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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빈묘지(洪彬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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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목은문고(牧隱文藁)』권19와 『동문선(東文選)』권128에 실려 있으며, 1354년(공민왕 3)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홍빈(洪彬, 1288~1353)의 자는 문야(文野)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선대에 원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증조는 충(冲), 조부는 세(世), 아버지는 윤심(允深)이다. 어머니 김씨는 돈황군부인(焞煌郡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지(祉)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홍빈은 원나라 궁궐에서 숙위하였고, 원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묘지명에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충숙왕의 복위에 노력하였고, 충혜왕을 폐위하려는 조적의 난을 저지하고 원나라 조정에서 충혜왕을 복위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신에 봉해진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부인 고씨(高氏)는 돈황군부인(焞煌郡夫人)으로 봉해졌는데, 극인(克仁)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름은 수산(壽山)이다. 계실(繼室)은 통의군(通儀君) 왕형(王珩)의 딸로, 경화옹주(敬和翁主)이다. 왕씨는 소생이 없다.
당성부원군 홍강경공 묘지명(唐城府院君 洪康敬公 墓誌銘)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삼한의 명가로 대대로 훌륭한 관리가 되었으나 그 자취가 족히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중 중국에서 현달한 자로 더러 반폐(反吠 : 주인을 보고 짓는 개. 즉 나라를 배반한 사람의 뜻)한 자도 있었다. 중국에서 벼슬하면서 뛰어난 절의로 칭송받고, 본국에서 지위가 총재에 이르면서 공이 사직에 있는 분은 강경공(康敬公) 한 분뿐이다.
공의 이름은 빈(彬)이고, 자는 문야(文野)이다. 선대에 원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공은 지원(至元)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태어나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조금 자라서 궁궐에 숙위하여 공을 쌓았다. 황경(皇慶) 임자년(충렬왕 14, 1288) 장관의 천거로 종사랑 대도로 패주동지(從事郞 大都路 覇州同知)에 임명되어 선정을 한 공으로 초지방제령(抄紙房提領)으로 옮기고, 품계는 승무랑(承務郞)이었다.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다른 사람의 탄복을 자아냈다. 천력(天曆) 기사년(충숙왕 16, 1329) 승직랑 송강부판관(承直郞 松江府判官)에 임명되었는데, 관리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도수감경력(都水監經歷)으로 소환되어 승덕랑(承德郞)으로 승진했는데, 도수감에서 했던 정사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또 봉훈대부 태상예의원경력(奉訓大夫 太常禮儀院經歷)으로 옮겼다, 얼마 안 되어 부친상을 당했다.
충숙왕이 참소를 입고 원나라 수도에 억류된 지 5년이 되었는데, 공이 이에 왕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왕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특별히 이를 밝혔다. 충숙왕의 작위가 회복되자 왕을 쫓아 고려에 돌아왔다. 후지원(後至元)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이었다. 왕이 공의 공이 돈독하고 (고려에) 머물게 하여 정사를 돕게 하려고 생각하여 원나라 조정에 요청하자, 공에게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 理問所)의 관직이 내려졌다. 또 말하기를, “송사(訟事)와 같은 일로 공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 어찌 나라 일을 맡기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임명하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으로 하고 상호군(上護軍)을 겸대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승진하자, 사람들이 이상(二相)이라 하였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봄 3월 충숙왕의 유명(遺命)에 따라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가 되었다. 가을 8월 정승 조적(曹頔)이 심왕을 몰래 도와 충혜왕을 폐하기 위해, 임금 측근의 소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명분을 삼아 백관을 거느리고 영안궁(永安宮)을 둘러쌌다. (영안궁은) 충숙왕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가 거처하는 곳이다. 조적이 백관을 위협하였으나, 다만 공을 꺼리어 온갖 계책으로 공을 움직이게 하고, 또한 그 꾀를 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실책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 형이 비록 부도덕한 일을 행하더라도 그 아우가 있는데, 심왕이 어찌 간섭을 하는가” 라고 하면서 강하게 거절하였다. 조적이 비록 백관을 위협하여 왕의 죄를 소를 지어 올리려 하였으나, 공이 끝내 사자(使者)를 중지시켜 행하지 못하였다.
충혜왕은 날쌔고 용맹스럽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정예 군사 십 수 명을 거느리고 에워쌌던 포위를 무너뜨리고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 말하기를 “역적은 조적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위협을 당하였음을 나는 모두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조적을 죽인 뒤에는 또 “늙은 도적이 죄를 받았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안심하라” 라고 하였다. 충혜왕은 포위된 중에도 공이 의리를 지켰음을 알고 또 공이 조적의 음모를 저지하였음을 알고는 매우 고맙게 여겼다.
임금이 원나라 수도로 가자 황제의 지시로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 종정부(宗正府) 한림원에게 여러 가지를 신문하였다. 충혜왕이 스스로 밝히지 못해 일이 위태롭게 되었다. 공은 “조적은 왕의 종인데 종이 주인을 해치고자 하니, 왕법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왕에게 칼을 대고 싸웠으니 누가 조적을 살려주겠습니까. 왕의 죄는 마땅히 감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선왕의 유명(遺命)으로 정동행성의 일을 임시로 맡아 나라의 기강에 관계된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왕이 연루되는 것은 부당합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비분강개하여,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이 위태롭다고 여겼다. 공은 “우리는 임금의 아들이니 우리들이 바로잡지 않으면, 지하에서 선왕을 어떻게 뵙겠는가” 라고 하였다.
왕의 작위가 회복되어 고려에 돌아와 철권(鐵券)을 내리고 공을 일등으로 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승진시키고 당성군(唐城君)에 봉하고 부(府)를 열게 하였다. 또 “무릇 천자를 섬기는 일은 행성(行省)에서 실제로 주관하는 것이다. 좌우사(左右司)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일이 태만하고 예의를 잃게 되어, 그 책망이 어디로 가겠는가” 라고 하면서, 공을 추천하여 (정동행성)낭중(郎中)으로 삼고, 품계를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하였다.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였다. 중원(中原 : 충주)사람인 허정(許政)이란 자가 공이 천자를 배척하였다라고 무고하면서, 채정승(蔡政丞)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 일이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려지자 중서성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두 사람을 국문하였다. 두 사람의 말이 마침내 맞지 않아 도리어 죄를 받았다. 공은 “내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수 없겠다” 라고 하면서 곧 원나라 수도로 갔다. 공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문야(文野 : 홍빈의 字)가 오는 구나” 라고 하면서, 공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장차 크게 발탁하려는데 공이 또 지방으로 나갈 것을 원했다. 이에 흥국로총관(興國路摠管)이 되었고, 품계는 정의대부(正議大夫)였다. 공이 은혜롭게 백성에게 임하고 관리를 대할 때 법으로 하였다. 지금까지도 그의 자애스러운 자취가 남아 있다.
신묘년(공민왕 즉위, 1351)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신을 기록하면서 “홍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히 나에게 충성하였고, 또 살아있는 선왕의 대신 중에 홍빈만한 이가 없다. 마땅히 우정승에 있으면서 나의 통치를 도와야 겠다” 라고 하였다.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라는 열 글자의 공신호를 내리고, 품계는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전리사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判典理司事)에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봉하였다. 대개 옛날 승상을 후(侯)로 봉하는 법으로서, 대신을 특별히 총애하는 최고의 것이다.
지정(至正) 계사년(공민왕 2, 1353) 겨울 12월 17일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나이가 66세였다. 부고가 있자 임금이 애도하여 부의를 후하게 할 것을 명하고, 시호를 강경공(康敬公)이라 하였다. 관에서 장사를 돌봐주어 다음 해 3월 8일에 성남(城南)에 장사하였다. 공의 평생에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
증조 충(冲)은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조부 세(世)는 삼중대광 도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三重大匡 都僉議政丞 判典理司事 上護軍)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윤심(允深)은 추성익대좌리공신 남양군(推誠翊戴佐理功臣 南陽君)으로 추증되었으며, 원나라에서 통의대부 집현직학사(通義大夫 集賢直學士)의 벼슬을 주었다. 어머니 김씨는 돈황군부인(焞煌郡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정의대부 판선공시사(正議大夫 判繕工寺事)인 지(祉)의 딸이다.
고씨(高氏)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부인은) 돈황군부인(焞煌郡夫人)으로 봉해졌으며, 중봉대부 예부상서(中奉大夫 禮部尙書) 극인(克仁)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름은 수산(壽山)이다. 계실(繼室)은 통의군(通儀君) 왕형(王珩)의 딸로, 경화옹주(敬和翁主)이다. 왕씨는 소생이 없다. 수산은 원나라에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내장고부사 고주동지 비서낭중 상경력 육운제거(內藏庫副使 高州同知 秘書郞中 尙經歷 陸運提擧)를 거쳐 봉훈대부(奉訓大夫)에 이르렀다. 고려에서는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 通禮門副使)였다. 손자는 남녀 각 한 명이다. 손자인 귀(貴)는 지금 봉선대부 흥위위보승호군(奉善大夫 興威衛保勝護軍)이다. 손녀는 중의대부 좌우위보승장군(中議大夫 左右衛保勝將軍) 백현(白絢)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강(康)은 어리고, 백씨(白氏 : 백현)의 두 아들도 모두 어리다.
공이 제거(提擧 : 아들 수산)에게 글을 가르칠 때 절동(浙東) 호중연(胡仲淵)선생이 공의 집에 머물렀고, 나의 부친 가정공(稼亭公 : 이색)이 정동행성 관원이었을 때, 공과 동료이자 또 서로 좋게 지냈다. 이 까닭에 내가 같이 수업을 받게 되었다. 날이 또한 저물어 장차 돌아가려 하면 공이 만류하여 머무른 것이 문득 달이 넘었다. 공이 나를 먹이고 나를 묵게 한 그 은혜가 또한 깊었다. 아 슬프다. 묘지명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도덕과 정사는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석실(石室)에 금으로 봉인되어 있어 찾아보는 이가 드물다. 가전(家傳)을 짓고, 시로서 전파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하물며 아들인 제거(提擧 : 수산)가 청하는데 겨우 그것에 그치겠는가? 집안을 다스리는데 엄격하고, 일을 만나서 과단성이 있고, 어려움에 처해서 절개를 지켜 빼앗기지 않았다. 비록 옛날의 열열한 장부(丈夫)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다. 아 슬프다. 공은 강직하고 밝음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공이 늙은 뒤에야 천하가 비로소 어지러웠으니 공의 마음을 가히 알리라. 그 강하고 의연하며 과감한 기상이 장차 저승 아래에서 울분을 머금고 있을 것인가. 기린과 봉황처럼 태평을 기다려 나타날 것인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도다. 아 묘지명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아 홍공이시어, 중궁(中宮)에 숙위하였고,
자라서 탁용되매 재주가 출중하였소.
오직 강의 남쪽에 (임금을 모시고) 두 차례나 달려가,
거하는 곳마다 직책 다해 사람들은 그 덕을 생각하오.
의릉이 오직 아꼈으며, 군소(群小)는 서로 다투었으니
공이 마음 속에서 (그들을) 미워함이 얼음에 숯과 같았었소.
간사한 놈이 틈을 타니 영릉의 액운이라.
오직 공이 말씀하고 오직 공이 도왔었소.
선왕께서 이르시길, 아아 슬프다. 내 젊었을 제,
공의 충성 알았기에 생각이 이에 있었네.
이제 세워 정승 삼으니 백관의 어른이라.
보(保 : 은나라 이윤)와 석(奭 : 주 무왕의 신하)의 스승이니 오직 덕을 숭상하였소.
아아, 홍공이여. 작록은 풍성한데
자손이 얼마 없으니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 아 홍공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