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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표묘지(尹之彪墓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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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권17 및 『동문선(東文選)』권127에 실려 있으며, 1382년(우왕 8)에 이색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인 윤지표(尹之彪, 1310~1382)는 선주(善州) 속현 해평현(海平縣 : 지금의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대) 사람이다. 증조는 군정(君正), 조부는 만비(萬庇), 아버지는 석(碩)이다. 어머니 이씨는 백년(百年)의 딸이다.묘지명에 따르면 윤지표는 충혜왕·충목왕·공민왕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충혜왕을 원나라에서 시종하였으며, 충목왕 때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몽고어에 능통하였다. 말년에 염제신(廉悌臣), 윤환(尹桓) 등 여러 원로들과 결사(結社)를 조직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지표는 두 번 혼인하였다. 첫째 부인 조씨(趙氏)는 연수(延壽)의 딸이다. 둘째 부인 이씨는 천(蒨)의 딸이다. 조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보(寶)와 진(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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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해평군 시충간 윤공묘지명 병서(海平君 諡忠簡 尹公墓誌銘 幷序)
선주(善州 : 지금의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대) 속현 해평현(海平縣)의 망성(望姓 : 이 지역의 명망있는 성씨)은 윤씨(尹氏)이다. 윤군정(尹君正)이 고종과 원종을 내리 섬겨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工部事)에 이르렀다. 윤만비(尹萬庇)는 충렬왕을 섬겨 기사년(원종 10, 1269) 일등공신이 되고 마지막 관직이 봉익대부 부밀직사사 상호군(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上護軍)이었다. 윤석(尹碩)은 정승공(政丞公)이다.
원나라 사자가 왔을 때 정승(政丞 : 윤석)이 별장으로 잔인(盞人 : 술잔을 받드는 임무를 가진 사람)이 되어 왕 앞에 서 있었다. 사자가 황제의 교지를 전하면서 두 왕자를 원나라 조정에 오게 하였다. 정승이 이를 듣고 묵묵히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우를 좇을 것이다’하였다. 돌아와 아버지(윤만비)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너의 계책은 잘못이다. 왕자를 좇는 것은 뒷날을 위한 계책인데, 형이 있으니 아우가 먼저 나라를 차지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다시 “저도 역시 그러한 줄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아우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형을 보면 그러지 않으니 이것이 제가 계책을 결정한 이유입니다” 하였다. 아버지가 다시 말하지 않았다. 맏이는 원자로 일찍 죽었고, 아우가 충숙왕이 되었다. 공이 원나라 수도에 따라가 왕을 보좌하는 관리로 공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었다. 그 뒤 관직을 역임하여 도첨의우정승 판전리사사(都僉議右政丞 判典理司事)에 이르렀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관계(官階)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의 호를 얻었다. 역시 공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었다. 군신의 만남이 천년에 한 번 있는 것으로서,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 하겠는가. 뒤에 천자가 공의 이름을 듣고 특별히 진국상장군 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 高麗都元帥)에 임명하여 특별히 총애하였다.
해평(海平 : 윤석)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 이백년(李百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대(至大) 경술년(충선왕 2, 1310) 4월 계해일에 공을 낳았다. 연우(延祐) 경신년(충숙왕 7, 1320) 공의 나이 11세에 태운사 진전직(泰雲寺 眞殿直)에 임명되었다. 15세에 사설직장(司設直長)에, 16세에 낭장(郎將)에, 19세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이는 영릉(永陵 : 충혜왕)을 시종하여 원나라 조정에 간 다음 해이다. 이 때 진저(晋邸 : 晋宗으로 泰定帝)가 죽자, 문종(文宗)이 강남으로부터 먼저 입궁(入宮)하여 제위(帝位)를 바르게 하고 삭방에서 명종(明宗)을 맞이하였다. 문종이 들에 나가 위로할 때 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독주(毒酒)를 올려 명종이 한밤중에 죽고 육군(六軍)이 소란하였다. 공이 재상 조익청(曺益淸) 이군해(李君侅) 등 관료들과 충혜왕을 좌우에서 도우자 충혜왕이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 공신철권(功臣鐵券)을 받았다. 지순(至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공의 나이 21세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승진하였다.
명릉(明陵 : 충목왕) 즉위년 5월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고, 겨울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4월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 왕정승(王政丞 : 王煦)이 국정을 맡고 구법(舊法)으로 문반의 인선은 전리사(典理司)로 돌리고, 무반의 인선은 군부사(軍簿司)로 돌렸다. 공은 정승을 보좌하면서 조금도 사사로이 하는 것이 없었다. 이듬해 평양윤(平壤尹)으로 나갔다. 공이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서, 1년만에 정사가 잘 이루어져 지밀직(知密直)으로 소환되었다. 공의 나이 38세였다. 현릉(玄陵 : 공민왕) 5년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고, 그 해 겨울에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 수도에 갔다. 의복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18년(1369) 세 번째로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홍무(洪武) 경술년(공민왕 19, 1370) 밀직사(密直使)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 상의회의도감사(知門下省事 商議會議都監事), 그 이듬해 평리(評理)로 승진하였다. 이 해 겨울 중대광 해평군(重大匡 海平君)에 봉해졌다. 염곡성(廉曲城 : 廉悌臣) 윤칠원(尹漆原 : 尹桓) 등 여러 원로들과 결사(結社)하여 편안히 지낸 지 10여년 만인 임술년(우왕 8, 1382) 9월 병이 들어 10월 초9일에 단정히 앉아 돌아가셨다. 공의 나이 73세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관후하고 남과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몽고어에 대략 통하였고 행동거지가 몽고사람과 흡사하였다. 정사에서 대체를 좇으려 힘썼고 까다롭거나 잘지 않았으니, 무릇 장자(長者)였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다.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조씨(趙氏)는 대광 참의찬성사 상의 보문각대제학(大匡 僉議贊成事 商議 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가 문극공(文克公)인 연수(延壽)의 딸이다. 이씨는 대광 월성군(大匡 月城君)인 천(蒨)의 딸이다. 조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장자는 보(寶) 관직이 응양군대호군(鷹揚大護軍)으로 먼저 죽었다. 차자는 진(珎)은 중대광 해평군(重大匡 海平君)이다. 손자가 남녀 약간명 있다. 응양(鷹揚 : 寶)의 아들 가관(可觀)은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으로 경상도부원수(慶尙道副元帥)로 나가 있다. 딸 하나는 위위주부(衛尉注簿) 이지(李持)에게 시집갔다. 해평군(海平君 : 珎)의 아들 창(彰)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고, 다음은 신(莘)으로 지금 덕창부사인(德昌府舍人)이고, 다음은 수(須)로 지금 춘추검열(春秋檢閱)이다. 장녀는 판사(判事) 김구용(金九容)에게, 다음은 낭장 홍윤복(洪潤福)에게, 다음은 사설서령(司設署令) 성부(成溥)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씨 부인은 자식이 없다. 증손이 남녀 약간명인데 모모(某某)이다.
공이 표문을 받들고 사은하러 갔을 때, 내가 서장관(書狀官)이었고 공의 맏아들(尹寶)과 동갑이다. 공을 아버지처럼 대했는데, 내가 요행히 추밀원(樞密院)에 들어갔을 때 공이 복직되어 동료가 되었으나 나는 공을 대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고, 공도 역시 나 보기를 아들처럼 하였다. 내가 공의 묘지명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공의 막내 아들 정당공(政堂公 : 尹珎)이 지금 아버지의 봉작을 이어받았고, 그가 과거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나의 아들 종선(種善)이를 뽑아 문생으로 삼았다. 묘지명을 또 어찌 사양하겠는가.
명(銘)에 이르기를,
해평의 윤씨가 고종 원종을 보필하니
군자의 은택으로 경사로운 복이 면면히 흐르도다.
생각컨대 원수공(元帥公)이 울연히 시중이 되었고,
충간공(忠簡公)이 그를 이어 장자의 풍도가 있으니
젊어서는 빼어난 영재이고 늙어서는 영화를 누렸다.
아들이 이어 재상이 되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손자는 중추(中樞)에 제수되어 해동을 다스리네.
생각컨대 공의 집안은 느긋함과 흥성함을 모두 갖추었으니,
무릇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린 것은
오직 그 선함을 드러냄이라.
내 공에게 아첨함이 아니라,
공은 길이 이 무덤에서 편안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