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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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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현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은 조선 태종과 그의 원경왕후 민씨(閔氏)의 릉이다. 이 능에 있는 태종의 신도비 중 구비(舊碑)의 귀부(龜趺)부분이 훼손된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 장군이 이곳에 이르니 귀부가 움직였다고 한다. 그래서 깜짝 놀란 왜군대장이 철퇴로 귀부의 목을 치자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며 깨어져 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왜장이 크게 놀라 급히 쇠줄로 깨진 부분을 얽어매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국가에 큰 변고가 일어날 때면 귀부의 잘린 부분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려 주민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역시 땀이 흘러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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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유산연구원
[전액]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
[전면]
유명(有明) 증시(贈諡) 공정(恭定) 조선국(朝鮮國) 태종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헌릉신도비명(獻陵神道碑銘)과 서문(序文).
정헌대부(正憲大夫)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동지춘추관사(知經筵同知春秋館事) 겸(兼)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
하늘이 장차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게 함으로써 오래도록 큰 복을 이어받게 한다. 우리 조선의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하시었으니, 아아, 성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상(商)나라 왕실에 현명한 성군이 잇달아 일어난 것과 주(周)나라 왕실에 태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서로 계승하도록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望族]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世)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世)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나라 정치가 쇠퇴해지자 황조(皇祖)이신 환왕(桓王)이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겼으니, 공적과 인덕(仁德)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였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공민왕 16, 1367) 5월 신묘일에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서 태종을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는데, 점점 자라면서 영민(英敏)하고 슬기로움이 매우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배움이 날로 진전하더니 나이 20세가 안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정사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개탄스러워하며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께서 여러 아들 가운데 유난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공양왕 3, 1391)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승하하시자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태조 1, 1392) 봄에 태조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받들어 모시었다.
공양왕(恭讓王)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를 제거하고자 하여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자, 태종께서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우두머리를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제창하며 태조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갑술년(태조 3, 1394) 여름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입조하도록 명(命)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예법에 밝으며,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했다. 명나라에 이르러 황제의 뜻에 맞도록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무인년(태조 7, 1398)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자, 권신(權臣)들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멋대로 자기들의 뜻을 펴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화가 곧 닥칠 듯 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 제거했다.
당시 종친(宗親)과 장상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께서는 굳이 사양하고 공정왕(恭靖王)을 추대하여 태조께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께서 병이 낫지 않자 공정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정종 2, 1400) 1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태종의 형제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 부자(父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했다. 박포만 주벌(誅罰)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형제사이의 사랑하는 정을 버리지 않았다.
공정왕은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명(策命)을 청했다.
이듬해 신사년(태종 1, 1401)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 홍려시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는데,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같았다.
임오년(태종 2, 1402)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左政丞)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하례(賀禮)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태종 3, 1403) 4월에 고명과 인장을 하사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룡포(袞龍袍)·면복(冕服)·구장(九章)·금단(錦段)·사라(紗羅)·서적(書籍)을 하사하였는데, 태조에게는 금단과 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과 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이때부터 황제의 선물이 거듭되어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태종 5, 1405)에 한양은 태조께서 도읍으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환도(還都)하였다.
정해년(태종 7, 1407)에 황제가 정조(正朝)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긴다”고 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태종 8, 1408) 5월에 태조가 승하하시자 태종이 슬퍼하고 그리워하기를 끝이 없었고, 양암(諒闇)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법대로 거행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자 황제가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제사를 모시게 하고 시호를 ‘康獻’이라 추증하였으며,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전하였다.임진년(태종 12, 1412)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가 민간에 숨어 있다고 상언(上言)하자 담당 관사에서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종께서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천명(天命)에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래 뜻이 아니다” 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각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태종 14, 1414) 6월에 함흥부의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감로(甘露)1가 내렸다.
이듬해 을미년(태종 15, 1415) 4월에 또 함흥부 덕산동(德山洞)에 감로가 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므로 의정부(議政府)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했으나 받지 않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 6월에 세자 제(褆)가 패덕(敗德)하였으므로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봉하였다.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나라 사람들의 촉망을 받는다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 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종께 ‘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이듬해 기해년(세종 1, 1419) 1월에 황제가 홍려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顧命)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죽이거나 노략질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구들이 성심으로 복종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돈독하고 두터운 지극한 정성으로 삼가 중국의 조정을 섬겨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발탁하고 덕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을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에 대략 “그대의 부왕은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았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이 승하하시자 참최복(斬衰服)을 입으시고,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恭靖’이라 내렸다.
이 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太上王’이라는 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승하하시자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여 몸을 훼손함이 예법에 지나치다 하여, 태종께서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하였으나,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며 울며 굳이 사양하셨다. 장사 지낸 뒤에 최복(衰服)을 벗고 백의(白衣)로 복제를 마치도록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獻陵’라고 하였다.
신축년(세종 3, 1421)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太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에게 여쭈어 원자(元子) 향(珦)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고, 효성과 우애는 신명(神命)에 통하였으며, 정성과 공경은 종묘와 사직에 감격시켰다. 사대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극한 정성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鄰)에 있어서는 왜국이 도(道)가 있음에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였다. 덕과 예를 앞세우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했으며,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바로잡아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했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공적이 다 빛났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했으며, 산물은 풍족하였다. 제왕의 도가 진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 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甘露)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세종 4, 1422)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셨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수라를 들기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였고,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를 물려주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휴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들로부터 아래로 노복(奴僕)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지 않는 이가 없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슬퍼함이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 해 9월 초2일 병진일에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존호(尊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太宗’이라 정하였다. 초6일 경신일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
명나라에 부고를 알리자 황제가 애통해하며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郎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으니, 그 글에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독후하고 지극한 정성이 있었으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겨 충순(忠順)한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다. 멀리서 부음을 들으니 참으로 깊도다” 하였다. 또 고명을 전하여 시호를 ‘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에게도 두터운 부의를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 천심(天心)을 움직였기 때문에 시작과 끝에 있어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恩典)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이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에 걸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렀으니, 의릉(毅陵)을 도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가 되었으며,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은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았다.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았다.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양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고, 선행을 쌓은 집에 경사가 흘려들어 이처럼 맑은 덕을 지닌 분이 태어나셨으니,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께 출가하였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마음을 경서와 『史記』에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여러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움을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홍무(洪武) 임신년(태조 1, 1392)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태조 7, 1398)에 태종께서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하여 도와서 큰 일을 이루게 하였다.
경진년(정종 2, 1400) 봄에 정빈(貞嬪)에 봉해지고, 그 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태종 3, 1403)에는 황제가 관포를 하사하였으며, 이 해부터 정유년(태종 17, 1417)까지 모두 여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厚德王大妃’라 존호를 올렸고, 경자년(세종 2, 1420) 9월에 ‘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그윽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조용한 덕을 타고났다.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집안 살림에 전념하여 20년 동안 궁중의 법도[壼儀]가 엄숙하게 하였으며, 또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자 빈(嬪)·잉(媵)·시(侍)·첩(妾)들이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도리와 어머니의 위의(威儀)가 지극했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바로 제(褆)이고, 둘째는 보(補)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다. 넷째는 종(褈)이며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으나 일찍 졸하였다. 장녀는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그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그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貞惠翁主)이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는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는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裀)이며,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고, 나머지 아들은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둘째는 정정옹주(貞靜翁主)는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숙정옹주(淑貞翁主)는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따님은 모두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裶)이며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는 1남을 낳았고, 최씨(崔氏)는 1남 1녀를 낳았으며, 이씨(李氏)는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녕(讓寧)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효령(孝寧)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성녕(誠寧)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慶貞公主)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담(聃)은 한성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둘째는 아직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경녕(敬寧)은 호조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녕(恭寧)은 병조참판 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하였으나 배필의 어짊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蜀)·도(塗)·신(莘)·지(摯)처엄 일치하는 점이 있으니 나란히 기리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銘)을 새겨 영원토록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그 일을 명하셨다. 신 계량은 왕명을 받들어 삼가고 두려우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명을 올립니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해동(海東)을 사랑하여
우리 태종을 내려주시니
부지런히 힘쓰신 태종이시여
성대한 덕을 몸에 지니셨네.
거룩한 아버님을 추대하여
위대한 공업을 이루시고
황제의 조정에 사신 가서
조용히 진주(陳奏)하였네.
천자의 은총을 넉넉히 입어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셨고
기미를 밝게 살펴 난을 평정하여
적장자를 높여 세자가 되게 하셨네.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가 오히려 두터웠으니
지극한 효성과 두터운 우애
전고에 드물었네.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오직 공에 힘썼으니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하셨네.
휘황찬란한 금보가
전후에 밝게 빛나고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이르러
우리 임금께서 마침내 왕위에 오르셨네.
선왕의 훈계를 따라
한양에 환도하고
예악을 제정하니
문채가 빛나네.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애모함이 끝이 없고
장례와 제례를
옛 법도를 따르셨네.
중국의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시니
황제는 지극한 정성을 칭찬했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드니
신명이 감응하였네.
이웃 나라를 사귐에 도가 있어
왜국이 복종하고
왕씨 후예를 보살펴
그 생업을 이루게 하였네.
안과 밖이 평안한 지
억만 년 길이 드리우니
윤택한 감로가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네.
혼매(昏昧)한 아들을 폐하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백성의 임금으로 삼았으니
영원토록 향수(享壽)하여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한 번 든 질병이 낫지 아니 하셨는가.
슬프고 슬프도다. 성스러운 아들
슬픔을 비할 데 없어
사흘 동안 수라를 끊고
상심을 이기지 못해 몸이 손상하여
거상(居喪) 중의 모든 일을
오직 예대로 이행하였네.
황제가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 사제(賜祭)하며
시호를 주어 포장(褒獎)하여 높이고
부의를 후하게 내려
조문의 은전 구비되니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공경히 태후마마를 생각건대
진실로 정숙하고 온화하며
가만히 사직의 안정을 도와
총명한 성군의 배필이 되었고
성철한 아들을 낳아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네.
하늘처럼 굳건하여 환하게 밝으심은
공정왕의 덕이고
땅처럼 두터워 부드럽고 바르심은
원경왕후의 법도이니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자손이 진진하게 번성하니
아, 모두 기린(麒麟)같아라.
끊임없는 종묘사직
억만년도록 이어가리.
신은 절하고 사(詞)를 바쳐
옥돌에 새기니
만세토록 마멸되지 않고
우리 동방을 비추소서.
영락(永樂) 22년(세종 6, 1424) 5월 일에 세우다.
[후면]
비음기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옛날부터 뛰어나셨으나 춘추가 아직 높지 않으심에도 성스러운 아들에게 전위하시고 한가함을 얻어서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승하하셨다.
우리 전하께서는 슬픔에 몸을 상하시며 예를 다하시고, 5개월이 지나 원경왕태후의 헌릉에 합장하였으니, 유명을 따르신 것이다.
능은 광주(廣州) 읍치(邑治)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아래 북서쪽 산에 있으며,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북쪽으로 경성(京城)과는 30리쯤 떨어져 있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 천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꺾어서 서북으로 또 수백 리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며, 또 꺾어서 동북으로 향하다가 한강을 등지고 멈추니, 이것이 대모산이다.
이곳은 땅의 신령이 머무르고 맑은 기운이 서려 있으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갈무리해 원릉(園陵)이 될 길조(吉兆)를 기다린 것이다.
전하께서 명하여 능의 남동쪽 63보(步)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아름다운 공덕을 기록하여 빛남이 후세에까지 드리우도록 하셨다. 또한 개국공신(開國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의 성명(姓名)을 비음(碑陰)에 새기도록 명하셨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일어나면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와서 대업(大業)을 도와 이룩하게 마련이다. 이에 공적을 이정(彝鼎) 이정(彝鼎)2에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유구히 전해지게 하려는 뜻이었다.
우리 조정이 임진년에 개창되고 무인년과 경진년의 난을 평정한 것은 실로 하늘이 우리 태종에게 열어준 것이다. 이로써 조선의 억만년 무궁한 복조(福祚)를 터 닦은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장상들과 대신들이 몸을 잊고 자신을 맡겨 찬양(贊襄)하고 보좌한 힘이 많다. 이것은 정석(貞石)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세상에 보여주기에 마땅하니, 후세에 보는 이들이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獎)하는 지극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윤회(尹淮)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삼가 적습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ㆍ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ㆍ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정탁(鄭擢)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ㆍ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ㆍ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ㆍ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ㆍ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ㆍ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稇)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熙啓)ㆍ연성군(延城君) 김로(金輅)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정당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ㆍ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상산군(常山君) 이민도(李敏道)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황희석(黃希碩)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贊)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ㆍ고성군(高城君) 고여(高呂)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ㆍ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정사공신(定社功臣)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ㆍ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이복근(李福根)ㆍ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정탁(鄭擢)ㆍ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ㆍ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연성군(延城君) 김로(金輅)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ㆍ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량(柳亮)ㆍ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이원(李原)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温)ㆍ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한규(韓珪)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김승주(金承霔)ㆍ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ㆍ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ㆍ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상당군(上黨君) 이애(李薆)ㆍ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칠성군(漆城君) 윤저(尹抵)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ㆍ장흥군(長興君) 마천목(馬天牧)ㆍ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
풍산군(豐山君) 심구령(沈龜齡)ㆍ지▧부사(知▧府事) 박석명(朴錫命)ㆍ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응(李膺)ㆍ형조판서(刑曹判書) 이승상(李升商)ㆍ참판삼군부사(叅判三軍府事) 김영렬(金英烈)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
태종헌능지비(太宗獻陵之碑) (篆題)
유명(有明) 증시(贈諡)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과 아울러 서문 있음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집현전대제학 지경연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經筵同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
하늘이 장차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게 함으로써 길이 큰 복을 이어받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한 일이다. 그것은 상(商) 나라 왕실에 현명한 성군이 이어서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 왕가에 태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왕실의 근원[璿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望族]으로,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에서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 : 김(金)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 휘(諱)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했고, 13세 황현조(皇玄祖 : 태종의 4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내리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 정치가 이미 쇠하게 되자, 황조(皇祖 : 태종의 할아버지)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으니, 공적(功積)과 인덕(仁德)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이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공민왕 16, 1367년) 5월 신묘에 태종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더니 나이 20세가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고려의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했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나라 서울에 갔다 왔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공양왕 3, 1391년) 9월에 신의왕태후께서 돌아가시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했는데, 임신년(공양왕 4, 1392년) 봄에 태조가 서쪽 지방으로 행차했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살피며 시중들었다. 이때에 공양왕(恭讓王)의 신하가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갑술년(태조 3, 1394년) 여름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명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하고 예법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했다. 태종이 명나라에 이르러서 황제의 뜻에 맞도록 잘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자, 권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였다. 때문에 화가 곧 닥칠 다급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서 이들을 제거했다. 당시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 정종(定宗))을 추대하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건문(建文) 경진년(정종 2, 1400년) 1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태종의 형제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했다. 박포만을 주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 : 일정한 지역에 가둬둠)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형제사이의 사랑하는 정을 버리지 않았다. 공정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다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고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다음해 신사년(태종 1, 1401년) 6월에 명나라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했다.
임오년(태종 2, 1402년)에 지금의 황제 성조(成祖)가 즉위하였는데,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태종 3, 1403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 구장(袞冕九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 서적(書籍)을 내렸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렸다. 이로부터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 이르러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태종 5, 1405년)에 한양은 태조께서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해년(태종 7, 1407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태종 8, 1408년) 5월에 태조가 승하하니 태종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그지없이 하고, 상차(喪次)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리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내렸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리고 후하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태종 12, 1412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가 민간에 숨은 있다고 상언(上言)이 있자, 담당 관사(官司)에서 죽이기를 청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본디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했다.
갑오년(태종 14, 1414년) 6월에 감로(甘露 : 단 이슬. 천하태평의 조짐으로서 하늘에서 내린다 함)가 함흥부의 월광구미리(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고, 다음해 을미년(태종 15, 1415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이 상서로운 일에 대하여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년) 6월에 세자 제(褆)가 패덕(敗德)하다는 이유로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세종)가 총명하며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했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부왕(태종)에게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이듬해 기해년(세종 1, 1419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파견하여 고명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과 장천군(長川君)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왕의 지극한 정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을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했도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경의 부왕이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 : 정종)이 승하하니 태종이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거상(居喪) 기간을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이란 호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했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니 장사 지낸 뒤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했다. 9월 임오일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고 했다.
신축년(세종 3, 1421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에게 여쭈어서 원자(元子) 향(珦 : 문종(文宗))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의 신을 감격시켰다. 사대(事大)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고, 교린(交鄰)에 있어서는 왜국이 그 도가 있음에 복종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했다. 덕(德)과 예(禮)를 앞세우고 형벌을 신중히 했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했으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했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했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일이 다 일신되었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성했다. 제왕의 도가 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甘露)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세종 4, 1422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시니,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를 들기를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휴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들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목 놓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했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2일 병진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태종’이라고 했다. 6일 경신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명나라에 부고가 알려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郎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와 사제(賜祭)하였다.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공경으로 조정을 섬김에 있어 충순(忠順)한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도다. 부음이 멀리서 들리니 실로 슬픈 감회가 깊도다.” 하고,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했다. 또 전하에게 부의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천심(天心)을 잘 받들었기 때문에 시종(始終)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이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를 거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 : 고려 충숙왕)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았다. 문순공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았다. 대광공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모친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니, 선을 쌓음으로써 경사가 전해져서 맑은 덕이 있는 태후를 낳게 되었다.
태후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의 배필이 되었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서 의(義)를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능히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홍무(洪武) 임신년(태조 1, 1392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태종이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대사를 이루게 했다.
경진년(정종 2, 1400년) 봄에 정빈(貞嬪)에 봉해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태종 3, 1403년)에는 명 나라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는데, 이해부터 정유년(태종 17, 1417년)까지 모두 여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존호를 올려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 하였다.
경자년(세종 2, 1420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그윽하고 정숙한 덕을 타고나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집안 살림에 전심할 수 있었다. 20년 동안 왕비로서의 위의는 엄숙하고, 또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기에 이르러 빈(嬪)과 시첩(侍妾)들이 마음을 다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도리와 모후로서의 위의가 지극했도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바로 제(褆)이고, 둘째는 보(補)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다. 넷째는 종(褈)이며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는데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며,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동본(同本)의 이씨(李氏)는 아니다. 둘째는 경정공주(慶貞公主)이며,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셋째는 경안공주(慶安公主)이며,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먼저 죽었다. 넷째는 정선공주(貞善公主)이며,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貞惠翁主)이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䄄)이며,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고, 나머지 두 아들은 어리다. 맏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며,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둘째는 정정옹주(貞靜翁主)이며, 한원군(漢原君)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정숙옹주(貞淑翁主)이며, 월성군(月城君)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네 따님은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裶)이며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 최씨(崔氏)가 1남 1녀, 이씨(李氏)가 1남,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효령(孝寧)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성녕(誠寧)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고 물론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慶貞公主)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담(聃)이며,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경녕(敬寧)은 호조 참의김관(金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녕(恭寧)은 병조 참판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가하였으나 배필의 현숙함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도(蜀塗 : 촉산씨(蜀山氏)와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말함.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가 촉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이가 제곡(帝嚳)이다. 또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계(啓)를 낳았다.), 신지(莘摯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와 태왕(大王)의 부인 태임(太任)을 말함. 신(莘) 땅 출신 태사(太姒)는 무왕(武王)을 낳았고, 지(摯) 땅 출신 태임(太任)은 문왕을 낳았음.)와 신표처럼 일치하는 점이 있으니 나란히 기리는 것이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銘)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신 계량에게 명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해동을 사랑하여
우리의 태종을 내려주시니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는 태종이여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성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황제의 조정에 사신 가서
조용히 진주(陳奏)하니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형을 높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 오히려 도타웠으니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은
전고에 드물었네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
오직 공에 힘썼으니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해 주셨네
빛나는 금보가
찬란하게 비춤에
황제의 고명(誥命) 거듭 내리니
내 곧 은총을 받았네
선왕의 훈계를 따라
한성에 환도하고
예악을 제작하니
문채가 빛나네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애모가 망극하고
장사와 제사에
옛 법식을 따르셨네
공손히 명 나라를 섬기시니
황제는 그 지성을 칭찬했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듦에
신명이 감응하였네
교린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와서 복종하였고
왕씨의 후예를 보살펴
편안히 살도록 했으니
중외가 다스려져 태평하여
억만 년 길이 드리우리
윤택한 감로가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고
어두운 아들 폐하고 덕 있는 아들 명하여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영년토록 향수(享壽)하여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한 질병이 낫지 않았던가
애달프도다 성자여
슬픔을 비길 데 없어
사흘 동안 수라를 그치고
상심으로 몸이 손상함을 견디지 못했네
거상(居喪) 중의 모든 절차
오직 예대로 이행하니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사제(賜祭)했네
시호를 주어 포숭하고
부의(傅儀)를 후하게 내리니
황제의 조문하는 예가 구비되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엄정하신 태후여
진실로 엄숙하고 화순하니
사직의 안정을 가만히 도와
능히 총명한 성군의 짝이 되었네
돈독히 성철한 아들 낳아
종묘의 주인 되게 하셨네
하늘처럼 굳세고 명철함은
공정왕의 덕이요
땅처럼 후덕하고 유정함은
원경왕후의 법칙이니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 기린같이 인후하여
끊임없는 종묘사직
억만년 이어가리
신은 절하고 명(銘)을 바쳐서
옥돌에 새기노니
만대에 마멸되지 않고
우리 동방에 밝게 빛나리라
영락(永樂) 22년(세종 6, 1424년) 5월 일 비를 세우다. 그 272년 뒤 을해년(숙종 21, 1695년) 5월 일에 다시 세우다.
(裏面)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뚜렷하여 옛날보다 우뚝 높았도다. 춘추 아직 많지 아니하실 적에 왕위를 성스러운 아들에게 전해주시고, 바야흐로 한가함을 얻으시어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시었다. 우리 전하(세종)께서 슬퍼하시어 몸을 상하였으나 예법대로 다하셨다. 5개월이 지나 원경왕태후의 헌릉에 합장하시니 유명(遺命)을 따름이다. 능은 광주(廣州) 치소(治所)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밑 건해좌(乾亥坐 : 서북쪽)의 산에 있는데 능의 방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 :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함)이다. 북으로 서울 도성과의 거리는 30리쯤 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 천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서북으로 또 수백 이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靈氣)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陵)의 길조(吉兆)를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巽方 : 동남쪽)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 지금 세대와 오는 세대에 드리우라 명하시었다. 또한 개국공신(開國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들의 이름을 차례로 비 뒤에 새기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옛부터 제왕(帝王)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大業)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鐘銘彝鼎)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공을 보여서 영구히 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개창되고 무인년과 경진년의 내란을 평정한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에게 열어준 바입니다. 이로써 조선왕조가 억만년 무궁한 복을 누릴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장상(將相)들과 대신들이 몸을 잊고 명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원히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뒤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獎)하신 지극한 뜻을 알았다고 할 것입니다.가선대부 예문관제학 집현전제학 동지경연춘추관사(嘉善大夫藝文館提學集賢殿提學同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윤회(尹淮)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기록하다.
개국공신(開國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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