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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묘지(尹澤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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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권17 및 『동문선(東文選)』권127에 실려 있으며, 1381년(우왕 7)에 이색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인 윤택(尹澤, 1289~1370)의 자는 중덕(仲德)이다. 무송현(茂松縣 :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증조부는 양비(良庇), 조부는 해(諧), 아버지는 수평(守平)이다. 어머니 김씨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이다.묘지명에 따르면 윤택은 고모부인 윤선좌(尹宣佐)에게 배웠으며,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능했다. 1320년(충숙왕 7) 과거에 급제하였다. 윤택은 충숙왕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공민왕 때 「무일편(無逸篇)」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했으며, 불교에 혹신하고 백악(白岳)으로 천도하려는 공민왕을 비판한 내용이 묘지명에 실려 있어, 윤택의 유자(儒者)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윤택은 네 번 장가갔다. 문씨(文氏)는 부(富)의 딸로 아들은 구생(龜生)이다. 그 다음 이씨는 장연(長衍)의 딸로 아들은 봉생(鳳生)이다. 맏딸은 김요(金耀)에게, 다음 딸은 허식(許湜)에게 각각 시집갔다. 셋째 부인 기씨(奇氏)는 연(璉)의 딸로 아들은 동명(東明)이다. 딸은 낭장(郎將) 박구령(朴龜齡)에게 시집갔다. 넷째 부인 기씨(奇氏)는 정보(鼎輔)의 딸이다. 이존중(李存中)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율정선생 윤문정공묘지명 병서(栗亭先生 尹文貞公墓誌銘 幷序)
율정선생(栗亭先生)을 장사한 지 석 달이 지나, 선생의 손자 소종(紹宗)이 그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선생의 묘지명을 청하였다. 아 선생이 돌아가셨구나! 내(李穡)가 연경(燕京)으로부터 선자(先子 : 이색의 부친인 李穀)의 상을 듣고 달려오니, 선생이 여러 분보다 먼저 오셔서 곡하였고, 곡을 마치고 다시 나의 손을 잡고 한참동안 긴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고 돌아가셨다. 이제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길이 멀어 기어가서 한 번 곡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묘지명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묘지명을 쓴다.
공의 이름은 택(澤), 자는 중덕(仲德)이다. 증조부 양비(良庇)는 무송현(茂松縣 :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호장(戶長)이었다. 조부 해(諧)는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 國學大司成 文翰司學)으로 은퇴하였다. 상주(尙州) 사록(司錄)으로 있을 때, 고을 백성이 그 누이를 난행(亂行)한 자가 있었다. 이때 가뭄이 심했다. 정헌공(正獻公 : 윤해)이 장관과 다투어 마침내 그를 극형에 처하자, 하늘이 과연 비를 내렸다. 형헌(刑憲)의 관직을 역임할 때 강직함을 견지하였으며, 경상·전라·양광·회양(淮陽) 등의 여러 도는 모두 공이 안찰하였다. 중승(中丞)일 때 죽도 이어 먹지 못하여, 콩을 삶아 주림을 채워, 세상에서 청백리라 하였다.
아버지 수평(守平)은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에 추증되었는데, 부친인 정헌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어머니 김씨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이다. 지원(至元) 기축년(충렬왕 15, 128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에 학업에 나아가, 배우면 문득 외웠다. 정헌공은 공이 경구(警句)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고 울면서, “우리 가문를 일으킬 자는 바로 너다. 수평이 죽지 않았구나”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깊이 자립의 뜻을 세우고, 일찍이 장원 급제한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글을 배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능했다. 항상 범문정공 선생(范文正公 先生)의 “천하의 근심을 내가 먼저 걱정하며, 천하가 즐거운 후에 나도 즐거워한다” 라는 말을 외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평범하게 살아가겠는가” 하였다. 연우(延祐) 정사년(충숙왕 4, 1317)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경신년(충숙왕 7, 1320) 수재과(秀才科) 보검부(寶?賦)로 1등으로 급제하였다. 사람들이 그 글을 많이 애송하였다.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임명되어 농경을 감독하고 학교를 수리하며, 백성들에게 조상 숭배를 권장하여 예절과 풍속이 진흥되었다. 중앙에 올라와 서적녹사(書籍錄事)가 되었고, 교감(校勘)과 검열(檢閱)이 되었다. 벼슬은 겨우 9품이었는데, 스스로 재상으로 자처하였다. 혹자는 너무 거만하다 하였으나, 공은 의연한 태도로 자처하면서 의심하지 않았다.
지순(至順) 임신년(충숙왕 복위1, 1332) 의릉(毅陵 : 충숙왕)이 원나라 수도의 사저에 있었다. 공이 홀로 말을 타고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한 번 보고 곧 국가의 큰 그릇임을 인식하고, 뒷일을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왕의 뜻은 지금의 전하(공민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공은 절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이미 늙었으니 어찌 능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다음 해 왕이 서경에 머무르자, 검열권참군(檢閱權參軍)으로 접대를 법도 있게 하였다.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였다. 왕이 항상 감탄하여 말하기를, “어질도다. 회(回)여!” 하였다. 이는 공의 용모가 서역인(西域人)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조서를 가진 사신이 와서, 공에게 명하여 조서를 읽으라고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조서는 원래 내외 지제교(內外 知製敎 : 兩製라 함)1)가 읽는 데, 참군(參軍)이 읽는 것은 예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참군으로 양제(兩製)를 삼는 일도 내게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명하여 권응교(權應敎)를 삼고 자복(紫服)를 하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부윤(府尹)으로 발탁하려 했는데 관품이 낮다고 하여 판관(判官)으로 승진시켰다. 어떤 사람이 공을 불손한 자로 무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윤생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필히 너의 무고일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되어 관리의 인사를 맡았다. 왕이 공의 아들에게 호군(護軍) 벼슬을 주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또 어질고 공로 있는 신하도 오히려 정체하고 있는데, 감히 신의 자식에게 사사로이 벼슬을 주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더욱 아끼고 중히 여겼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우대언(右代言)에 옮겨, 성균관에서 선비들을 시험하고 안원룡(安元龍) 등 99명을 선발하였다. 알려진 명사가 많았다. 3월 계미일 왕이 병으로 눕게 되자, 왕이 다시 원나라 수도에서 하던 말을 공에게 하였다. 공이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번거롭게 걱정하지 마소서” 라고 하였다.
영릉(永陵 :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서 정치를 새롭게 하고 혁신을 도모하였다. 공은 은거하여 스스로 수양하였다.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공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정사에 관용을 위주로 하면서도 강폭한 자를 제어하여, 나약한 자를 붙들어 세웠다.
총릉(聰陵 : 충정왕)이 즉위하자 다시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이전에 명릉(충목왕)이 돌아가자, 백성들의 여망이 모두 지금의 왕에게 돌아갔다. 공이 발의하여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본국의 형제와 숙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까닭과 젊은 왕이 그 보위를 감당하여 보전하지 못할 상황을 말하였는데, 그 언사가 매우 절실하였다. 총릉(충정왕)이 이에 원한을 품었던 까닭에 이같이 좌천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신묘년(공민왕 즉위, 1351) 왕이 처음 정사에 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의연히 당시의 일을 바로잡는 것을 그의 책무로 자임하고, 상소를 올려 건의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개성윤(開城尹)으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공의 나이 이 때 64세였다.
근신(近臣)이 향약(鄕樂)을 원나라에 바칠 것을 건의하자, 공이 이 사실을 듣고 상소하기를, “세조 황제가 일찍이 이미 물리친 것을 이제 다시 바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또 비용을 절약할 것을 상소하자, 왕이 깊이 이를 받아들였다. 남경(南京)에 궁실을 짓자, 공이 말하기를 “중 묘청이 인종을 혼란케 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교훈이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고, 지금 사방에 도적의 침범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해 길러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노역에 동원한다면 아마도 근본을 상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명하여「무일편(無逸篇)」을 써서 재상들에게 하사하고, 공에게 명하여 이를 강의하게 하였다. 이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로를 말하면서, “원하건대 전하께서 성왕을 본 받아 능히 주공의 훈계를 듣고, 삼가하고 공경하며 또한 억제하고 두려워하시면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의 안색이 변하였다. 공은 또 진서산(眞西山 : 중국 송 나라 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본조의 중서령(中書令)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올린 글을 모두 강의하였다.
이 때 왕이 불교에 깊이 빠져 초연히 멀리 갈 뜻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민생을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필부가 윤리를 끊는 일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만약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공자의 도가 아니면 불가하니, 원하건대 성의를 더하소서” 하였다. 또 백악(白岳)의 공사에 대하여도 공이 그 폐해를 극언하면서, “모든 일의 득실을 성상이 비록 밝게 아는 것도 대신에게 위임하고 즉시 처분을 내리지 않아, 그대로 미루고 나가는 동안에 이미 그 폐해가 이루어져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술을 내려 주자 공은 단번에 석 잔을 마시고도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홍언박(洪彦博)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윤공의 우직함이 이에 이를 줄은 몰랐다. 내가 따를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공이 비록 벼슬에서 은퇴하였으나 선왕의 부탁으로, 일찍이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혹 지나치게 강직한 지경에 이르러도 왕 또한 너그럽게 용납하였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 공의 나이 76세로 병이 생기자, 금주(錦州 : 지금의 충남 금산군)로 돌아갈 것을 청하여 스스로 산수를 즐긴 지 7년이었다. 그러나 임금을 근심하는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경술년(공민왕 19, 1370) 8월 병자일 자손들을 앞에 불러 놓고 훈계하기를, “우리 정헌공께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청백 충직하신 것으로서 일시에 이름이 있었고, 우리 선군께서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항상 선대의 뜻을 능히 잊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어쩌다가 왕의 보살핌을 받아 총애와 녹봉이 분에 넘쳤다. 나이 또한 팔순을 넘었으니, 이는 모두가 선대의 숨은 덕의 소치요, 정헌공의 청백이 남긴 바이다. 너희들은 이를 굳게 지키고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내가 장차 죽거든 장사하는데 꺼리어 불교방식을 사용하지 말고, 사치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정유일 세상을 마쳤다. 이 날 저녁에 하늘로부터 큰 바람과 비가 일더니, 입관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쳤다. 기해일 대부인(大夫人)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 부음을 아뢰니, 왕이 몹시 애도하고 대상(大常)에게 명하여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공의 평생이 흠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이 일찍 부친을 잃어 미처 그 얼굴도 알지 못하였으나, 제사 때마다 분묘에 올라가면 반드시 곡하는데 몹시 애통하게 하였고, 또 서적에서 부자의 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언제나 눈물을 흘려 기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항상 주머니 한 개를 차고 있다가 별미를 얻으면, 반드시 그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돌아가서 대부인에게 드렸다. 남들이 비웃어도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윤장원(尹壯元)이 돌아가고 그의 손녀 둘이 의탁할 곳이 없었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우리 고모부의 손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으랴!” 하고 선비를 택하여 시집보냈다. 원나라 수도에서 지낼 때에 길에서 금 백 냥을 떨어뜨린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지키고 그 주인을 기다리니, 그 주인이 울면서 깊이 사례하고 갔다. 그러나 조금도 남에게 덕을 보인 빛을 보이지 않았다. 공은 평생을 베 이불과 헤어진 자리를 깔고 덮었고, 혹은 끼니를 건널 적도 있었으나 편안해 하였으며, 봄 가을의 좋은 때에는 반드시 술자리를 베풀고 손을 맞았으니, 그 본연의 성정에 맡겨 자적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네 번 장가갔다. 문씨(文氏)는 진사 부(富)의 딸로 아들 구생(龜生)을 낳았는데, 산원(散員)이다. 그 다음 이씨는 시위호군(侍衛護軍) 장연(長衍)의 딸로 아들 봉생(鳳生)을 낳았는데, 별장(別將이다. 맏딸은 진사 김요(金耀)에게, 다음 딸은 죽은 기거랑 지제고(起居郞 知製誥) 허식(許湜)에게 각각 시집갔다. 그 다음 부인 기씨(奇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추증된 연(璉)의 딸로 아들 동명(東明)을 낳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산랑(理部散郞)이다. 딸은 낭장(郎將) 박구령(朴龜齡)에게 시집갔다. 또 기씨(奇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 정보(鼎輔)의 딸이다. 죽은 진사 이존중(李存中)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손자는 남자가 9명이다. 효종(孝宗)은 산원으로, 계사년(공민왕 2, 135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창종(昌宗)은 산원이며, 사종(嗣宗)은 흥숭궁녹사(興順宮錄事)이다. 선창(宣暢)은 불도를 배웠다. 소종(紹宗)은 을사년(공민왕 14, 1365)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산랑(禮部散郞)이다. 회종(會宗)과 흥종(興宗)은 목감직(牧監直)에 있고, 무종(茂宗)과 수종(秀宗)이 있다. 손녀가 4명이고, 외손은 허조(許操)와 성균생원(成均生員) 박술(朴戍) 2명이다. 외손녀가 3명과 증손자 4명은 아직 모두 어리다.
아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은 뛰어난 인재는 세상에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와도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도 쓰이지 못하거나, 쓰인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천명이다. 율정 선생과 의릉(毅陵 : 충숙왕)의 만남은 천년에 한번 만나는 기회이나, 의릉이 너무 빨리 돌아가셨고, 지금의 임금께서도 이미 깊이 선생을 알아, 손수 진서(眞書 : 楷書)로 율정(栗亭)의 두 글자를 내려 그 예우 또한 극진하였다. 공이 조정에 있은 지 겨우 수개월을 지나서 벼슬에 은퇴하였고, 집에서 19년의 긴 세월을 한가로이 보내면서 올린 곧은 논의가 비록 절실하였다 하나, 끝내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아 슬프다.
명에 이르기를
당당한 저 문정(文貞)이여 높게 보고 활보하는구나
비록 말단 관료의 자리에 끼어 있어도
그 우뚝한 재상의 기상
의릉(毅陵)이 한 번 보고 마음을 열어
조용히 뒷일을 부탁하니
과연 그 포부와 맞았구나
이미 참군(?軍) 자리에 시험하고, 다시 부윤에 임명하려 하여
우선 판관에 승진시키니 특별한 대우가 아니더냐
임금의 말씀을 출납하고
관리의 선발에 참여하게 하니
장차 많은 시련을 주어 크게 쓰려던 것이
홀연한 승하에 비오는 듯한 그 눈물,
해를 붙든 그 충성, 먼저는 막혀있으나 뒤에는 형통하나니
사람들은 공의 등용을 기대하였고 공은 도리어 불평을 품었었다
그 불평이 무엇이던가 내가 되풀이하여 한 말
입에는 쓰나 약과 같은 그 말을 어찌하여 듣지 않았더란 말인가
금주의 산기슭, 울창한 저 숲 속에
기운 올라 하늘을 쏘니, 실로 공의 무덤이다.
그것을 혹 믿지 못하겠거든 이에 새긴 글을 보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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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검색 - 참고문헌
단행본
2001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단행본
2001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논문
1999
金春周, 1999, 「《東文選》所載 墓誌銘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논문
1989
金龍善, 1989, 「高麗支配層의 埋葬地에 대한 考察」『東亞硏究』17 ; 2004, 『고려금석문연구-돌에 새겨진 사회사-』,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