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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의묘지(韓公義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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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목은문고(牧隱文藁)』권16과 『동문선(東文選)』권126에 실려 있으며, 1365년(공민왕 14)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한공의(韓公義, 1307~1365)의 자는 의지(宜之)이며, 청주(淸州) 사람이다. 먼 조상으로 난(蘭)은 개국초에 공이 있어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증조는 강(康), 조부는 사기(謝奇), 아버지는 악(渥)이다. 어머니는 원씨(元氏)로 경(卿)의 딸이다. 한공의는 둘째 아들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한공의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충혜왕 때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 三司右尹), 전주목사를 역임했고,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를 역임하였다. 충정왕 때 대언(代言)에 발탁되었다.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호부상서(戶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부인 경씨(慶氏)는 사만(斯萬)의 딸이며, 정해(鄭瑎)의 외손녀이다. 아들은 세 명이다. 맏아들은 수(脩), 둘째 아들은 리(理), 셋째 아들은 제(齊)이다. 딸 역시 세 명이다. 각각 김사겸(金士謙), 이창로(李彰路), 염흥방(廉興邦)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로 아들 한수(韓脩)의 묘지명이 있다.
중대광 청성군 한시평간공 묘지명 병서(重大匡 淸城君 韓諡平簡公 墓誌銘 幷序)
금상(今上 : 공민왕)이 즉위한 지 14년 되는 해(1364) 평간공(平簡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 내년의 하정사(賀正使)를 원나라 수도에 보내는 일을 의논하면서 재신(宰臣)들이 왕에게 “지금 원나라 승상이 궁전 뜰을 갑옷을 입은 군사로 무장하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조회하는 일이 다른 날에 비할 바 아닙니다. 신(臣) 등은 실로 사신을 얻기 어려워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은 즉시 교지를 내려 한모(韓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고서, 공을 불러 면전에서 “정유년(공민왕 6, 1357) 하성절사(賀聖節使)로 갔을 때에 무난히 잘 갔고 올 때도 잘못되었다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대를 가상히 여겨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또 가되 공경히 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공이 두 번 절하며 사례하면서 “신과 같이 불초한 자가 추부(樞府)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아무런 재능이 없어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감히 사신으로 가는 것을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니, 과연 임금의 뜻에 부합한 바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군(君)으로 봉해져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래지 않아서 다시 기용되기를 바랬는데, 아! 슬프다.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공의 성은 한씨(韓氏)이며, 대대로 청주(淸州) 사람이다. 먼 조상에 난(蘭)이란 분은 개국초에 공이 있어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뒤 가장 이름이 있는 분은 강(康)이다. 원종때 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중찬(中贊)으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였다. 문혜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를 낳았고, 간의공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을 낳았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사숙공은) 일찍이 기발한 꾀로 충숙왕이 원나라에 참소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무사히 벗어나게 하였다. 또 영릉(永陵 : 충혜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재상이 되어 대묘(大廟)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은 동지밀직 전리판서(同知密直 典理判書)인 원경(元卿)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아들 대순(大淳)은 죽었는데, 벼슬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였다. 중례(仲禮)와 방신(方信)은 모두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다. 공은 둘째 아들이다.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형에게 공손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를 흠모하였다. 불교를 배운 각성(覺星)은 조계종의 운석(韻釋 : 시를 짓는 승려)이었다.
공의 이름은 공의(公義), 자는 의지(宜之)이다. 향년 59세였다.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남부녹사(南部錄事)가 되었다. 일찍이 충혜왕에게 알려져 호군(護軍)에 임명되고, 여러 번 옮겨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 三司右尹)이 되었다. 그 때에 편안하고 고요히 있어 세상을 좌우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전주목사로 나가 백성에게 훌륭한 정치를 베풀었다.
명릉(明陵 :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를 역임하였다. 총릉(聰陵 : 충정왕) 때 대언(代言)에 발탁되었다. 왕이 왕위를 물러주던 날 백마산(白馬山) 아래로 달려가 음식물을 바치고 사사로이 사람에게 “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금상(今上 : 공민왕)이 공을 충성스럽게 여기고 그 재능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관제를 개정하여 시행하면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고 오래지 않아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고쳐 임명하였다. 2년을 지나 형부로 옮겼다. 토지에 대한 재판이 법대로 처리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의 입에서 떠돌았다.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재량 처결하니,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 관리가 성안(成案)을 가지고 와서 결재를 청하여 그 중에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반복하여 그 뜻을 보인 연후에 서명하니, 대개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부인 경씨(慶氏)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의 딸이며, 찬성사(贊成事) 정해(鄭瑎)의 외손녀이다. 주부가 되어 남편에게 화합하고 순종하였고, 어머니가 되어 자녀들이 본받게 하였다. 아들 세 명을 낳았다. 맏아들 수(脩)는 옛 것을 좋아하고 문학에 능하여 급제를 거쳐 관직(館職)을 역임하고 현재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있다. 둘째 아들 리(理) 또한 급제하여 이름이 있으며 현재 개성판관으로 있다. 셋째 아들 제(齊)는 별장으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 있다. 딸 세 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종부령(宗簿令) 김사겸(金士謙) 삼사우윤(三司右尹) 이창로(李彰路) 군부판서(軍簿判書) 염흥방(廉興邦)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는 남자가 네 명이다. 우복(祐復)은 별장이며, 다음은 선복(善復)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손녀는 다섯 명이다. 외손자인 김우(金禑)는 권무(權務)이며 외손녀는 두 명이 있다.
장차 11월 갑신일에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산기슭에 장사하려 하는데, 수(脩)와 흥방(興邦)이 와서 묘지명을 나에게 구하였다. 공의 아들과 사위는 다 나의 벗이다. 벗의 아버지의 묘에 묘지명을 청하는데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공은 자상하고 근검하였고, 일체의 행동을 법에 따라 하였다. 마음속에 포부를 품고 있으면서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를 펴지 못하여 하루도 국정을 전담하지 못하였다. 천명이다. 비록 그러한 몸에는 버릴 만한 행실을 가려낼 수 없고, 아들을 가르쳐서 모두 출세시켰으며, 죽은 뒤에는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다. 이것만으로도 족히 그 뒷세상에 전할 만하며 가히 유감이 없을 것이다.
명(銘)하기를,
문혜공의 손자요 사숙공의 아들로서
인후(仁厚)한 형제들이 그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공이 충정왕을 섬겨 이미 시종일관 충성됨이 있으니
지금의 임금(공민왕)이 그의 충성을 묻지도 않고 그 재능을 시험하였다.
두 번 원나라 조정에 조회하고 돌아오매 반드시 임금의 뜻에 맞았으니
사람들은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공은 물러가고 말았다.
이때의 높은 공도 이보다 더할 리 없었건만
필경 이에 그치고 마니, 누가 천리를 징험할 것인가.
내 여기에 시를 지어 이것을 오는 세상에 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