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이적묘지(李績墓誌)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개관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6과 『동문선(東文選)』권122에 실려 있으며, 1225년(고종 12)에 이규보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이적(李績, 1162~1225)은 지평현(砥平縣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사람이다. 묘지명에는 조상의 이름이 미상이나,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아버지는 이준선(李俊善)이다. 또한 묘지명과 달리 열전에는 이름을 이적(李勣)으로 기록하고 있다. 묘지명에는 이적이 1216년 거란족이 쳐들어 왔을 때 공을 세운 기록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명종 때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맹주(猛州 : 지금의 평남 맹산군)수령, 내시(內侍), 합문지후(閤門祗候), 고주(高州 : 지금의 함남 고원군)수령,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추밀원사(樞密院使) 등을 역임하였다. 부인의 성명은 미상이며, 슬하에 자식이 없다.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어사대부 이공묘지명 병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御史大夫 李公墓誌銘 幷序)
나는 일찍이 ‘용맹이란 반드시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먼저 기(氣)로 근본을 삼고 의(義)로 주인을 삼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의보다 중하면 그 기가 겁을 내고, 기가 겁을 내면 비록 무사의 관을 쓴 용사라도 싸움하는 마당에서 떨 수 있다. 의가 사는 것보다 중하면 그 기가 격동하고, 기가 격동하면 비록 허리띠를 느슨하게 맨 군자라도 용감하게 구군(九軍) 속으로 들어가 조금도 두려운 모습이 없을 수 있다. 이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이다. 대개 의라고 하는 것은 국난을 구제하고 만민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니, 몸으로 대신하고 분발하여 살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오직 추밀상국(樞密相國) 이공(李公) 한 사람뿐이다.
정우(貞祐) 5년 병자(고종 3, 1216 )에1) 거란(契丹)이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삼군(三軍)에게 토벌하도록 명하고, 공을 우군병마판관(右軍兵馬判官)으로 삼았다. 공은 오랑캐와 더불어 관화역(貫花驛) 남쪽 언덕에서 싸웠다. 오랑캐가 승세로 진격해오자 아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 한 사람도 뒤돌아보는 자가 없었다. 공이 홀로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나가 손수 오랑캐 수 명을 죽이고 난 뒤에, 드디어 무리를 꾸짖어 함께 나가자 오랑캐의 무리가 그만 물러갔다. 이날 공이 아니었다면 관군이 위태할 뻔하였다. 이듬해 좌군병마부사(左軍兵馬副使)가 되어 다시 오랑캐와 광탄(廣灘)에서 싸웠다. 공이 먼저 대첩(大捷)을 거두고 사로잡은 적이 매우 많았다. 왕이 그의 용맹을 기특하게 여겨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조금 뒤 장작감(將作監)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자, 조정은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에게 각각 관내의 군사를 거느리고 삼군(三軍)에게 나아가 우익(右翼)이 되게 하였다. 이때 오랑캐 군사가 요해처를 막아 진을 치고 있었다. 원수(元帥)가 비밀히 그 길을 경유하지 말라고 전해 주자, 공은 “싸우러 나가는 것은 원래 적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적을 피하는 것은 용감하지 못한 일이다. 지름길을 따라 진군하면 이것은 겁내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드디어 바로 오랑캐의 진지를 뚫고 행군하였다. 오랑캐가 나와서 포위하였으나, 공이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으며 적의 머리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베었다. 포로를 원수부(元帥府)에 바치자, 원수가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얼마 뒤 공에게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군수 물자를 순주(順州 : 지금의 평남 순천군)로 압송하게 하였는데, 오랑캐가 은주(殷州 : 지금의 평남 순천군 殷山面)로부터 나와 갑자기 공격하였다. 공이 오직 부하 군사 1백여 명과 함께 싸워 물리쳤다. 원수가 성위에서 바라보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기묘년(고종 6, 1219) 3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불려 왔다. 이 해 도적이 차츰 평정되고 남은 무리는 강동성(江東城 : 지금의 평남 江東군)에 들어가 스스로 보전하고 있었다. 조정은 정예병(精銳兵)을 훈련시켜 공을 도통(都統)으로 삼으려 했다. 공은 군사를 거느리는 것을 사양하고 단기(單騎)로 가서 그곳의 군사로 적을 쳐서 평정하고, 그대로 머물러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이듬해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으로 불려 왔다. 대개 공이 일찍부터 장군을 굳이 사양했기 때문에 후설(喉舌)의 귀한 관직을 주어 공을 총애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적(績)이다. 조상은 지평현(砥平縣) 사람이다. 증조부는 모(某)이며, 조부는 모(某)이다. 아버지 모(某)는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공은 처음 다방(茶房)에 속하였다가 맹주(猛州 : 지금의 평남 猛山군) 수령으로 나갔다, 교체되면서 8년간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명창(明昌 : 금(金) 장종(章宗)의 연호, 1190~1196) 연간 다시 다방에 속했다가 내시(內侍)로 적을 옮겼다. 여러 벼슬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고주(高州 : 지금의 함남 高原군)의 수령으로 나갔다 돌아와 상사봉어(尙舍奉御)가 되고, 도관(都官)과 병부(兵部)의 두 원외랑을 지냈다. 또 다시 옮겨 군기·장작감(軍器·將作監) 이부시랑(吏部侍郞) 상서우승(尙書右丞)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 사재경(司宰卿) 판태복사(判太僕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정우(貞祐) 10년2) 임오년(고종 9, 1222) 추밀부사(樞密副使)로 발탁되었다. 갑신년(고종 11, 1224) 추밀원사(樞密院使)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64세이다.
공은 처음에 모관(某官)인 모씨(某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후손이 없다. 뒤에 모관(某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역시 후손이 없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정직하며 평화롭고 공손하였다. 사람들이 일찍이 공이 화내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귀한 벼슬에 올랐어도 항상 한 방에 혼자 거처하여 담담하기가 청빈한 서생과 같으며 집안일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부드럽고 나약하여 담력과 용맹이 없는 자 같으나, 싸우는 전쟁터에 나가면 용맹이 남보다 뛰어났다. 무리 중에 뛰어남이 이와 같은데 어찌 보통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옛 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남긴 청렴과 높은 절개, 이익을 주고 피해를 제거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공의 충의용렬(忠義勇烈)한 뛰어난 공업(功業)을 논하자면, 이런 것들은 공에게 자질구레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갖추어 적지 않는다.
양자(養子)인 모관(某官)인 모(某)가 와서 묘지명을 간곡하게 청하여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군자의 용맹은 반드시 의리에 근본하는데,
의리는 마음에서 나옴이라 격동하는 것이 기운이라네.
기운으로 격동하고 또 지혜로 도우니,
이것으로 적을 당하면 무엇이 두렵고 무서우리.
이내 몸 버릴망정 사람 살리는 일 귀하거니,
사람 살리면 군사 완전하고 군사 완전하면 내 몸도 온전하다네.
몸을 버려 온전함 얻으니 이것이 더욱 어진 일.
훌륭한 우리 님 지혜와 용맹을 겸하셔라.
온 나라의 성곽이요. 온 군사의 하늘이었네.
어찌 이렇게 불행하여 어느새 유수처럼 가셨는가!
빛나는 그 이름만이 일월과 함께 달려 있네.
백도(伯道)3)처럼 후손이 없으니 하늘도 무심하다.
좋은 돌에 명문을 새기거니 지하에도 빛이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