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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계묘지(朴元桂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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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권19와 『동문선(東文選)』권128에 실려 있으며, 1355년(공민왕 4)에 이색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 박원계(朴元桂, 1283~1349)는 영해(寧海) 사람이다. 증조는 득주(得株), 조부는 문규(文圭)이며, 아버지는 관(琯)이다. 외조(外祖)는 최서(崔壻)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박원계는 유술(儒術 : 유학)과 이사(吏事 : 행정사무)에 능하였다고 한다. 나이 19세인 1301년(충렬왕 27) 급제하였다. 주로 충숙왕·충혜왕·충정왕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층혜왕때 편민조례추변도감(便民條例推辨都監)의 책임자로서 공평한 판결을 했다고 한다. 부인 오씨(吳氏)는 두원현(豆原縣) 사람이며, 의(誼)의 딸이다. 아들은 보생(寶生)과 동생(童生)의 2명이며, 딸 한 명은 김대경(金臺卿)에게 시집갔다.
판서박공묘지명 병서(判書朴公墓誌銘 幷序)
영해(寧海) 박씨로 유술(儒術 : 유학)과 이사(吏事 : 행정사무)로 세상에 현달한 이는 전법판서(典法判書)인 원계(元桂)이다. 자는 ▨▨다. 충숙왕때 원나라에서 온 사신이 황제의 은혜를 믿고 기세를 부렸다. 노비 문제를 왕께 아뢰어, 정직한 사람을 굴복시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두 차례나 궁정에 가서 대신(臺臣)들에게 판결을 하도록 하게 하였다. 판서공(判書公)이 그 때 장령(掌令)이 되어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아뢰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사신이 크게 화를 매면서 돌아갔다. 왕은 “대신(臺臣)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고, 공의 곧은 자세에 대한 상으로 집의(執義)에 승진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공의 나이 19세인 신축년(충렬왕 27, 1301) 상시(常侍) 정선(鄭僐)이 성균시의 고시관일 때 익재 이시중(益齋 李侍中 : 이제현)이 15세에 장원 급제하였고, 다음이 공이었다. 이 해에 국재 권부(菊齋 權溥)와 열헌 조간(悅軒 趙簡)이 예위(禮闈 : 예부시)의 고시관일 때 공이 또 합격하였다.
전주사록 겸 장서기(全州司錄 兼 掌書記)때 경내에 호랑이가 횡포를 부리자,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이 잡으려다 잡지 못하자 공에게 맡겼다. 공은 마을의 기사(騎射 : 말을 탄 궁사)를 험로에 나누어 기다리게 한 후 한 화살로 맞혀 죽였다. 연우 병진년(延祐 丙辰 : 충숙왕 3, 1316)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가 정사년(충숙왕 4, 1317) 가을 성균학정(成均學正)으로 옮겼다가, 그해 겨울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어 충선왕을 연경의 사저에서 섬겼다. 곁에서 붓을 잡고서 부지런하고 삼가하여 과실이 없어 매우 커다란 사랑을 입었다. 무오년(충숙왕 5, 1318) 겨울 가안부승(嘉安府丞)에 옮겼고, 기미년(충숙왕 6, 1319) 겨울 승봉랑 중문지후(承奉郞 中門祗候)가 되었다. 경신년(충숙왕 7, 1320) 겨울 도관산랑(都官散郞)이 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여름 개성소윤(開城少尹)으로 보성군(寶城郡) 수령을 겸하여 백성에게 은혜를 끼쳤다. 지순(至順) 임신년(충숙왕 복위1, 1332) 가을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이 되었다. 원통(元統) 을해년(충숙왕 복위4, 1335) 봄 봉상대부 감찰장령(奉常大夫 監察掌令)이 되어 기강이 크게 떨치고 관료의 질서가 깨끗하게 되었다. 이듬 해 궁문의 일을 해결한 일이 있어 중승(中承)에 승진되었다. 지원(至元)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 종부령 지제교(宗簿令 知製敎)에 옮겼다.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 봄 소부시판사 봉순대부 보문각제학(小府寺判事 奉順大夫 寶文閣提學)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어 (임무를 마치고) 가을에 장차 서울로 오려할 때, 재신이 말하기를, “강릉 사람들이 박존무(朴存撫)를 편안해 한다” 하고서, 곧 사신을 보내 제사를 맡아 머무르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도 역시 그렇게 했고, 가을에도 또 그렇게 했다. 지금까지도 백성들은 공을 생각하고 잊지 않는다.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충혜왕이 즉위하자 편민조례추변도감(便民條例推辨都監)을 설치하고, 공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2년 동안 판결이 공평하여,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충정왕이 처음 정치할 때 인재를 크게 등용하였다. 관리를 뽑는 자는 법사(法司)의 직책을 중하게 여겨 합당한 인물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드디어 공을 임용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승진시키고, 관직(館職)으로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겸하게 했다. 조정에서 모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맞는 사람을 얻었다” 하였다. 이 해 공의 나이가 67세였는데, 여름 4월 12일에 병을 얻어 23일에 별세하였다. 모월 모일에 동성(童城) 양족산 마전곡(兩足山 馬田谷)에 장사를 지냈다. 지정(至正) 9년(공민왕 4, 1355) 기축일이다.
을미년(공민왕 4, 1355) 정월 초 2일 부인 오씨(吳氏)가 나이 □세에 병으로 별세하여, 같은 묘역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두원인(豆原人)이며, 예빈경(禮賓卿) 의(誼)의 딸이다. 집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침에 모두 법도가 있었다. 아들은 둘이다. 보생(寶生)은 관직이 봉순대부 판위위시사(奉順大夫 判衛尉寺事)이다. 동생(童生)은 지금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 典工判書)이다. 딸 한 명은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 김대경(金臺卿)에게 시집갔다. 손자들 약간 명이 있다. 위위(衛尉 : 보생)는 색(穡 : 이색)의 매부이며, 자식은 없다. 판서(判書 : 동생)는 먼저 익재 시중(益齋 侍中 : 이제현)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경(經)은 봉상대부 삼사부사(奉常大夫 三司副使)이고, 위(緯)는 전교시교감(典校寺校勘)이며, 수문(秀門)은 별장이다. 딸은 집에 있다. 계실(繼室)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은퇴한 채자(蔡滋)의 딸로, 아들을 한 명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증손이 약간 명 있다. 부사(副使 : 經)는 찬성사 기유걸(贊成事 奇有傑)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다. 교감(校勘 : 緯)은 판사 이사의(判事 李思義)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도 약간 명 있는데, 가구(可久)는 중현대부 전교령(中顯大夫 典校令)이다. 외손녀는 정순대부 판전교시사(正順大夫 判典校寺事) 김희(金禧)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봉선대부 사재부령(奉善大夫 司宰副令) 정지(鄭漬)에게 시집갔다. 외증손도 약간 명 있다. 전교령(典校令)은 선공령(繕工令) 권승구(權承矩)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고, 판전교(判典校)는 자식이 없으며, 부령(副令)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내가 이미 아이였을 때 판서공(判書公)께서 우리 집을 왕래하셨는데, 모습은 살이 쪄서 퉁퉁하고, 말씀은 자상하여 두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금 자랐을 때, 대신(臺臣)과 헌사(憲使)가 되었음을 듣고서 기강이 있는 열장부(烈丈夫)임을 알았다. 돌아가신 뒤에 직접 가르침을 얻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고, 원로(老成)가 없음을 슬퍼한지 오래였다. 하물며 전공(典工 : 童生)이 진사과에 합격하여 시대의 뛰어난 재사로 이 부(府)에 들어오고, 지방관으로서 이르는 곳마다 사랑을 남긴 것이 있었다. 그가 묘지명을 청하였을 때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그 세계(世係)를 적고 명(銘)을 짓는다.
증조 득주(得株)는 좌복야(左僕射)이다. 할아버지 문규(文圭)는 예빈경(禮賓卿)이다. 어버지 관(琯)은 중현대부 전객령(中顯大夫 典客令)이다. 외할아버지는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인 대령(大寧 : 황해도 해주)인 최서(崔壻)이다.
명하기를,
동해의 구석에서 우리 공이 나셨네
붉은 태양이 빛나는 곳에 꽃이 바람에 실려 드날렸다
우리 충선왕을 섬겨 원나라 수도에서 붓 잡았고
충숙왕을 모시니 위엄이 지척에 임하였다.
궁문에서 판결하여 흑과 백을 분석하니
이에 중승(中承)으로 발탁되고 나라의 사직을 맡았다.
강릉을 존무(存撫)할 때 바다는 따르고 산은 오르니
일방이 고요해지니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오직 오랫동안 다스리니 풍화가 이어졌다.
송사 없는 것을 숭상하니 추관(秋官)의 장이요
그 베품은 다하지 않았는데, 무덤에는 풀이 무성하네.
나의 명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니 태사(太史)의 맡은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