 붙지 않음을 미워하는 자가 공을 탄핵해서 장단현(長端縣)에 안치되었다가, 경오년(1390년) 4월에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
5월에 유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 등 몇 10명을 청주(淸州)에 가두어 장차 준법(峻法)을 쓰려하여 죄목을 꾸미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정의와 천명으로 자처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하늘에서 별안간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성문이 파괴되고 관사가 다 잠기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붙잡아 겨우 화를 면할 정도였다. 역마를 달려 이를 나라에 보고하니, 모두 놓아 보내라고 허락하였다. 청주의 부로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고을이 있은 뒤로 이런 극심한 수재가 없었다. 이것은 공 등의 일에 원한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본래부터 공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여러 차례 소환하려 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이 문득 배척하였다. 신미년(1391년) 겨울에 공이 함창(咸昌)으로부터 소환되어 와서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다. 임신년(1392년) 4월에 다시 금주로 귀양갔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이배되었다.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조선 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무고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망령되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 감히 무복(巫服)할 수 있겠는가? 죽어서는 바른 귀신이 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조정에 들리매, 왕이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에 옮기었다. 공과 동시에 귀양간 자들도 공의 힘을 입어 많이들 보전되었다.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을해년(1395년) 가을에는 관동(關東)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대로 거기에 머물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옛 친구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공이 뵙고 물러 갈때는 반드시 중문까지 나와서 보내었다.
병자년(1396년) 여름 5월에 공이 여강(驪江)에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다. 5월 7일에 병이 위급하게 되었는데, 어떤 중이 와서 자신들의 도(道)인 불법(佛法)을 설하려 하였다. 공은 사절하여, “사생의 이치에 대해서는 내 이미 의혹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곧 졸하니, 나이 69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왕이 반찬을 감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와 장사를 예(禮)로써 행하였다. 그리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관구를 모시고 한주로 돌아와, 11월 갑인일에 가지원(加智原)에 장사하였다.
공은 자품이 청수(淸粹)하고 학문이 정민(精敏)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받들어 벽옹(辟雍, 성균관)에 들어갔다. 문학이 넓고 행검이 돈독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힘썼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는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으로써 자기의 책무로 삼으매,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나라의 사명(辭命)을 맡은 것이 몇 10년이 되었지만, 늘 조정의 칭도를 받았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붓을 잡으면 곧 쓰되, 글과 이치가 정도(精到, 지극히 정밀함)하여 일시에 절묘(絶妙)하였다. 문집(文集) 55권을 남겼다. 초은(樵隱)이 박학하고 감식(監識)이 있어서 선배를 논하더라도 칭도함이 적었으나, 오직 공에게대해서는 감탄하여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天才)로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상시 사람을 맞이하고 외물을 접함에 있어서 혼연하여 일단의 화기(和氣)가 감돌았으며, 벼슬을 하여 정무를 처리할 때는 의논이 절실하고 명확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지니기에 힘쓰고, 조금도 명예에 가깝게 하는 누가 없었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아 간단한 식사 끼니조차도 비록 여러 차례 결핍되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하게 지내어, 때때로 산수(山水)를 접하여 놀면서 스스로 소일을 하였다. 방외(方外, 주로 불교)의 사람이라도 종유(從遊)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구사하는 자가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공이 이단(異端)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기롱을 하였으나, 공과 같은 달리(達理)한 밝음으로서 어찌 환망(幻妄)의 설이 족히 믿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가 역책(易簀, 돌아가심)할 때의 한 마디 말을 보아서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 영가(永嘉) 권씨(權氏)는 원나라 명위장군(明威將軍)이며 우리나라 화원군(花原君)인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나라 태자좌찬선(太子左賛善)이며 우리나라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인 한공(漢功)의 손녀이다.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지켜 살림의 있고 없는 문제로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 지밀직사사(推誠翊衛功臣知密直司事)였다. 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였으며, 병진년 과거에 올라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았다.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그 다음 종선(種善)은 사헌집의(司憲執義)로 임술년 과거에 올랐다. 지밀직(知密直)의 아들은 넷인데, 맏아들 맹유(孟㽥)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요, 다음 맹균(孟畇)은 예문직제학(藝文直提學)으로 을축년 과거에 올랐으며, 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직장(司僕直長)이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簽書)는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사재소감(司宰小監)이요, 다음 숙규(叔畦)는 사수주부(司水注簿)요, 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副司直)이요, 다음 숙묘(叔畝)는 공조의랑(工曹義郞)이요, 다음은 숙복(叔福)이요, 다음은 숙치(叔畤)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집의는 아들이 셋인데, 맏아들은 계주(季疇)요, 둘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한(韓, 청주)의 영재로서,
가정(稼亭)을 보익하였도다.
패옥 같은 그의 문장으로,
중국 황제의 뜰에서 대책(對策)으로 급제했네.
아, 빛나는 문정공(文靖公)이,
실로 경(經)을 전하였도다.
일찍이 벽옹(성균관)에 들어가
그 향기를 크게 풍기었고,
나란히 을과(乙科)에 합격하고
차례로 옥당 벼슬에 올랐네.
그 울림 더욱 커서,
국가의 빛이었더니,
거두어 동국으로 돌아와서
온 나라에 스승이 뒤었네.
의리에 정미하여,
위로 정자(程子)ㆍ장자(장횡거)를 이었고,
문장이 고고하여,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을 내리 보았네.
도가 몸에 쌓이어서,
처사함이 안상(安詳, 평온하고 온화함)하였고,
덕은 나이와 함께 높고,
위(位)는 암랑(巖廊, 조정)에 으뜸이었네.
사명을 받들어 전대(專對, 사신으로 나감)하여,
천자에게 존경받고,
돌아오자 한가함을 빌었으니,
진퇴(進退)가 다 옳았도다.
다만 시세(時勢)가 어렵고
하늘 뜻은 아득하기만 하였도다.
이래도 재액을 밟아 접질리매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네.
태산이 무너졌나니,
길 가던 사람도 눈물 뿌리는구나.
아, 선생이시어,
그 덕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자손이 뒤를 이어
복록이 다하지 않으리다.
나의 명이 아첨 없으니
먼 앞날에도 보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