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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유묘지(韓宗愈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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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동문선(東文選)』권125에 실려 있으며, 1354년(공민왕 3)에 이인복(李仁復)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한종유(韓宗愈, 1287~1354)의 자는 사고(師古)이며, 한양(漢陽)사람이다. 증조는 원서(元諝), 조부는 언(彦), 아버지는 영(英)이다. 어머니 이씨는 함안군대부인(咸安郡大夫人)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한종유는 충숙·충혜·충목왕 때 벼슬을 하였다. 15세 때 대학(大學)에 들어갔으며, 약관이 못되어 급제하였다.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행궁(行宮)의 일력(日曆)을 기록하고, 또 비(批)와 판(判)의 문서를 썼다. 본국으로 돌아와 사복부정 지제교 겸 예문응교 춘추관편수관(司僕副正 知製敎 兼 藝文應敎 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다. 충숙왕을 폐위시키고 심왕 고를 옹립하는 일을 저지하였고, 충혜왕 때 조적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을 지지하여 공신이 되었다. 또한 충목왕을 보좌하여 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僉議左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한종유는 이진(李瑱)의 아들 관(琯)의 딸을 배필을 삼았다.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낳았다. 아들은 백순(伯淳), 중명(仲明), 계상(季祥)이다.
한양부원군 한공묘지명 병서(漢陽府院君韓公墓誌銘幷序)
공의 이름은 종유(宗愈), 자는 사고(師古)이며, 한양(漢陽)사람이다. 15세 때 대학(大學)에 들어가 학업을 닦아 빼어나게 스스로를 세운 명성이 있었다. 약관이 못되어 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병과로 급제하였다. 연우(延祐 : 1314~1320)초 권지교감(權知敎勘)을 거쳐, 예문춘추관검열(藝文春秋館檢閱)에 임명되었다. 의릉(毅陵 :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행궁(行宮)의 일력(日曆)을 기록하고, 또 비(批)와 판(判)의 문서를 썼다.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그 공로로 총부산랑(摠部散郞)으로 옮겼다. 품계는 승봉랑(承奉郞)이 되고, 6품의 관복을 받았다. 도관직랑(都官直郞)을 거쳐 사복부정 지제교 겸 예문응교 춘추관편수관(司僕副正 知製敎 兼 藝文應敎 春秋館編修官)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그에게 꼭 맞는 관직이라 하였다.
지치(至治 : 1321~1323)년간에 불령한 무리들이 충숙왕을 무고하여 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있었다. 심왕(瀋王)이 서로 대립하면서 사람을 (고려에) 보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뜻을 얻었다” 라고 하자, 나라 사람들이 자못 이에 현혹되었다. 공은 홀로 개연히 충숙왕을 위하여 송사(訟事)하여 일을 바로잡으려고 유사(儒士) 16명과 더불어 연명으로 수백 마디의 글을 써 만들어 가지고 나의 할아버지 문열공(文烈公 : 李兆年)이 직접 원나라 서울로 가서 승상(丞相)에게 바쳤다. 충숙왕은 이 일에 대한 공로를 공에게 많이 돌려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左副代言)으로 발탁하였다.
태정(泰定 : 1324~1327)말기 충숙왕이 권세를 잡은 자의 말에 잘못 빠져 은밀히 선위표(禪位表)를 만들어 공에게 보이면서, “내가 이것을 심왕에게 주고자 한다” 라고 하면서 빨리 도장을 찍으라고 재촉하였다. 공은 그때 밀직사 지신사(密直司 知申事)로서 굳게 간하다가 왕의 명을 얻지 못하자 물러나와 말에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고서 우리 문열공과 더불어 이 일을 대신들에게 통고하였다. 대신들이 또 임금의 여러 측근들과 모의하여 일을 꾸민 자를 잡아 물리쳤다.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지순(至順) 원년(충숙왕 17, 1330) 영릉(永陵 :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기용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삼았다.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여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그 이듬해 의릉(毅陵 :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자 공은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지원(至元) 말년(충숙왕 복위8, 1339) 의릉이 죽자, 조적(曹頔)이 난을 꾸미자, 공은 고향으로부터 돌아와 우리 문열공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 대신들과 같이 영릉을 모셨다. 조적이 패하자 죽은 정승 김윤(金倫)이 공과 같이 조적의 일당을 다스렸다. 옥사를 이룬 사실이 알려지자 승상 백안(伯顔)이 살펴보지도 않고 (황제께) 아뢰어 영릉을 불러 원나라 서울로 오게 하여, 공 등은 왕을 따라갔다. 도착하니 모두 옥에 갇히고 일이 매우 망측하게 되었다. 우리 문열공이 상서하여 이를 밝히고자 하였다. 마침 백안(伯顔)이 죽어 일은 무사히 풀리게 되었다. 영릉이 복위한 뒤에 그 공훈을 기록하여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찬성사(贊成事)로 옮기고, 추성보절찬화공신(推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지정(至正) 3년(충혜왕 복위4, 1343) 겨울 영릉이 원나라로 갈 때 사신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공을 진봉사(進奉使)로 기용하였다. 이듬해 정월 원나라 황제의 조서로 명릉(明陵 : 충목왕)을 받들고 고국으로 돌아와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로 인해 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僉議左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공신호가 더해졌으며, 얼마 뒤에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은 관직(館職)이 응교(應敎) 편수(編修)에서 여러 번 옮겨 우문(右文)과 예문(藝文)의 두 관(館)의 대제학(大提學)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였고, 품계는 승봉랑(承奉郞)에서 아홉 번 옮겨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이미 관직에서 물러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큰 일이 아니면 혹은 한 해가 다가도 서울에 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지금의 국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늙은 신하들이 왕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는데, 공도 역시 그러했다. 왕이 이 때문에 공을 볼 때마다 반드시 두터운 예의를 더하였다.
지정(至正) 14년(공민왕 3, 1354) 6월 무술일 병으로 서울의 옛 집에서 별세하였다. 병이 위독하자 아들과 사위들에게 “내가 가난한 선비에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벼슬이 최고까지 이르렀다. 비록 중수(中壽)를 누리지 못하고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내가 3일 뒤에는 마땅히 너희들과 이별할 것이니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어라” 라고 하였다. 과연 그날에 죽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자는 원근을 막론하고 서로 조상하여 울며 말하기를, “아! 대신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슬퍼하였다. 왕은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관리들에게 상을 치르게 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그 해 8월 임인일에 대덕산(大德山) 선적사(禪寂寺) 남쪽 언덕에 장사지내니, 나이 68세였다.
증조 원서(元諝)는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증되었다. 조부 언(彦)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官判官)으로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事)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영(英)은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으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함안군대부인(咸安郡大夫人)이다.
공은 눈매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얼굴은 크고 몸도 커서 보기에도 근엄하여 재상의 그릇임을 알 수 있다. 현달하기 전에는 한 때의 명사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모여서 술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취하면 일어나 소매를 늘어뜨리고 춤을 추며 양화사(楊花詞)를 노래하였다. “그믐날 같은 맑은 바람을 기다려서 높이 날아 황각(黃閣)에 이르도다” 하였다. 식자들이 모두 이채롭게 여겼다.
검열(檢閱)에서 재상에 이르렀고, 항상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여 친척과 친구들이 공의 힘에 힘입어 현달한 자가 많았다. 성품이 관후하고 무거워 일을 처리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모두 여유가 있었고, 문장은 세속의 속기를 버리려 힘썼으며, 시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담소를 좋아하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화기가 흘러서 친애하는 마음이 나게 하였다. 복재(復齋)는 스스로 지은 호이다.
처음에 이문정공(李文定公)이 대학에서 한 번 보고 아들 가락군(駕洛君) 관(琯)의 딸을 배필을 삼았다. 아들 셋을 낳았다. 백순(伯淳) 중명(仲明) 계상(季祥)이다. 딸은 다섯이다. 장례 때 이들 백순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부친과 함께 일한 분으로 오직 이 문열공이 가장 자세히 알 것이다. 그 손자 인복(仁復)이 일찍이 두 어른을 섬겨서 듣고 본 것이 본래 있는데다가 또 지금 사관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 부친의 사업을 말하여 무궁히 뒷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하기를,
넓고 큰 그릇으로 학문을 넓히고 이름을 이루었으니,
어디에 쓰인들 좋지 않으리.
세 임금을 내리 섬기매 충성을 다하고 근로를 다하니,
매미날개로 장식한 관이 문채 있도다.
몸소 경사와 복을 열어 처음과 끝을 모두 좋게 한 것은,
오직 그 덕의 빛이로다.
이 분묘에 돌을 묻고 내 글로 명하니,
후세인들 어찌 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