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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사당기(鄭仁祠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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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사당기(祠堂記)는 이곡(李穀)의 문집 『가정집(稼亭集)』 권 4에 실려 있으며, 1345년(충목왕 1)에 이곡이 작성하였다.
사당기의 주인공 정인(鄭仁 : 1255~1333)은 하동(河東)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공윤(公允)이며, 할머니는 최씨이다. 아버지는 성량(性良)으로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포씨(匏氏)는 영양군부인(榮陽郡夫人)에 추봉되었다.
정인은 나이 11세인 1300년(충렬왕 26) 내시로 충렬왕을 따라 성종(成宗) 황제를 뵌 이래로 인종(仁宗), 명종(明宗) 때까지 주로 원나라 궁정에서 숙위하였으며, 평생을 원나라에서 벼슬하며 지냈다. 마지막에 숭록대부 요양등처행중서령 평장정사 주국(崇祿大夫 遼陽等處行中書令 平章政事 柱國)에 추증되었고, 또한 한국공(韓國公)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부인 이씨는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봉해졌으며, 아들 5형제가 있다. 장남은 윤화(允和)를 비롯하여 윤기(允琦), 독만달(禿滿達), 부좌(夫佐)이며 1명의 이름은 미상이다. 딸이 세 사람이다.
한국공 정공사당기(韓國公 鄭公 祠堂記)
묘당(廟堂)의 제도는 오래되었다.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집에 묘당을 짓고, 성스럽고 어질고 공덕(功德)이 있는 사람은 나라나 군현에 묘당을 지은 제도를 살필 수 있다. 한(漢)나라 이래로 예절과 시속이 변하여 묘당에 초상화를 두어 신주를 바꾸는 사람도 있었고, 복(福)을 드린다면 항상 제사를 지내는 것을 폐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가묘(家廟) 외에 또 사당(祠堂)이 있었다. 그러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은 한 가지이다. 무릇 공덕의 대소가 있듯이 그 보답에도 두텁고 박한 것이 있고, 제사 지내는 일도 오래된 것도 있고 가까운 것도 있다.
전 휘정사(徽政使) 정공이 어버이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고향 사람 이곡(李穀)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시절 부모를 떠났는데 이제 늙었다. 부모님 이제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으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부모가 남겨 주신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원나라 내신(內臣)의 반열에 들어 벼슬이 높고 녹이 후하여 3대를 추증(追贈)하게 되니, 은택이 구천(九泉)에 미쳤습니다. 이제 사당을 법당 옆에 짓고 초상을 그려 부모님의 복을 추모하여 오래도록 제사를 지내고, 여러 천자들의 은총을 좋은 옥돌에 새겨서 사당 아래에 세워 황제가 하사하신 것을 드러내고 사모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글을 지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것이 한국공의 사당이 지어진 유래요. 기문을 저술한 이유다.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아버지가 선비가 되고 자식이 대부가 되면, 장사는 선비의 예로 하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한다.” 하였다. 공경히 생각하건데 성스러운 조정이 인(仁)으로써 사해(四海)를 덮고 효도로 천하를 다스려 인심을 양성하고, 사기를 일으켰다. 무릇 내외의 신하로서 자주빛(緋) 옷을 입는 관리 이상이면, 모두가 부모를 관직에 봉하거나 추증하기를 등수에 따라 올라가게 하는, 예수(禮數)가 잘 갖추어져 있다. 혹시 제사를 잘 지내지 않거나 부인의 품행이 좋지 못한 자에게는 허락하지 아니하여 비록 부모나 아내라도 그렇게 하였다. 아! 그 은택을 미루어 그 행실을 책하여 이른바 덕으로 이끌고 예를 가지런히 하여 징계하고 권장하는 뜻이 아울러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적선(積善)하고 적악(積惡)에는 각각 재앙과 경사가 따른다. 자기 당대에 나타나지 않으면 반드시 후손에게 나타난다. 혹은 집안에 이어져 대대로 녹을 먹으며 은총과 권세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갈 때 천여 명 말 탄 사람이 옹위하고, 들어와 식사하는 데 만전(萬錢)이나 소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재앙의 기미가 한 번 나타나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간혹 가난한 집에서 일어나 푸른 구름 위에 올라가서 이름을 역사에 전하고 효도를 귀신에게까지 받들게 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연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공 선조의 공덕은 비록 당시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귀한 아들을 두어서 능히 그 보답을 받기를 이같이 하니, 그 공덕이 쌓인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휘정공은 옛 사람의 글을 읽고 대장부의 뜻으로 행하여 자신에게는 청렴한 것을 법으로 삼고 일처리 하는 데에는 공평하였다. 궁중에서 은총 받고 진신의 지위에 높직이 올라 입신양명으로 부모까지 현달하게 하였으니 훌륭하지 않은가.
한국공의 이름은 인(仁), 성은 정씨로 고려국 하동(河東)사람이다. 숭록대부 요양등처행중서령 평장정사 주국(崇祿大夫 遼陽等處行中書令 平章政事 柱國)에 추증되었고, 한국공(韓國公)은 추봉(追封)되었다. 아버지 성량(性良)은 자선대부 하남강북등처행중서성좌승 상호군(資善大夫 河南江北等處行中書省左丞 上護軍)에 추증되고,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포씨(匏氏)는 영양군부인(榮陽郡夫人)에 추봉되었다. 할아버지 공윤(公允)은 중봉대부 영북등처행중서성참지정사 상호군(中奉大夫 嶺北等處行中書省參知政事 上護軍)에 추증되었고,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봉되었다. 할머니 최씨는 영양군 부인에 추봉되었다. 부인 이씨는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5형제가 있다. 장남 윤화(允和)는 벼슬이 정윤(正尹)이다. 다음 윤기(允琦)는 벼슬이 호군(護軍)이다. 그 다음 독만달(禿滿達)은 휘정공(徽政公)이다. 다음 부좌(夫佐)는 벼슬이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이다. 다음은 모(某)는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딸이 세 사람이며, 손자는 남자와 여자가 몇 명 있다.
처음 대덕(大德) 경자년(충렬왕 26, 1300) 휘정공 나이 11세 때 내시로 충렬왕을 따라 황제를 뵙고, 궁중에서 머물러 일을 보았다. 성종(成宗)이 공이 총명하고 똑똑한 것을 사랑하여, 임인년(충렬왕 28, 1302) 조칙으로 태학에 입학하게 하여 귀족들의 자제들과 글과 예절을 익혀 이미 대의에 통달하였다. 인종(仁宗) 잠저의 급사를 명하였다. 지대(至大) 기유년(충선왕 1, 1309) 전보감승(典寶監丞)에 임명되고 품계는 봉훈대부(奉訓大夫)였다. 얼마 후에 전서대감(典瑞大監)에 승진되어, 감(監)에서 원(院)이 되고 여섯 번 승진하여 사(使)가 되고, 자선대부(資善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이용감(利用監)의 서리가 되어 금옥부(金玉府)를 감시하게 되었다. 인종의 사랑과 대우를 받는 내시로서 공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천력(天曆 : 원 명종의 연호, 1328~1329)초 장패경(章佩卿)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에 다시 전서사(典瑞使)가 되었다. 또 네 번 옮겨 광록대부 휘정사 연경사(光祿大夫 徽政使 延慶使)를 거쳐 제조장알사사(提調掌謁司事)가 되었다. 휘정사로 있을 때 힘쓰는 것이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해 올리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이 공을 옳게 여겼다. 곡(穀)이 일찍이 속관(屬官)이 되어 공의 자세한 사정을 잘 알아 감히 그 대략을 서술한 것이다.
한국공은 나이 79세로 원통(元統) 계유년(충숙왕 복위2, 1333) 12월 12일에 집에서 별세하였다. 이듬해 대부인에게 봉작하는 은총이 내렸다. 태부인은 봉한 지 여섯 해 되는 지원(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7월 19일에 별세하였다. 나이 74세였다. 그 후 7년이 되어 사당을 지었다. 지정(至正) 5년 을유년(충목왕 1, 1345) 3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