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시문온공 민공묘지명 병서(高麗 故 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贈諡文溫公 閔公墓誌銘 幷序)내(묘지명 찬자 : 李達衷)가 젊어서 대인(大人)선생의 문하에서 노닐 때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다. (선생은) 사풍(士風)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시기를, “지금 세상이 옛날만 못하다.” 하셨다. 나는 그 때 홀로 말하기를, “너무도 통하지 않는 말씀이다. 어찌 반드시 그러하랴”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세상 일을 많이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전배(前輩)들의 풍류가 날로 줄어들어 다만 고요할 뿐 뒷 사람이 본받을 곳이 없다. 옛 사람을 아쉬워하는 회포가 솟아오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급암공(及菴公)과는 인척사이로 두터운 정의가 있어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부인으로부터 묘지명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누추하다고 하여 사양하리오.공의 이름은 사평(思平),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이다. 아버지 적(頔)은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시호가 문순(文順)이다.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 管高麗軍萬戶 重大匡 上洛君)인 김흔(金忻)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종유(宗儒)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장군 판총부사(重大匡 都僉議贊成事 上將軍 判摠部事)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증조(曾祖) 황(滉)은 조산대부 호부시랑(朝散大夫 戶部侍郞)이다. 대개 선대에 덕을 심고 인을 베풀어 심고 가꾼 지가 오래되었다. 9대조인 이름이 칭도(稱道)인 봉어공(奉御公)부터 대대로 큰 신하가 있어 그 공로와 이름이 매우 많아 서로 바라보기에 이르렀으나, 집안에 족보가 있고 나라에 사서(史書)가 있으므로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공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12월 무진일에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충순공(忠順公 : 閔宗儒) 집에서 자랐다. 자질이 뛰어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재상(大宰)인 김정렬공(金貞烈公 : 金倫)이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름이 있어, 자기 딸을 공의 처로 삼았다. 정렬공은 빈객을 좋아하여 일시의 명사들이 그를 따라 놀았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배움이 날로 진보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무반으로 바꾸어 산원이 되고 별장에 올랐다. 그러나 무반직을 좋아하지 않고 책 읽기를 더욱 힘써 하였다. 연우(延祐) 을묘년(충숙왕 2, 1315)에 우리 동암 문정공(東菴 文定公 : 李瑱)이 예부시를 주관하면서 과거 심사가 매우 엄하여 선발한 인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은 적절치 못한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여기에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에 힘써 10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의릉(毅陵 : 충숙왕)이 오래 원나라에 있다가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 왕위를 회복하였다. 귀국하여 신하들을 신중히 뽑았는데, 공은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의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좌우정언(左右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은비(銀緋)와 금자(金紫) 색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경오년(충숙왕 17, 1330) 영릉(永陵 : 충혜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아, 마음 속에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로지 무반들이 하는 것을 본받아 아첨하였다. 공은 그 때 군부정랑 예문응교(軍簿正郞 藝文應敎)의 벼슬로 왕부(王府)에 출입하며 인사를 함께 의논하였으면서 그 분수를 지킴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순(至順) 임신년(충혜왕 2, 1332) 의릉(毅陵 : 충숙왕)이 복위하여 관리의 출척(黜陟 : 승진과 퇴출)을 밝게 할 때, 공은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少尹 知製敎)에 임명되었고, 관계(官階)는 봉선대부(奉善大夫)였다.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봉상대부(奉常大夫)를 더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郞)의 관직으로 으로써 경상도염철사(慶尙道鹽鐵使)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전교부령 우문관직제학(典校副令 右文館直提學)으로 소환되어 다시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고 관직(館職)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다시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승진하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다. 관계(官階)는 중현대부(中顯大夫)에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직(館職)은 진현관(進賢館)으로 바뀌었다.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교화하여 다스렸고, 들어와 성균관대사성 충춘추관수찬((成均大司成 充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다. 정순대부(正順大夫)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지정(至正)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를 관장하여 김인관(金仁琯) 등 93인을 뽑았다. 갑신년(충혜왕 복위5, 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을유년(충목왕 1, 1345) 밀직사(密直司)의 밀직제학이 되고 상호군을 겸직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해를 넘겨 기축년(충정왕 1, 1349) 총릉(聰陵 : 충정왕)이 원나라에 갔을때 공이 시종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그 공으로 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參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에 책봉되었다.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로 승진하고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지 8년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공민왕 8, 1359) 65세로,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고 시호를 문온공(文溫公)이라 하였다. 아! 공은 대대로 내려온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이 번성했으나, 일찍이 자랑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성품과 자질이 온아하였으며, 친인척을 대함에도 온화하고 화목하였다. 비록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부끄러워 하고 심복하였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졸재 최선생(拙齋 崔先生 : 崔瀣)과 친분이 돈독하였고 그의 문장을 좋아하여 힘을 내어 간행하였다. 믿음을 두터이 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변덕스럽거나 기이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의리를 쫓을 뿐이었으며, 소탈하게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겨하는 마음이 넓은 군자였다. 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의 사풍(士風)이 반드시 옛만 못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죽었고 만나는 것은 날로 새로운 것들이니,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지금이 옛만 못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대인선생(大人先生)의 말이 옳다고 믿는 까닭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세가(世家) 자제인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김묘(金昴)
1 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인이다. 공이 사랑하여 도에 맞도록 가르쳤다.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제민(齊閔)은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이고, 제안(齊顔)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다. 손녀가 4명이다. 맏이는 세가자제(世家子弟)인 감문위참군사(監門衛參軍事) 김사안(金士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제민 형제가 상례를 주관하며 례를 극진히 하여, 이 달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록(南麓)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공같이 부유하고 공같이 순수함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인데, 어찌 명이 길지 못하였고 어찌 뒤를 이를 아들이 없었던가, 하늘도 믿기 어렵구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아름다운 사위를 맞았으니, 나의 마음을 위안하네. 시는 맛이 있고 문장은 높이 이르름이 있어 나로 하여금 오래 음미하게 하네. 바로 서서 기대지 아니하고 뭇 사람과 어울리되 같이 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였나니,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데, 아! 끝났구나. 슬프다, 쏜살같이 달리는 세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