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경공묘지명 병서(韓文敬公 墓誌銘 幷序)
나는 나이 16,7세때 시를 짓는 승려를 따라서 묘련사(妙蓮寺)에 가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유자(儒者)와 승려들이 섞여 앉아 차를 마시며 싯구를 이었는데, 문경공(文敬公)은 나이 겨우 12,3세로서 매번 딱 맞는 대구(對句)를 하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오랫동안 글을 지은 사람들도 사양하며 감히 나이를 내세우지 않아, 나는 마음속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정해년(충목왕 3, 1347)에 나의 아버님이 과거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그때 나이 15살이었다. 과거에 떨어진 사람들이 그의 재능에 감복하며 모두 “한선생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문음으로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다. 사정이 있어 벼슬을 구하지 않고 경서를 공부하며 익재 선생(이제현)을 따라 좌전과 사기, 한서를 읽었다. 글씨도 진서(眞書)와 초서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총릉(聰陵 : 충정왕)이 왕에 올라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에 임명하고, 정방(政房)으로 불러 비도적(秘闍赤)으로 삼았다. 신묘년(공민왕 즉위, 1351)에 (충정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도(江都 : 강화도)로 갈 때 공은 따라갔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불러 올라왔으나, 곧바로 등용되지 않았다. 계사년(공민왕 2, 1353) 처음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고 다시 비도적(秘闍赤)이 되었다. 이듬해 전리좌랑 지제교(典理佐郞 知製敎)로 옮겼다. 이듬해 통직랑 성균직강(通直郞 成均直講)을 거쳐 봉선대부 성균사예(奉善大夫 成均司藝)가 되었으며, 모두 예문관의 응교(應敎)를 겸하였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관제를 고쳐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中散大夫 秘書少監 知制誥)가 되었다. 이듬해 병부시랑 한림대제(兵部侍郞 翰林待製)로 옮겼다가 가을에 직학사(直學士)로 승진하였다. 또 이듬해 진중대부 국자제주 지제고(進中大夫 國子祭酒 知制誥)가 되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국가가 사적(沙賊 :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갔을 적에 전의(典儀)와 전교(典校)의 영(令)으로 옮겼는데, 관계는 중정대부(中正大夫)였다. 이듬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奉順大夫 判司僕寺事 右文館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密直司左副代言 寶文閣直提學 知工部事)에 임명되었다. 공에게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듬해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승진하였다가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 봄 신돈이 국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행적이 대단히 비밀스러웠다. 공이 그것을 알아 비밀히 왕에게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난을 일으킬까 두려우니 임금께서는 살피십시오. 제가 아니면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은 한창 신돈을 총애하여 여름에 예의판서(禮儀判書)로, 가을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하였다. 이는 공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다. 겨울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쳤다. 왕은 앞의 말 때문에 계속 관직을 주지 않았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가을 신돈이 숙청되자 국왕은 “한모(韓某)가 선견지명이 있었다. 급히 부르라” 하고, 영록대부 이부상서 수문전학사(榮祿大夫 理部尙書 修文殿學士)에 임명하였다. 며칠 후 국왕은 ‘관리의 인사는 중요한 일이므로 총명하고 민첩하며 정밀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일을 맡길 수 없다. 나의 생각으로 한모(韓某)가 바로 그 사람이다’ 고 하면서, 정의대부(正議大夫)로 우승선(右承宣)에 임명하였다. 겨울에 좌승선(左承宣)에 승진시켜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을묘년(우왕 1, 1375) 여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하여 동지서연(同知書筵)을 맡았고, 가을에는 첨서(簽書)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월 (밀직)부사(副使)가 되었다가 얼마 후 동지(同知)(밀직사)로 승진하였고, 여름 5월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금의 판서 정총(鄭摠)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당시에 훌륭한 선비를 뽑았다는 칭찬이 있었다. 가을에 지(밀직)사가 되었다. 무오년(우왕 4, 1378) 상당군(上黨君)으로 봉해지고 품계는 대광(大匡), 관직館職)은 진현(進賢)으로 바뀌었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기미년(우왕 5, 1379) 겨울 광암비(光巖碑)
1를 쓴 공으로 다시 첨서(簽書)가 되었다. 이듬해 봄 청성군(淸城君)으로 봉해졌는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었다. 임술년(우왕 8, 1382)에 남경행차를 호종하여 이듬해 가을에 그 공으로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判厚德府事 右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에 임명되고 공신호는 전과 같았다. 갑자년(우왕 10, 1384) 2월 28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슬퍼하며 “이 사람의 나이 겨우 52세인데 죽었으니 천도(天道)는 어찌 이러한 일을 있게 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날을 택하여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기슭에 있는 선영에 묻으니 예에 맞았다.
한씨는 상당(上黨 : 청주)의 대가(大家)로 난(閫)은 삼한공신이었다. 사기(謝奇)는 첨의부우사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교(僉議府右司議大夫 寶文閣提學 知製敎)였으며,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악(渥)은 선력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宣力佐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黨府院君)으로 시호가 사숙(思肅)이다. 충숙왕을 도와 관직이 총재에 이르렀고 공훈이 사직에 있다. 공에게는 조부가 된다. 사숙은 아들 다섯을 낳았다. 모두 훌륭한 재상이 되었다. 공의(公義)는 밀직을 거쳐 중대광 청성군(重大匡 淸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밀직사 좌대언 겸 감찰집의(密直司 左代言 兼 監察執義)인 경사만(慶斯萬)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공은 검교문하시중 길창부원군(檢校門下侍中 吉昌府院君) 권적(權適)의 딸과 결혼하여 4남 6녀를 두었다. 큰 아들 상환(尙桓)은 전삼사우윤(前三司右尹), 둘째 아들 상질(尙質)은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평양윤(西北面都觀察黜陟使 兼 平壤尹), 셋째 아들 상경(尙敬)은 공조총랑 지제교 겸 상서소윤(工曹摠郞 知製敎 兼 尙瑞少尹), 넷째 아들 상덕(尙德)은 종부시승(宗簿寺丞)이다. 손자는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우윤(右尹 : 상환)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의 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출척(黜陟 : 상질)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전종부시승(前宗簿寺丞) 강책(姜策)에게 시집갔다.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송신의(宋臣義)의 딸인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총랑(摠郞 : 상경)은 전판도판서(前版圖判書) 오준랑(吳俊良)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시승(寺丞 : 상덕)은 전대언(前代言) 이귀생(李貴生)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의) 큰 딸은 삼사우윤(三司右尹) 안경검(安景儉)에게 시집가 5녀 1남을 두었다. 둘째 딸은 성균직강(成均直講) 이작(李作)에게 시집가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셋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권방위(權邦緯)에게 시집갔다. 넷째 딸은 전호군(前護軍) 임중선(任中善)에게 시집을 가 4남을 두었다. 다섯째 딸은 의덕부승(懿德府丞) 박등(朴登)에게 시집갔고, 여섯 째 딸은 중낭장 전보(田甫)에게 시집갔다.
(공의)큰 아들은 명석하고 책읽기를 좋아하였지만 병 때문에 과거공부를 중단하였다. 출척(黜陟)은 경신과 제3등으로, 총랑(摠郞)은 임술과 제3등으로, 막내 시승(寺丞)은 을축과 제9등으로 합격하였다. 나라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쌀을 주는데 지금 권씨부인이 그 영예를 누리고 있으니 공이 지하에서 함께 즐거워할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 벌써 9년이 되었지만 목소리와 용모는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 어느 날이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출척공이 동생들과 함께 무덤에 묘지명을 둘 것을 생각하였는데 날이 지날수록 뜻이 더욱 간절하여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아아! 나는 문경공의 청으로 일찍이 그 아버지 평간공(平簡公)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지금 다시 문경의 묘지명을 짓게 되니 또한 슬픈 일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옥그릇에 얼음을 둔 것이 공의 맑음이요,
먼지 낀 상자에서 거울을 보니 공의 밝음이로다.
부유하게 자랐으나 사치하지 않았고
시서에 노닐며 조금도 이익 따지지 않았네.
효도와 우애, 충성과 믿음직스럽고
청렴하고 고요하며 너그럽고 인자로웠으니
마땅히 미수(眉壽)를 누릴 것을 하늘이 빼앗아가니 어찌할 수 없네.
다행히 많은 아들들 재주있고 아름다와
공의 이름 전함이 세상에 계심과 같네.
내가 아버지와 아들 명문을 지으니 마음에 슬프지 않으리
복이 계속되어 자손이 번창하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