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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묘지(安輔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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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권19, 『근재집(謹齋集)』및 『동문선(東文選)』권128에 실려 있으며, 1378년(우왕 4)에 이색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 안보(安輔, 1302~1357)의 자(字)는 원지(員之)다. 순흥(順興 : 지금의 경북 영주지역) 사람이다. 안향(安珦)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석(碩)이다. 안축(安軸)의 동생이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1345년(충목왕 1) 원나라 과거에 합격하였다. 원나라에서 관리생활을 포기하고, 고려에 돌아와 충목왕 때 안렴사, 공민왕 때 예문검열(藝文檢閱), 춘추수찬(春秋修撰), 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부인 최씨 사이에 자녀가 없다.
계림부윤 시문경공 안선생묘지명 병서(雞林府尹 諡文敬公 安先生墓誌銘 幷序)
순흥(順興) 안씨가 문성공(文成公) 향(珦 : 안향) 이후로 높은 관직에 오른 이가 많았다. 문성공의 증손인 정단문학(政堂文學) 원숭(元崇)의 아들 세 사람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성공의 후손으로 급제한 석(碩)은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근재선생(謹齋先生 : 안축)의 아버지이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근재의 아들인 지금의 밀직공(密直公)의 세 아들이 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근재의 큰 형과 작은 형이 모두 원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조정의 명을 받았다. 일세에 빛을 떨침이 문성공의 자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원나라에서 과거를 실시한 이래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부자 형제가 연이어 급제한 것은 순흥 안씨와 우리 한산(韓山) 이씨뿐이었다.
가정선생(稼亭先生 :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근재에게 배우고, 그의 묘지명을 지었다. 내가(이색) 향시(鄕試)를 치를 때 (근재)선생이 또 고시관이었다. 내가 비록 쇠약하고 병들었으나 사양할 수 없다. 또한 (대를 이어) 묘지명을 짓는다면 선생에 대해서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여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에 임하여서는 대체(大體)를 따르려 힘써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관망하지 않았다.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나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취하면 그치었다. 문장을 짓는 데 화려한 것을 버리고 실질적인 것을 취하여 뜻이 통하게 할 따름이었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그가 어진 것을 알고 장차 크게 쓰고자 하여 밀직대부 겸 감찰대부(密直提學 兼 監察大夫)에 임명되어 관리 선발의 일을 주관하였고, 동지(同知 : 동지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을미년(공민왕 4, 1355)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안을기(安乙器) 등 33인을 뽑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고 하면서,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얼마 후에 임금이 일에 어두워지자, 선생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계림부윤(雞林府尹)이 되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관제를 고칠 때에 관직에 임명되지 않아 선생은 고향에서 지냈다. 마침 병에 걸리자 탄식하면서, “어머니께서는 병이 없는데 아우가 죽고, 큰 형님 또한 돌아가셨다. 나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또 “천명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얼마 후에 과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근재선생의 아들로 지금 밀직재상(密直宰相)인 종원(宗源)은 나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진사이다. 그 매부 밀직재상 정양생(鄭良生)과 함께 와서, “문경공(文敬公)은 나이 19세인 경신년(충숙왕 7, 1320) 진사과에 합격하였는데 허판서(許判書 : 許富)가 고시관이었습니다. 그 해에 또 수재과에 합격하였는데, 익재 이문충공(益齋 李文忠公 : 이제현)과 석재 박판서(石齋 朴判書 : 朴孝修)가 고시관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문경공은 자질이 아름다웠는데 우리 선친께서 엄하게 가르쳤다. 사람들은 모두 문경공의 자질이 아름다움에 감복하면서도 어진 부형(父兄)이 있음을 더욱 귀중하게 여겼다.
처음 지낸 관직은 광주사록(廣州司錄)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 예문검열(藝文檢閱) 춘추수찬(春秋修撰) 예문공봉(藝文供奉) 문하주서(門下注書) 감찰규정(監察糾正) 군부좌랑(軍簿佐郞) 좌정언(左正言) 우헌납(右獻納) 전리정랑(典理正郞) 감찰장령(監察掌令) 전의부령(典儀副令) 전리총랑(典理摠郞) 위위윤(衛尉尹) 감찰집의(監察執義) 우대언 겸 집의(右代言 兼 執義) 전법판서(典法判書)이다. 관직(館職)은 제학(提學)에서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원나라 진사과에 합격한 것은 을유년(충목왕 1, 1345)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간 것은 갑신년(충목왕 즉위, 134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을유년(충목왕 1, 1345) 교주도(交州道)안렴사이다.
정유년(공민왕 6, 1357) 9월 초4일에 순흥부(順興府)에서 별세하였다. 인하여 장사지내니, 향년 56세였다. 지금까지 22년이 되었으나, 묘지명이 없었다. 아! 문정공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이라 더욱 슬프도다. 부인 최씨는 아들이 없는 까닭에 따를 곳이 없어, 수절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들도 직무에 분주하여 또 그 사이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없어 지연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아 더욱 슬프도다. 그대가 명을 지어주어서 장차 돌에 새겨 무덤에 넣는다면 아마도 그 썪지 않을 것이리라.
색이 말하였다. “선생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과거에 합격한 기록이 있고 이름을 적은 비가 있어, 아름다운 명성이 중국에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보고 누가 고려 안씨 형제가 과거에 합격하여 그 풍류를 동해 밖에서 흠모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선생의 무덤의 돌에 비록 새기지 못하였더라도 역시 가하다. 하물며 그 행사를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훗날 현릉(玄陵 : 공민왕) 실록을 편찬할 때 선생의 열전이 또한 족히 역사책에 빛나서 반드시 전해질 것이다. 나는 다만 그 후사 없음을 슬퍼할 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근세의 훌륭한 관료이자 착한 사람으로서 남촌 이시중(南村 李侍中 : 李公遂) 우곡 정밀직(愚谷 鄭密直) 급암 민찬성(及菴 閔贊成 : 閔思平)은 덕행과 문장이 우뚝 한 때의 으뜸이면서도 한 터럭이라도 과오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후사가 끊어지는 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자손이 없었으니 하늘이 정하지 않은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관리 선발의 일을 맡았을 때, 나(이색)는 붓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하루는 임금이 밤중에 선생을 불러들여 벼슬을 내린 적이 있었다. 끝난뒤 임금이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시면서, 책력을 보고 말하시기를 “(귀신이 날뛰는) 창귀일(猖鬼日)이니 그만 두겠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음양으로 꺼리는 바를 싫어하여 즉시 무릎을 꿇고, “왕자가 천시를 받들어 행함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신다면 행하실 것인데, 창귀(猖鬼)가 어찌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의 안색이 변하였다.
일찍이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장사랑 요양등처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將仕郞 遼陽等處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이미 명을 받아서 벼슬하지 않는면 공손하지 않다. 하물며 조마(照磨)는 문서만 수합하여 관장할 뿐 다른 업무가 없겠는가? 내 마땅히 (행중서)성으로 부임하겠다” 하였다. 부임하여서는 성관(省官)이 그 재주를 중히 여겨 모두 예로써 대우하였다. 선생은 “내 이제 족히 나의 책임을 마쳤다. 어머니가 늙었는데도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이는 효가 아니다” 하고서 관을 걸어놓고 돌아왔다.
내가 원나라 수도에 있을 때 어사 한중보(御史 韓仲輔)가 “이부의 관원 중에 선생을 아는 이가 있어 한림국사원 편수관(翰林國史院 編修官)으로 추천하였으나, 성신(省臣)이 물리쳐 보고하지 않았다” 하였다. 내가 부족한 데도 오히려 선인의 뒤를 이어 한림에서 봉직하였다. 선생은 끝까지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천명이로다.
선생은 일찍이 “내 이미 아들이 없으니, 문생(門生)이 곧 나의 아들이다” 하였다. 지금 그 문생으로는 이보림(李寶林)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염국보(廉國寶) 이인(李韌) 우현보(禹玄寶)가 모두 추밀재상 봉익대관(樞密宰相 奉翊大官)이다. 또 나머지도 현달하여 이름을 한 때에 떨친 이들이 많았다. 불교를 물리쳐 우리의 도를 지킨 이는 초계 정습인(草溪 鄭習仁)이며, 원수를 피해 능히 거친 황야에 은둔한 이는 광주 이원령(廣州 李元齡)이다. 인재를 얻음이 성하다고 당대에 칭송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보(輔), 자(字)는 원지(員之)다. 할아버지는 모(某), 증조 모(某)는 모두 순흥(順興)의 호장이다. 외조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안모(安某)이다.
명에 이르기를,
아! 슬프도다. 선생이여 학문은 이룩되었고
대책은 조정에 올려져 능히 그 명성을 떨쳤다.
우리 선왕을 보필하여 묘당(廟堂)에서 주선하고
문화를 널리 펴서 이에 춘장(春場)을 열었다
곧 우리 유생들이 이에 지극한 영광이었소
어머니가 늙었는데 봉양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어찌 편하리오.
충효로 입신양명하여 군자의 빛이 되었네
그 혹시 온전하지 못하니 어리석지 않으면 미친 것이네
이에 그 마음을 진술하여 이에 월성[경주]의 윤(尹)이 되었네
어머니는 무양하나 이에 병에 걸리었는데
구름은 흩어지니 길이 길이 슬프도다
유덕하나 아들이 없으니 어인 일인가 저 하늘이여
오호라! 선생이여 큰 나무가 무덤을 덮으니
천년이 지나도록 가히 전할 것은 이름 뿐
오직 이름 드날렸으니 죽어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죽계(竹溪)에는 근원이 있으니 그 흐름은 유장(流長)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