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염제신신도비(廉濟臣神道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개관
신도비는『목은문고(牧隱文藁)』권15와 『동문선(東文選)』 권119에 실려 있으며, 1382년(우왕 8)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염제신(廉悌臣, 1304~1382)의 자는 개숙(愷叔)이며, 어릴 때 자는 불노(佛奴)이다. 서원(瑞原 : 지금의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증조는 순언(純彦), 조부는 승익(承益), 부친은 세충(世忠)이다. 모친인 가순택주(嘉順宅主) 조씨(趙氏)는 인규(仁奎)의 딸이다.신도비에 따르면 염제신은 고모부인 원나라 사람 중서평장(中書平章) 말길공(末吉公) 밑에서 10여 년간 수업을 받은 후 원나라 진종 황제를 숙위하면서 원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충숙왕 때 고려에 와서 벼슬을 시작하여 충목·충정·공민·우왕 때까지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다. 특히 공민왕 때 공민왕의 개혁, 홍건적의 난, 안동으로 피신한 공민왕을 호종 하는 일 등으로 공신과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배씨(裵氏)는 정(挺)의 딸로,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다.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한공(漢功)의 딸이다. 3남 5녀를 낳았다. 장남은 국보(國寶), 다음은 흥방(興邦), 그 다음은 정수(廷秀)이다. 장녀는 홍징(洪徵)에게, 다음은 임헌(任獻)에게, 다음은 정희계(鄭熙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은 신비(愼妃)이다. 다음은 이송(李悚)에게 출가하였다.
고려국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충경공 염공신도비 병서(高麗國 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曲城府院君 贈諡忠敬公 廉公神道碑 幷序)
금상(今上 : 禑王) 즉위 9년째 되는 임술년(우왕 8, 1382) 봄 3월 태평재상(太平宰相)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79세로 병이 들었다.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 모여 조석으로 탕약(湯藥)을 받들었고, 하늘과 땅에 기도를 올리는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임금 역시 중관(中官)을 보내 문병하고 약과 술을 하사하셨다. 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끝내 효과가 없었다. 아, 운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공은 평소 건강해서 오래도록 앓는 일이 없었다. 늙었어도 정신과 풍채가 더 빼어나 사람들은 수명을 향유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이르고 말았다. 운명이라 하지 않겠는가.
공은 장차 병들었을 때 자제들에게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고 훈계하면서, “내가 죽거든 사흘째 되는 날에 곧장 매장하고 관리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다. 재상(宰相)들은 “곡성(曲城)이 삼일장(三日葬)을 치르라고 유언을 했으니 감히 어길 수 없습니다. 관청에서 장례를 하는 것은 나라의 법입니다. 이를 어긴다면 장차 그 허물을 누가 져야 하겠습니까. 공에게 국장(國葬)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국장을 합니까” 라고 하였다. 도당(都堂)의 관원을 특별히 소집해서 한 가지도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아, 공의 사양이나 재상들이 이의를 거론한 것이나 예(禮)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는 국가를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나의 직분은 바로 이러한 일들을 기록하고 편찬하는 것이다. 하물며 신도비를 지으라는 왕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있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곡성(曲城)의 성은 염씨(廉氏), 이름은 제신(悌臣), 자는 개숙(愷叔), 어릴 때 자는 불노(佛奴)이다. 서원(瑞原 : 지금의 경기도 파주)의 대족(大族)이다. 먼 선조인 현(顯)은 문묘(文廟 : 文宗)를 도와 성균관에서 인재를 뽑았고, 재상이 되었다. 신약(信若)은 명묘(明廟 : 明宗)를 도와 지공거(知貢擧)를 두 차례 역임하고 지위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증조 순언(純彦)은 마지막 관직이 소부승(小府丞)으로, 은청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銀靑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에 추증되었다. 조부 승익(承益)은 흥법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興法佐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監察司事)이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충렬왕을 도와 허시중(許侍中 : 許珙) 조시중(趙侍中 : 趙仁規)과 함께 서로 이어서 정치를 주도하여 당대의 유명한 공경(公卿)들도 함부로 대등한 예를 취할 수 없었다. 부친 세충(世忠)은 마지막 관직이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 監門衛大護軍)이었다. 모친인 가순택주(嘉順宅主) 조씨(趙氏)는 추충보절동덕공신(推忠保節同德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도첨의(判都僉議)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으로 시호가 정숙(貞肅)인 인규(仁規)의 딸이다. 대덕(大德) 갑진년(충렬왕 30, 1304) 10월 무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6세 때 홀로 되었다. 공의 친가와 외가가 모두 시중(侍中)의 집안이라 공을 양육하는데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1세 때 고모부인 중서평장(中書平章) 말길공(末吉公)이 공을 불러 옆에 있게 하고, 유생을 불러 10년간 수업을 받게 하여 덕행과 그릇이 당대의 으뜸이 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8) 원나라 진종(晉宗)이 즉위하자 말길공(末吉公)이 공을 데리고 화림(和林)에 가서 대가(大駕)를 영접하였다. 황제가 공을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궁궐에서 숙위(宿衛)하게 하고, 공을 특별히 보살폈다. 말길공 또한 대신(大臣)으로 황제 또한 신임하였다. 병으로 조회(朝會)하지 못하자, 황제가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여 집에 가서 자문하게 하였다. 또 말길공이 아뢸 일이 있으면 공이 모두 전달하였다. 대부(大夫) 첩실(帖失)이 목이 베이고 그 여동생이 공에게 하사되자, 공은 “신이 비록 무지하나 역적의 무리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하자, 황제가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임술년(충숙왕 9, 1332) 공이 황제에게 “신이 모친을 오래도록 뵙지 못했으니, 뵙게 하여 주십시요” 라고 청하였다. 황제가 공의 말에 감격하여 금강산(金剛山)에 향(香)을 내리게 하고 금자(金字)의 원패(圓牌)를 내렸다. 공의 행차를 영광스럽게 하고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에 원나라의 사신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면서 조정의 위령(威靈)을 빙자하여 고려 재상(宰相) 등 중신(重臣)들을 능욕하고 수령들을 개나 말처럼 취급하였다. 공은 재상에게 공손하고 수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하나의 일도 사적으로 왕에게 청탁하는 일이 없었다. 원나라에 돌아와 상의사(尙衣使)에 임명되었다. 지순(至順) 신미년(충혜왕 1, 1331)에 또 향을 내리려 본국에 왔으며, 더욱 근신하였다. 부로(父老)들은 “나이는 비록 젊지만 노성(老成)한 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참으로 친가와 외가가 시중인 집안의 자손이구나” 라고 하였다.
지순 계유년(충숙왕 복위2, 1333) 공은 모친이 홀로 계신다는 이유로 원나라 조정에 청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郎中)이 되었다. 이때 동료들이 권력을 행사하자 공은 그들과 온 힘을 쏟아 다투어 그들의 권력행사를 억제하였다. 토지와 백성에 관한 송사(訟事)도 모두 해당 관청에 되돌려 주었다. 충숙왕(忠肅王)이 감탄하면서 “염 낭중(廉郎中)은 청렴하고 간소하다” 라고 칭찬하였다. 좌우사(左右司)에서 공문의 결재(決裁)를 청할 적에도 왕은 “우리 낭중이 서명을 하였는가” 하고 묻고, 공의 서명이 있으면 결재를 하고 서명이 없으면 결재를 그만두었다. 왕이 우리 낭중이라고 한 것은 공을 사랑하고 친근하였기 때문이다.
공을 정동행성에 머물게 한 지 9년째 되는 해 왕이 죽었다. 공은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마침 원나라 조정에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의 벼슬로 공을 소환하였다. 품계는 봉훈대부(奉訓大夫)였다. 지정(至正)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사명(使命)으로 강절성(江浙省)에 가 중정원(中政院)의 돈과 재물을 조사하였다. 관리들이 뇌물을 바치며 아부하였으나 공이 모두 물리쳤다. 승상(丞相) 별가불화공(別哥不花公)이 공을 특별히 예우하여,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자 황제에게 공을 천거하면서 “노신(老臣)이 강절(江浙)에 있을 적에 염불노(廉佛奴)가 아주 청렴결백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장차 공을 등용하려 했는데, 마침 대부인(大夫人)이 병들자 돌보기 위해 귀국을 요청하여 등용되지 못하였다.
병술년(충목왕 2, 1346) 6월 17일 명릉(明陵 : 충목왕)이 “염모(廉某)는 황제를 모시면서 원나라의 신하였다. 나의 대부(大父 : 조부) 충숙왕(忠肅王)을 도와 막료(幕僚)로서 함께 국정을 의논하였다. 지금 비록 본국(本國)에서 벼슬한 적이 없더라도, 상법(常法)으로 논할 수는 없다” 하고,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匡靖大夫 三司右使 上護軍)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가을 중대광(重大匡)의 품계로 올리고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곧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로 옮겼고, 겨울 12월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정동행성의 재속(宰屬)이 대신(臺臣)의 장단점을 거론하며 문책을 하려 하였다. 대부(大夫) 이공수(李公遂)였다. 공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기강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대부(李大夫)는 한 시대의 인걸인데, 그를 욕보여야 되겠는가.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배운 것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고, 들어가 보고하여 일을 중단하였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국상(國喪)을 당해 정승 왕후(王煦)가 천자에게 조회(朝會)하러 가면서 국정을 공에게 위임하였는데, 공이 공평하고 타당하게 나라 일을 처결하여 중외(中外)가 모두 편안하였다. 기축년(1349) 총릉(聰陵 : 충정왕)이 즉위하여, 공을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判版圖)에 임명되었다. 경인년(충정왕 2, 1350) 표문을 받들고 원나라 수도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신묘년(1351)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을 중용(重用)하려 하였다. 공의 외가 사람인 조일신(趙日新)이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이를 저지하였다. 조일신이 제가된 그 이듬해에 왕은 “염모(廉某)가 훌륭하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일신이 너무 미워하여 그가 일을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등용하지 못했다. 지금 늦출 수 있겠는가” 하고, 공을 다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였다. 갑오년(공민왕 3, 1354) 정월 11일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左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 領景靈殿事)에 임명되고, 2월 16일 다시 우정승 판전리 영효사관(右政丞 判典理 領孝思觀)에 승진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예전과 같이 하였다.
공은 뜻을 가다듬고서 여러 정사를 새롭게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해 여름 정승 채하중(蔡河中)이 원나라 탈탈태사(脫脫太師)의 위세를 등에 업고 왕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복직을 꾀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왕도 핍박을 당한 나머지 채(蔡)를 다시 재상으로 삼고 공을 곡성(曲城)에 봉하였다. 태사가 원나라로 불러들인 사람들은 모두 재상과 날래고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공도 그 일행 중에 있었다. 평양(平壤)에 이르렀을 때 날래고 용감한 무리들이 “우리가 친족을 떠나 조상의 무덤을 버린 채 죽을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느 날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고, 공에게 알리고 가지 않으려 하였다. 공은 “그것은 바람직한 계책이 못된다. 우리 임금은 하늘과 같으니, 하늘 아래 어디로 도망을 칠 수 있겠는가.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어찌 배반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정승(政丞) 유탁(柳濯)과 함께 샛길로 빨리 달려갔다. 연경(燕京)에 도착한 뒤에 왕이 사람을 급히 보내 공을 귀국시켜 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염모(廉某)는 고려의 대신이고, 대족(大族)이다. 예우로서 보내도록 하라” 하고, 휘정원(徽政院)에서 연회를 베풀어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기씨(奇氏 : 기철) 일당을 죽이고, 공에게 명하여 북쪽 변방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였다. 대장 인당(印瑭)이 제멋대로 부장(副將) 강중경(姜仲卿)을 죽이자, 국가에서 그가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즉시 토벌하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계책을 써서 죽여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원 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자가 국경에 이르러 변란이 일어난 까닭을 힐문하였다. 공은 나라를 뒤엎으려 한 기씨 일당의 명확한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뒤에 보고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였다. 황제의 노여움이 풀리고 온 나라에 사면의 명령이 내려졌다. 모두 공이 대응을 잘 한 노력 때문이다.
그해 겨울 도원수(都元帥)로 북쪽 변방을 진무(鎭撫)하였다. 왕은 절월(節鉞)을 주면서 “공이 떠난 뒤에는 내가 북쪽을 염려하지 않겠다” 하였다. 공은 “신도 감히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전하를 번거롭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염공(廉公)은 나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군정(軍政)을 행하면서 마초(馬草)와 군량의 비축을 우선으로 하고, 성곽의 수축을 다음으로 하고, 무기의 정돈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공은 평소에 마음에 정한 일이라도, 반드시 최부사(崔副使)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부사는 지금의 영삼사공(領三司公)이다. 공이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開府儀同三司 上柱國 守門下侍中 上將軍 判兵部事 領景靈殿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판이부사 영효사관사(判吏部事 領孝思觀事)로 승진되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공은 가득 차면 흘러넘친다고 하면서 사직하였다.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염공이 관리의 인사를 맡은 것이 다섯 차례이나, 사사로운 은혜나 원한으로 한 사람이라도 승진하거나 퇴출시킨 적이 없었다. 공의 종족이 비록 많았으나 화려한 요직에 있는 자가 없다. 담백하여 욕심이 적다” 라고 하였다. 공이 후(侯)에 봉해져서 집에 거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홍건적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임인년(공민왕 11, 1362)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壁上三韓三重大匡 曲城侯)로 바꿔 임명되었다. 임금의 수레를 상주(尙州)로 호종하고 다시 청주(淸州)로 옮겼다. 이때 공이 시중 윤환(尹桓), 이암(李嵒)과 함께 왕을 수행하였다. 이듬해 3월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 왕이 신돈(辛旽)의 말을 듣고서 관리의 인사를 행하였다. 신돈은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왕에게 참소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기유년(공민왕 18, 1369) 공을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특진시키고 곡성백(曲城伯)에 봉하였다. 신돈이 또 왕에게 공을 참소하자, 왕이 공의 아들과 사위에게 신돈과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공에게 깨우쳤다. 공은 자신의 지키는 바를 더욱 굳게 하였다. 왕은 공을 더욱 신임하였다. 올라성(兀羅城)의 전투에서 여러 장수들이 공의 지휘를 받아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
신돈이 제거된 뒤 왕이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겨, 보국(輔國)이라는 두 글자를 더 하고 봉읍(封邑)을 예전과 같이 하고, 친히 초상화를 그려 하사하고 공의 딸을 맞아들여 신비(愼妃)로 삼았다. 부인 권씨(權氏)를 봉하여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의 호를 내렸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모친에게 봉록(俸祿)을 지급하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 뒤에 중자(仲子)인 평리(評理 : 염흥방(廉興邦))가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당시 세상에서 모두 부러워하였다.
계축년(공민왕 22, 1373)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품계와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또 판개성 겸 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判開城 兼 監春秋館事 曲城府院君)을 더해주었다. 이는 공을 총애하기 때문이다. 행신(倖臣) 김흥경(金興慶)이 사적인 청탁을 많이 하였으나 공이 용납하지 않았다. 흥경이 원망하는 말을 하자, 왕은 “시중은 원나라에서 배웠고 성품이 고결하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대신의 마음 씀에 대해 그대가 아는 바는 아니다” 라고 하였다. 흥경이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 우왕)이 즉위하자 공을 영문하사(領門下事)에 임명하고 다시 영서연(領書筵)을 맡게 하였다. 이는 다섯 임금을 모신 원로이기 때문이다. 을묘년(우왕 1, 1375) 정월 5일에 왕이 상을 마치고 정전(正殿)에 나아갔다. 재신들이 축수(祝壽)를 올릴 때 공이 맨 먼저 “임금이 되기도 어렵고 신하가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말의 뜻이 분명하고 간결하여 왕이 얼굴빛을 고쳤다.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領三司事)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과 같이 하였다.
병진년(우왕 2, 1376) 10월 원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적흠(翟欽)이 와서 조칙을 내리고 공에게 자덕대부 장작원사(資德大夫 將作院使)에 임명하였다. 공은 절하고 받은 뒤 사신에게 말하기를 “신이 늙은 몸으로 성은(聖恩)을 받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답해 드릴 길이 없어 구구한 정만 그저 천지처럼 아득합니다” 하였다. 정사년(우왕 3, 1377) 도총도감(都摠都監)을 설치하여 오부(五部)의 병마를 훈련시키게 하였는데, 공에게 그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기미년(우왕 5, 1379) 판문하사(判門下事)가 되었다. 경신년(우왕 6, 1390)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옮겼으며, 그 해 겨울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공이 이미 늙었지만 나라에 큰 의혹이 있을 때에는 재상이 반드시 공과 윤칠원(尹漆原 : 尹桓)을 청하여 회의를 하였다. 공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할 말을 다하였다.
공은 집안에 거처할 때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다. 집을 여러 번 옮겼지만 반드시 별원(別院)을 두어 마치 산림(山林)처럼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매헌(梅軒)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담담하게 지냈다. 손님이 찾아와 술자리를 벌일 때 안주를 지극히 정결하게 하여 기분이 좋으면 그만두었다. 풍류(風流)가 시원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
금년 정월 기로(耆老)와 함께 현릉(玄陵)을 참배하였다. 느낌이 있어 돌아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주도 없는 몸으로 현릉의 과분한 총애를 받고 시중의 자리에 있은 지 29년이나 된다. 그리고 나이도 벌써 79세이다. 병이 자주 들어 나는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고 하였다. 3월 2일 병이 들어 18일 정묘일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그달 20일 기사일 임강현(臨江縣) 대곡(大谷)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이 평소에 터를 잡아 놓은 곳이다. 아, 공이야말로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할 만하다.
왕은 중관(中官)인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김실(金實)을 보내 문병하자, 공은 의관을 갖추고서 궁중의 약과 술을 받고, 김실에게 “그대는 나를 대신해 왕에게 말을 잘 전해 달라. 왕께서 나를 생각하신 것은 내가 선왕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이네. 나는 이제 몸이 위태로우니, 왕은 날로 신중하시어 하늘의 복을 영원히 받게 되기를 바랄 뿐이네. 이것이 나의 소원이네” 하였다. 이날 근비(謹妃)와 의비(毅妃)가 사람을 보내 궁궐의 술을 내렸다. 아, 공이야말로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배씨(裵氏)는 중대광 완산군(重大匡 完山郡)인 정(挺)의 딸로,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다.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원나라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列大夫 太子左贊善 推誠同德協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醴泉府院君 領藝文館事)로 시호가 문탄(文坦)인 한공(漢功)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근검하고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쳤으며, 평소에 비단옷을 몸에 두르지 않았다. 공보다 몇 년 앞서 병이 들어, 공은 약을 구하고 오랫동안 더욱 부지런히 부인의 병을 낫게 하려 했다.
3남 5녀를 낳았다. 장남 국보(國寶)는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推忠輔理功臣 重大匡 瑞城君 藝文館大提學)이다. 다음 흥방(興邦)은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 전광정대부 문하평리 겸 성균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상호군(忠勤翊戴爕理贊化功臣 前匡靖大夫 門下評理兼成均大司成藝文館大提學上護軍)이다. 그 다음 정수(廷秀)는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지전리 내시다방사(正順大夫 密直司知申事 兼 判典儀寺事 右文館提學 知製敎 充春秋館修贊官 知典理 內侍茶房事)이다.
장녀는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 홍징(洪徵)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제학(奉翊大夫 判內府寺事 進賢館提學) 임헌(任獻)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 奉翊大夫 密直使 上護軍) 정희계(鄭熙啓)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바로 신비(愼妃)이다. 다음은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 三司右尹) 이송(李悚)에게 출가하였다.
혜주(惠珠)는 통제원주지(通濟院住持)인데, 공의 부실(副室)인 김씨의 소생이다. 광원(廣元)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奉順大夫 判司僕寺事)인데, 공의 부실인 이씨의 소생이다. 중랑장(中郞將) 홍문필(洪文弼)에게 출가한 딸이 있는데, 김씨의 소생이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서성(瑞城)은 현복군(玄福君) 권렴(權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남 치중(致中)은 친어군호군(親御軍護軍)이고, 다음 치용(致庸)은 전의부령(典儀副令)이고, 딸은 사헌지평(司憲持平) 안조동(安祖同)에게 출가하였다. 평리(評理)는 종부부령(宗簿副令) 조문경(趙文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녀는 위위소윤(衛尉少尹) 임치(林㮹)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지신사(知申事)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조득주(趙得珠)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외손자와 외손녀가 약간 명 있다. 밀직(密直)의 아들 상빈(尙賓)은 성균학유(成均學諭)이고, 다음 상부(尙溥)는 산원(散員)이고, 다음 상연(尙淵)원 권무(權務)인데 모두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딸은 모두 어리다. 내부(內府)의 아들 공위(公緯)는 낭장(郎將)이고, 다음 공진(公縝)은 별장(別將)이고, 나머지 아들과 딸들은 모두 어리다. 밀직사(密直司)의 아들 길상(吉祥)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딸은 어리다. 우윤(右尹)의 아들 길(佶)은 권무(權務)이고, 다음은 일(佾)인데 어리다. 판사(判事)는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다. 중랑장(中郞將)은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증손자와 증손녀가 약간 명 있다. 호군(護軍)은 전법판서(典法判書) 박사신(朴思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怡)를 낳았는데, 지금 권무(權務)이다. 부령(副令)은 밀직제학(密直提學) 윤방안(尹邦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순(恂)을 낳았는데 지금 권무이다. 지평(持平)은 아들 금강(金剛)을 낳았는데 지금 권무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아, 공이 다섯 가지 복을 모두 갖추고 자손들이 번창한 것이 이상과 같다.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한 대우한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세신(世臣) 구가(舊家)에게 남아있는 경사로움이기도 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푼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에 감흥이 일어나는 바가 있다. 가령 우리 공과 같은 분이 서로 이어서 묘당(廟堂)의 위에 계신다면, 태평 시대를 구가하는 날을 바로 오늘날에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 공이 떠나셨다. 아, 공이 떠나셨다. 이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공은 젊은 나이에 원나라 궁궐에서 이름을 날렸고
돌아와 정동성의 관원이 되어서 정치도 다스려지고 백성도 편했다오.
임금님 다섯 분을 차례로 섬기면서 나라의 위엄을 떨치고
산악을 진정시키고 천둥 벼락을 움직였네.
시대가 어렵게 되자 때마침 공이 나와 일을 처리하자
삼군(三軍)이 기꺼이 목숨 바쳤고 백 가지 법도가 바르게 되었다.
백성들이 양육되고 종사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공이 바로잡고 곧게 펴 주면서 정성껏 양육하며 보살폈다.
온갖 병이 일시에 낫게 되고 취했던 자들이 깨어나니
태평 재상 칭호를 붙였나니 신명도 듣고서 머리 끄덕이리라.
아 우리 현릉께서도 공의 초상화 친히 그려 주셨나니
높은 공훈과 성대한 공의 덕성이여. 단청으로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
공은 원로대신으로 한 나라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는데
백 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다니
천지가 온통 아득하게 어두워졌네.
높은 언덕 낮은 늪 판연히 나눠지고 냇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곳.
산이 멈춰 서서 정기가 쌓였나니 아름다워라.
공의 영원한 안식처여.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빗돌 하나. 위로 솟아 하늘의 별에 닿을 듯.
천년토록 잘못 전해지는 일 없이 우리 동쪽 땅을 환히 비추리라.
참고문헌
전체 3개 / 페이지 ( 1 / 1 )
금석문검색 - 참고문헌
논문
1994
權兌遠, 1994, 「廉悌臣」『대전문화』3,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논문
1991
洪榮義, 1991, 「恭愍王의 反元政策과 廉悌臣의 軍事活動; 國防改革을 中心으로」『軍史』2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