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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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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조선조(朝鮮朝)의 건국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년, 재위7년)의 건원릉신도비는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신도비의 모범이 되고 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이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를 함께 세우고 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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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유산연구원
[전면]
유명(有明) 시(諡) 강헌조선국태조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신도비명(健元陵神道碑銘)과 서문(序文).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길창군(吉昌君)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겸(兼) 판내섬사사(判內贍寺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신(臣) 권근(權近)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판이조사(判吏曹事)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이 왕명을 받들어 글씨를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정구(鄭矩)가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쓰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서 세상을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줄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를 나타내서 그가 천명에 부합한다는 부명(符命)으로 이를 드러낸다. 하(夏)나라 때는 하늘이 현규(玄圭) 현규(玄圭)1를 내려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 때는 무왕(武王)의 꿈이 점[卜]과 일치하는 일이 있었으며, 한(漢)나라 이후의 여러 왕조에서도 모두 이러한 징조가 있었다. 이는 모두 하늘이 내려 주는 것이지 사람의 계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는 임금이 되시기 이전의 시절에 이미 공덕이 높았으며 천명에 부합함이 또한 분명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며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 잡으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라의 현규와 주나라의 꿈과 같은 하늘의 부명이라 하겠다. 또 신이한 사람[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면서 이르길 “지리산의 바위 속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2가 삼한(三韓)을 고쳐 바로 잡는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마중하게 하였으나 그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던 비기(祕記) 가운데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3에는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는데 조선이 곧 진단(震檀)이라는 말은 수천 년 전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이제야 징험(徵驗)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준다는 것은 진실로 믿을 만한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성(望姓)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에서 관직 생활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世)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하였고, 13세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나라 정치가 쇠퇴해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왕경(王京)을 함락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고, 환왕은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는데, 우리 태조께서 제일 먼저 승첩(勝捷)의 보고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공민왕 11, 1362)에는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격퇴하여 도망가게 하였다.
또 이듬해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아내자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게 되었다. 도성과 변방을 드나들면서도 유교 경전과 사서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어서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니 세상을 구제할 도량(度量)과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지극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공민왕이 승하하자 다른 성을 가진 자가 왕위를 빼앗고,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조정을 어지럽히고, 해구(海寇)가 나라 깊이 침입하여 군현(郡縣)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우왕 6, 1380)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峯)에서 싸워 이기므로 동남쪽 지방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창왕 1, 1388)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력 있는 간신들을 죽일 때 지나치게 참혹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지하여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최영은 태조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곧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러 있을 때 앞장서서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를 지켜 깃발을 돌렸는데, 군사들이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정권을 잡고서는 최영을 잡아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 높은 유학자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력 있는 간신들은 국정을 어지럽히고, 지나치게 사나운 자들이 모함을 일삼아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점점 이르러 화란(禍亂)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실로 우리 태조가 되돌리는 공로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이제 공께서 의리를 일으켜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고 말하며 날을 정해 중국의 서울[京師]로 가도록 하였다. 태조께서는 여러 아들 가운데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택하여 이색과 함께 입조하도록 하니 고황제(高皇帝)께서 칭찬하며 상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기사년(공양왕 1, 1389) 가을에 황제께서는 성씨가 다른 이가 왕이 된 것을 힐책하자 태조께서는 여러 장상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왕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혁파하고, 쓸데없는 관원들을 도태시키니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즐거워하였다. 공(功)이 높아지자 시기를 받아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번갈아 일어나자 정창군이 이에 현혹되었다. 태조께서는 높은 벼슬에 오래 있어서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사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방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이 더욱 심해졌으나 우리 전하께서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니 모든 모함이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태조 1, 1392) 가을 7월 16일에 전하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이 함께 창의(倡義)하여 태조를 추대하니, 미리 모의하지 않은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두 뜻을 함께하였다. 태조께서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왕위에 올라서 마루와 내려오지 않은 채 한 국가를 이루셨으니 하늘이 덕 있는 사람을 이끌어서 돕지 않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받들었으며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각각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는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다. 이어 또 칙명을 내려서 "나라가 바뀌었으니 무슨 이름을 쓰려하는가?" 하자 즉시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근본으로 하여 본받도록 하면 좋겠다.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후세 자손들이 영원토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명성, 의열(義烈)이 천자에게까지 전해져 황제의 마음에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태조가 청명(請命)하자 곧바로 유음(兪音)을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태조 3, 1394) 여름에 황제에게 우리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서 임금의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시키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에 밝아 여러 아들 가운데 제일 현명하다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아뢰는 말씀들이 황제의 뜻에 부합하니 예를 갖추어 우대하고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종묘를 세웠으며, 일찍이 4대(代)를 추존하여 황고조를 목왕으로,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지내는 일을 삼가며, 관복의 제도를 정하여 관등(官等)의 위엄을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였고, 소송(訴訟)을 바르게 판결하였다. 수령(守令)들을 신중히 선택해 뽑아서 갖은 폐정(弊政)들을 개혁하니 여러 가지 공적이 함께 빛났으며, 해구가 와서 복종하므로 온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넓은 성덕(盛德)은 진실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이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며 웅장하고, 위대한 임금이라 말할 수 있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때문에 황제의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게 되자, 명을 거역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무인년(태조 7, 1398) 가을 8월에 정도전이 우리 태조께서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얼자[庶子]를 끼고 제 뜻을 멋대로 펴보려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그 기미를 밝게 살펴 이들을 제거하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上王)을 세자로 세우도록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께서는 병이 낫지 않자 지금의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계사(繼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여 곧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정종 2, 1400)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께 ‘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호를 올리셨고, 겨울 11월 계유일에는 상왕 또한 병으로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태종 3, 1403)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서(詔書)와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께 구장(九章)의 곤면(袞冕)을 하사하니, 그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우리 전하가 두 임금을 봉양(奉養)하는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영락 무자년(태종 8, 1408)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시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 중에 예를 다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께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이 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도성 동쪽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장례를 모시니, 능호(陵號)는 “健元”이라 하였다. 부고를 알리자 황제는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열지 않고 즉시 예부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의 대략에 "오직 왕은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선을 좋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따르고 충의를 다하며, 근신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기고 한 나라의 백성들을 잘 보휼(保恤)하였다. 우리 황고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국호를 조선이라 회복하여 내리셨으니, 왕의 뛰어난 공덕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하고,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康獻’이라 하시고,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다.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恩典)이 지극히 갖추어져 유감됨이 없었다. 대개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계승하는 효성이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들었다. 그러므로 한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사람의 도움을 크게 얻음이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으로 증직(贈職)된 휘(諱) 경(卿)의 딸인데 먼저 돌아가셨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이고, 뒤에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가 더해졌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이 둘째이고 우리 전하가 다섯째이다. 장남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졌으나 일찍 돌아가셨다.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에 봉해졌으나 역시 일찍 돌아가셨다.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에 봉해졌다. 여섯째 방연(芳衍)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원윤(元尹)에 증직되었다.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선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로 봉해졌으나 먼저 돌아가시자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에 증직되었다. 둘째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에 증직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는 아니다.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상왕의 비(妃)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王大妃)에 봉해지셨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된 천서(天瑞)의 딸로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인데,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세자(世子)이다. 다음은 호(祜)인데 효령군(孝寧君)이다. 다음은 도(裪)인데 충녕군(忠寧君)이다. 다음은 어리다. 장녀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이다. 다음 덕근(德根)은 원윤(元尹)이다. 익안대군(益安大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증직된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는데,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대군(懷安大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증직된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중(孟衆)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역대(歷代)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은 덕업의 성대함과 하늘이 주는 부명의 신이함이 간책에 찬란하게 빛나 후세에 밝게 전함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성대한 덕과 하늘이 주는 큰 부명이 예보다 더욱 빛나니, 이에 참으로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함을 얻은 것이다. 넓은 터전 솟아오르고 큰 복조(福祚)는 흘러내려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 권근이 외람되게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펴서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신은 필력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전하의 밝은 뜻에 부합되기에 부족하므로, 삼가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을 찬술(撰述)하여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명(銘)을 올린다. 그 글[詞]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으시고
임금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게 할 때에는
곧 덕 있는 이를 돌보시네.
하늘이 순순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명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우(禹)임금에게는 현규를 주었고
주나라의 꿈은 점과 맞았네.
우리 조선이 처음 왕업을 창건할 때에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척을 주었으니
하늘의 부록(符籙)이 먼저 정해져
하늘의 마음도 분명하였네.
고려의 운수가 이미 끝나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혹독하며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에 흔극(釁隙)을 일으켰네.
우리 군사가 의(義)의 깃발을 되돌려
죄인을 잡으니
그 충성 위에 들려
황제 마음 기뻐하였네.
하늘의 움직임이 제대로 돌아가고
여정(輿情)이 절박(切迫)하여
대업(大業)은 이미 이루었으나
저자[市肆]는 바뀌지 않았네.
고황제가 조(詔)하기를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백성들은 병화가 없고
하늘이 주는 기쁨을 즐기네 하시고
이어 국호를 내려주어
조선이라 다시 회복하여 주었네.
땅을 골라 도읍을 정하니
한양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리고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였네.
궁실 높고 높으며
종묘는 우뚝하고 어
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정치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온갖 제도는 갖추어 닦아지고
모든 교화가 흡족하네.
정사에 지치시어
적사(嫡嗣)에게 선위하고
공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오직 부자ㆍ형제간에 계승하였네.
밝고 밝은 우리 전하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두 번이나 화란을 평정하니
그 경사 지극히 독실하네.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대명(大命)은 사양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를 부탁받았네.
양궁을 공경히 받으니
경건하고 공순함이 더욱 지극하도다.
효제(孝弟)와 신명(神命)에 통하여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도다.
상(喪)을 당하자 근심에 잠겨
애모의 슬픈 정 몸부림치네.
황제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며
칙명(勅命)하여 부의를 후하게 하고,
아름다운 시호까지 내려 칭찬하니,
휼전은 완전히 갖추어졌네.
하늘의 도움이 시종일관 변함없어
큰 복록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억(千億)으로 번창하며,
종묘와 사직은 유구(攸久)하여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영락(永樂) 7년(태종 9, 1409) 4월 일에 세우다.
[후면]
비음기(碑陰記)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지극한 덕과 위대한 공으로 대업을 창건하여 날마다 정사를 보다가 병이 나 오래 끌자 선위하고 오랫동안 영예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그러다가 영락 무자년(태종 8, 1408) 봄 정월에 또 병이 났는데, 우리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자 병이 조금 나았다가 5개월이 지나자 병이 또 다시 도져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다. 예를 갖추어 양주의 검암산에 장사를 지냈는데, 한양 도성과의 거리는 20여 리이다. 검암산의 줄기는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2천여리를 꿈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철령(鐵嶺)에 이르러 꺾여서 서쪽으로 수 백리를 멈추어 우뚝 솟아 백운산(白雲山)이 되었다. 또 남쪽으로 비스듬히 백여 리를 가다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우뚝 솟았는데, 그것이 바로 검암산이다. 건원릉은 계좌(癸坐) 정향(丁向)인데 직선으로 능의 병방(丙方) 421척(尺)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우리 태조의 공덕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대하였음을 이미 자세히 기록하였다.
전하께서 또 말씀하기를,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은 마땅히 비석의 뒷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나 좌명공신(佐命功臣)들도 또한 모두 일의 기미에 따라 책략을 정하여 우리 태조께서 창건하여 물려주신 왕업(王業)을 널리 확대시켰으니 그들의 성명도 아울러 새겨 그 공이 없어지지 않도록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하고, 신 계량(季良)에게 사실을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커다란 덕을 지닌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백성의 주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반드시 손발이 되어 보필하는 신하가 앞과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서 앞에서는 열고 뒤에서는 지킨 후에야 커다란 공훈이 이루어지고 대업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할 때에는 문무대신(文武大臣)들이 천명(天命)의 귀추(歸趨)를 분명히 알고 실제로 좌우에서 이끌었다. 그리고 무인년(태조 7, 1398)의 정사공신이나 경진년(정종 2, 1400)의 좌명공신에서 보듯이 모두 왕실의 훈신(勳臣)과 친족들이 잘 보필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로가 더불어 재상을 도와 공적을 이룩하여 왕업이 유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비석에 새겨 후세에 이르기까지 광채를 빛나게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선왕의 공렬을 현양(顯揚)하고 왕실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을 포상한 미덕 또한 영원히 남겨서 아울러 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좌참의(禮曹左叅議)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지문서응봉사사(知文書應奉司事)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감히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씁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裴克廉)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남재(南在)ㆍ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熙啓)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흥녕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ㆍ참찬의정부사(叅贊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정총(鄭摠)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로(金輅)
이성군(伊城君) 손흥종(孫興宗)ㆍ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ㆍ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ㆍ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심효생(沈孝生)ㆍ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稇)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ㆍ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贊)ㆍ장성군(長城君) 정용수(鄭龍壽)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ㆍ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ㆍ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
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민여익(閔汝翼)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ㆍ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고성군(高城君) 고여(高呂)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임언충(任彦忠)ㆍ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ㆍ영안군(寧安君) 이양우(李良祐)ㆍ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ㆍ봉녕군(奉寧君) 이복근(李福根)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ㆍ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이무(李茂)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병조판서(兵曹判書) 이천우(李天祐)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ㆍ참찬의정부사(叅贊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로(金輅)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ㆍ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성석린(成石璘)ㆍ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이무(李茂)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병조판서(兵曹判書) 이천우(李天祐)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칠원군(漆原君) 윤저(尹柢)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
이조판서(吏曹判書) 유량(柳亮)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면성군(沔城君) 한규(韓珪)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ㆍ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ㆍ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석명(朴錫命)ㆍ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ㆍ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ㆍ곡성군(谷城君) 연사종(延嗣宗)ㆍ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ㆍ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ㆍ풍천군(豐川君) 심구령(沈龜齡)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ㆍ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ㆍ평강군(平江君) 조희민(趙希閔)ㆍ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ㆍ조천군(照川君) 김우(金宇)ㆍ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ㆍ원평군(原平君) 윤목(尹穆)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
여량군(礪良君) 송거신(宋居信)
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 나이 72세에 쓰다.
현(玄)은 검은 빛이고, 규(圭)는 큰 홀(笏)이다. 예전에 요(堯)임금이 우(禹)임금에게 현규(玄圭)를 하사한 적이 있는데,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는 뜻이다. ↩
이성계의 성(姓) ‘이(李)’자를 파자한 것이다. 木 밑에 子를 붙이면 李자가 되는데, 곧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키는 도참설(圖讖說)을 말한다. ↩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 (篆題)
유명 시호 강헌 조선국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健元陵神道碑銘) 아울러 서문도 있음(幷序)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겸 판내섬사사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吉昌君集賢殿大提學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世子貳師) 신(臣) 권근(權近)이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 대제학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事監春秋館事) 세자부 창녕부원군(世子傅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이 교서(敎書)를 받들다.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집현전제학 지경연춘추관사(資憲大夫知議政府事集賢殿提學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정구(鄭矩)가 교서를 받들어 전(篆)을 쓰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세상을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줄 때에는, 반드시 먼저 신이한 징조를 보여서 그가 천명에 부합한다는 부명(符命)으로써 이를 밝힌다. 하(夏) 나라 때에는 하늘이 현규(玄圭: 검은색 홀)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 나라 때에는 무왕(武王)의 꿈이 점[卜]과 일치하는 일이 있었다. 한(漢) 나라 이후의 여러 왕조에서도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다. 이는 모두가 하늘이 주는 것이요 사람들의 모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는 임금이 되시기 이전의 시절에 공덕이 이미 높았으며 천명에 부합함[符命]이 또한 현저하였다. 태조대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라.“
고 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하 나라 우왕의 현규와 주 나라 무왕의 꿈과 더불어 같은 하늘의 부명이라 하겠다. 또 신이한 사람[異人]이 문 앞에 와 글을 바치면서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위 틈에서 얻은 것인데 ‘목자(木子 : 이성계의 성(姓) ‘이(李)’자를 파자한 것. 木 밑에 子를 붙이면 李자가 되는데, 곧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키는 도참설(圖讖說))가 삼한을 고쳐 바로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나아가 맞으려 하니 이미 가버리고 없어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 : 천문(天文)·역법(曆法)·누각(漏刻)·도참(圖讖)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던 비기(祕記) 가운데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 : 아홉 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 일종의 도참서(圖讖書))에는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다. 조선이 곧 진단(震檀)이라는 말은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징험(徵驗)되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고 도와준다는 것은 진실로 믿을 만한 것이다.
신(臣)이 삼가 왕실의 근원[璿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이 있는 가문[望族]으로,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新羅)에서 관직 생활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 : 김(金)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世) 휘(諱)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世)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벼슬을 이어가며 모두 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원 나라 정치가 쇠퇴해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신축년(공민왕 10,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왕경(王京)을 함락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을 때, 환왕은 군사를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 이 때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勝捷)의 보고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哈出)을 격퇴하였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아내자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웠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상(將相)으로서 도성과 변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태조께서는 유교 경전과 역사 관련 책 읽기를 즐겨하여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지극한 성품[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죽고 다른 성(姓)을 가진 자가 몰래 왕위를 빼앗고,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조정을 어지럽히고, 해구(海寇)가 나라 깊이 침입하여 군현(郡縣)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는데, 홍무(洪武 :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경신년(우왕 6, 1380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峯)에서 싸워 이기므로 동남쪽 지역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창왕 1, 1388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세 있는 간신들을 죽일 때에 지나치게 참혹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에 최영은 태조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곧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러 있을 때 앞장서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바른 의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렸는데, 군사들이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삼켜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정권을 잡고서는 최영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 높은 유학자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 시기야말로 권력을 지닌 간신들은 국정을 어지럽히고, 지나치게 패려한 자들은 모함을 일삼아, 나라가 망할 위기에 점점 이르러서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실로 우리 태조가 이를 바꾸어 놓은 공로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위태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지금 공(公)이 의리를 일으켜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조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날을 가려 중국의 서울[京師]로 갔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택해서 이색과 함께 중국 조정에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창왕 1, 1389년) 가을에 중국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왕(王)씨가 아닌 다른 성(姓)을 가진 사람이 임금으로 된 것을 문책하여 오므로, 태조는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혁파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므로 민중의 마음은 서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공로가 높아지므로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이 자못 이에 현혹되었다.
태조는 높은 벼슬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사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역으로 행차하였다가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심하여졌다. 우리 전하(태종을 가리킴)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제압함으로써 온갖 모의가 와해되고 말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태종)께서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의리를 내세워 태조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의한 일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가만히 앉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는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으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 또 칙명에 이르기를,
“"나라가 바뀌었으니 나라 이름은 무엇인가?”
하므로,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중국에 보내어 나라이름을 정하여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바탕으로 옛날의 조선을 잇도록 하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의 자손에게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이 모두는 우리 태조의 위엄과 명성 그리고 의롭고 곧은 성품이 위로 황제에게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태조가 청명(請命)하자 곧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태조 3, 1394년) 여름에 우리나라를 황제에게 무고(誣告)한 자가 있어서,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 태조께서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 제일 현명하다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전하께서는 중국의 서울에 도착하여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므로 황제는 예로써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과 종묘를 세우고, 일찍이 4대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라 하고, 황조(皇祖)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라 하였다.
예악(禮樂)을 정리하여 제사를 정비하고, 복장을 정하여 등급과 위엄을 분변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녹봉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였다. 송사를 밝게 분변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수령(守令)을 뽑는 데 신중하였으며, 나쁜 정치를 모두 고치므로 여러 가지 공적이 함께 빛났으며,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므로 온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덕(德)은 진실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로서 총명하고 신무(神武)하며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 말할 수 있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음모를 꾸며,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서얼(庶孼)를 끼고 제 뜻을 펴려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그 기미를 살펴 모조리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 : 정종(定宗))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에게 선위하였다.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한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한 것은 모두가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정종 2, 1400년)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께 계운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리고,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 또한 병으로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승낙의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태종 3, 1403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에게 조서(詔書)와 인장(印章)을 보내주어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전하에게 구장(九章)의 곤면(袞冕)을 하사하니, 그 품수가 친왕(親王)에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두 임금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영락 무자년(태종 8, 1408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는 74세이었다. 왕으로 재위한 연수는 7년이요,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은 것이 11년인데,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시니 참으로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슬피 사모함이 망극하며 거상의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존호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도성 동쪽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안장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황제는 부고를 듣자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의 대략에,
“오직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따르고 충의를 다하며, 근신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기고 한 나라의 백성을 잘 보휼(保恤)하였므로,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나라 이름을 다시 '조선'이라고 내렸다. 이처럼 드러난 왕의 공덕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떤 임금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憲)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 내리기를 특별히 후하게 하였으니,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유감없이 지극히 갖추어졌다. 대체로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계승하는 효성이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들었다. 그러므로 한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사람의 도움을 크게 얻음이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첫 번째 왕비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諱) 경(卿)의 딸인데 태조보다 먼저 죽었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로 하였다가 뒤에 승인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를 올렸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가 다섯째다. 장남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며 먼저 죽었다.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역시 먼저 죽었다.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이다. 여섯째 방연(芳衍)은 등과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원윤(元尹)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이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는데 동본(同本)의 이씨(李氏)가 아니다. 차녀는 경선궁주(慶善宮主)이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왕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며 처음에는 현비(顯妃)에 봉하여졌다가 왕보다 먼저 죽었으며 시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첫째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에 추증되었다. 둘째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에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며, 다 태조보다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王大妃)에 봉해졌는데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로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딸이다. 4남4녀를 두었다. 장남은 세자(世子 : 제(褆))이다. 둘째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다. 셋째 도(裪)는 충령군(忠寧君)이다. 넷째는 어리다. 장녀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다. 둘째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셋째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다. 넷째는 어리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다. 장남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이다. 둘째 덕근(德根)은 원윤(元尹)이다.
익안군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규(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익평군(益平君)이며, 회안군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종(孟宗)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권근)이 역대의 천명을 받아 창업한 임금들을 살펴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하늘이 주는 부명(符命)의 신이함이 간책에 찬란하게 빛나 후세에 밝게 전함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성대한 덕과 하늘이 주는 큰 부명이 예보다 더욱 빛나니, 이에 참으로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함을 얻은 것이다. 넓은 터전을 높이 쌓고 큰 복록을 흘려보내니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臣) 근(近)이 외람되게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삼가 사람의 이목에 남아 있는 훈덕만을 찬하고,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명(銘)을 올린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으시고
임금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게 할 때에는
곧 덕 있는 이를 돌보았도다.
하늘이 순순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명령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우(禹) 임금에게는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 무왕(周武王)의 꿈은 점[卜]과 맞았도다.
우리 조선이 처음에 왕업을 창건할 적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도다.
하늘의 부록(符籙)이 미리 정하여졌으니
하늘의 마음도 분명하도다.
고려의 운수가 이미 끝나
임금이 우매하고 재상이 혹독하며,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에 싸움을 걸었도다.
우리 태조께서 바른 의리로 깃발을 되돌려
죄인을 잡으니,
그 충성 위로 중국에 들려
황제가 기뻐하였도다.
하늘의 움직임이 제대로 돌아가고
민정이 절박하여
위대한 왕업을 이미 이루었으나,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되지 않았도다.
고황제(高皇帝)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하늘이 주는 기쁨을 즐기네.“
하고,
이어 국호를 내려주어
조선(朝鮮)이라는 옛 나라가 다시 이루어졌다.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양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리고 용이 도사린 듯
왕기가 쌓였도다.
궁궐은 높고 높으며
종묘는 우뚝한데,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정치는 빛나고 생각은 화순하였다.
온갖 제도는 갖추어 닦아지고
만가지 변화가 이에 흡족하도다.
삼가 정치하시기에 지쳐서
성스런 맏아들에게 전하시고,
맏아들은 이어 공로가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오직 부자ㆍ형제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조그마한 기미도 반드시 살펴서,
두 번이나 화란을 평정하니
그 경사 더욱 독실하도다.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천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두 임금을 받들어 모심에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이와 같은 효제(孝弟)와 신명에 통하여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도다.
상사를 당하자 근심에 잠겨
슬피 사모하며 몸부림쳐 울부짖었도다.
황제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도다.
또 태뢰(太牢)를 써 제사하며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라는 칙명을 내리는가 하면,
아름다운 시호까지 내려 칭찬하니,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히 갖춰졌도다.
하늘의 도움이 시종일관 변함없어
큰 복록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억(千億)으로 번창하며,
종묘와 사직은 유구하여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영락(永樂) 7년(태종 9, 1409년) 4월 일 돌을 세우다.
(뒷면)
비음기(碑陰記)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지극한 덕과 위대한 공으로 대업(大業)을 창건하여 날마다 정사를 보다가 병이 나 오래 끌자 왕위(王位)를 이양하고 오랫동안 영예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그러다가 영락(永樂) 무자년(태종 8, 1408년) 봄 정월에 또 병이 났는데, 우리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자 병이 조금 나았다가, 그 뒤 5개월이 지나 병이 또다시 도져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다. 이에 예를 갖추어 양주(楊州)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를 지냈는데, 한양(漢陽) 도성(都城)과의 거리는 20여 리이다.
검암산의 줄기는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2천여 리를 꿈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철령(鐵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이어 수백 리를 내려오다가 멈추어 우뚝 솟아 백운산(白雲山)이 되었다. 또 남쪽으로 비스듬히 백여 리를 가다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우뚝 솟았는데, 그것이 바로 검암산이다. 건원릉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인데 직선으로 능의 동남쪽 병방(丙方) 421척(尺)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우리 태조의 공덕(功德)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대하였음을 이미 자세히 기록하였다.
전하(태종)께서 또 말씀하기를,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은 마땅히 비석의 뒷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나 좌명공신(佐命功臣)들도 또한 모두 일의 기미에 따라 책략을 정하여 우리 태조께서 창건하여 물려주신 왕업(王業)을 널리 확대시켰으니만큼, 그들의 성명도 아울러 새겨 그 공이 없어지지 않도록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하고, 신 계량(季良)에게 사실을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커다란 덕을 지닌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백성의 주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손발이 되어 보필하는 신하가 앞과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서 앞에서는 열고 뒤에서는 지킨 연후에야 커다란 공훈이 이루어지고 대업(大業)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할 적에는, 문무 대신(文武大臣)들이 천명(天命)의 귀추(歸趨)를 분명히 알고 실지로 좌우에서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인년(태조 7, 1398년)의 정사공신이나 경진년(정종 2 , 1400년)의 좌명공신에서 보듯이 모두 왕실의 훈신과 친족들이 잘 보필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로가 더불어 재상을 도와 공적을 이룩함으로써 왕업이 유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땅히 비석에 새기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광채를 드리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선왕의 공렬(功烈)을 현양하고 왕실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을 포상한 미덕 또한 마땅히 아울러 전하여 영원히 남겨야 할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좌참의 수문전직제학 지제교 지문서응봉사사 세자좌보덕(禮曹左叅議修文殿直提學知製敎知文書應奉司事世子左輔德)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고 씁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裴克廉)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ㆍ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ㆍ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ㆍ의정부찬성사(議政府賛成事) 남재(南在)ㆍ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熈啓)ㆍ호조판서(戶曹判書) 조박(趙璞)ㆍ흥령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ㆍ참찬의정부사(叅賛議政府事) 장사길(張思吉)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정총(鄭摠)ㆍ지의부사(知議府事) 김로(金輅)ㆍ이성군(伊城君) 손흥종(孫興宗)ㆍ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ㆍ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ㆍ예문관대학사(藝文舘大學士) 침효생(沈孝生)ㆍ계림군(雞林君) 김곤(金稇)ㆍ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ㆍ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한산군(漢山君) 조인원(趙仁湲)ㆍ평해군(平海君) 황희고(黃希頋)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賛)ㆍ장성군(長城君) 정룡수(鄭龍壽)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담(張湛)ㆍ보성군(寳城君) 오몽을(吳蒙乙)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황거정(黃居正)ㆍ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 민여익(閔汝翼)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ㆍ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임언충(任彦忠)ㆍ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정사공신(定社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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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명공신(佐命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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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좌정승창녕부원군(議政府左政丞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 나이 72세에 쓰다.
(비석의 높이는 10척 5촌, 폭은 3척 6촌, 두께는 7푼이며 해서로 썼다. 제목의 글씨는 3촌 5푼의 크기의 전서(篆書)로 썼다. 高十尺五寸幅三尺六寸字徑七分楷書題額字徑三寸五分篆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