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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묘지(全信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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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최해(崔瀣)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권2와 『동문선(東文選)』권123에 실려 있으며, 최해가 1339년(충숙왕 복위8)에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인 전신(全信)의 자는 이립(而立)이다. 선대는 천안부(天安府)에 적을 두었다. 증조는 세주(世柱), 조부는 인량(仁亮), 아버지는 승(昇)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자(滋)의 손녀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전신은 처음 음직(蔭職)으로 시작했으나, 1301년(충렬왕 27) 과거에 합격한 이래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때까지 벼슬을 하였다. 김해(金海), 성안부(成安府 : 지금의 강원도 원주), 수원부(水原府)의 수령과 복주목사(福州牧使),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하였다. 또한 사헌장령(司憲掌令) 보문각제학(寶文閤提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부인 이씨는 상당군(上黨郡)에 봉해졌는데, 창우(昌祐)의 딸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함창군(咸昌郡)에 봉해졌다. 효진(孝進)의 딸이다. 첫째 아들은 성안(成安)이다. 둘째는 희찬(希璨)인데, 조계종의 중이 되었다. 세째는 불노(佛奴)이다. 맏사위는 한대순(韓大淳)이며, 둘째 사위는 이충인(李沖仁)이고, 그 다음 딸은 어리다.
전백헌묘지(全柏軒墓誌)
지원(至元 : 1264~1294) 대덕(大德 : 1297~1307) 년간은 위로 천자의 밝음이 있어 천하가 태평하였고, 태사 충렬왕은 대를 이은 공신이요, 가까운 인척의 중한 위치로 동방을 다스린 지 35년이었다. 이때 선비의 풍습이 충성스럽고 두터워 귄하지 않아도 스스로 닦았고, 원나라 조정에 가서 벼슬하는 자는 말할 것 없고,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하는 이들도 모두 조심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경박하고 간사한 일을 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2, 30년 이래 세상의 풍속이 날마다 무너져 무엇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고, 간혹 당시의 일을 들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비웃고 손가락질하여 고루하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남아있는 늙은이들 가운데 법을 다스린 이가 있었지만, 요즈음 서로 이어 세상을 하직하여 풍류가 아주 없어지니, 아, 한탄스러운 일이다.
작고한 회의재상(會議宰相) 전공(全公)은 선왕을 섬긴 사람이었다. 공은 근후한 군자로 이름은 신(信), 자는 이립(而立)이다. 선대는 천안부(天安府)에 적을 두었다. 태복소경(太僕少卿)인 세주(世柱),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된 인량(仁亮), 밀직사 대보문(密直使 大寶文)인 승(昇)은 각각 공의 증조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대재(大宰)인 문청공(文淸公) 자(滋)의 손자로 제안군(齊安郡)에 봉해졌다.
공은 처음 아버지의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였다. 신축년(충렬왕 27, 1301) 내시 내의직장(內侍 內衣直長)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숭경부승(崇慶府丞)이 되었고, 그대로 정방(政房)의 관리로 있다가 다시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갑진년(충렬왕 30, 1304) 시국학직강(試國學直講)에 보직되어 금자(金紫)의 복장을 하사받았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안동부 판관(安東府 判官)이 되었다.
지대(至大) 기유년(충선왕 1, 1309)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불러왔는데, 관계(官階)는 봉상대부(奉常大夫)가 더해졌다. 세 차례 옮겨 총랑의랑(摠郞議郞)이 되었다. 신해년(충선왕 3, 1311) 지김해부사(知金海府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안부(成安府 : 지금의 강원도 원주)로, 또 2년 뒤 수원부(水原府)로 옮겼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다가, 헌부(讞部)와 선부(選部)의 의랑(議郞)으로 옮겼다. 정사년(충숙왕 4, 1317) 보문각제학 봉순대부 판내시부숙령부우사윤 지제교 지민부 제거유비창 겸 선군별감사(寶文閤提學 奉順大夫 判內府寺肅寧府右司尹 知製敎 知民部 提擧有備倉 兼 選軍別監使)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충숙왕 6, 1319)에 계림부윤(鷄林府尹), 신유년(충숙왕 8, 1321)에는 복주목사(福州牧使)가 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에 면직되었다가, 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 1330)에 등용되어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 進賢官大提學 上護軍)에 임명되었고, 산계(散階)는 봉익(奉翊)이었다. 이듬해 감찰(監察)을 파하고 동지밀직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 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임신년(충숙왕 복위, 1332) 또 파직당하고, 한가롭게 거처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지원(至元) 기묘년(충숙왕 8, 1339) 7월 7일이며, 나이 64세였다.
부인 이씨는 상당군(上黨郡)에 봉하였는데, 판도총랑(判圖摠郞)인 창우(昌祐)의 딸이며,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김씨는) 함창군(咸昌郡)으로 봉해졌다. 신호위대호군(神虎衛大護軍)인 효진(孝進)의 딸이다. 아들 성안(成安)은 사의서승(司儀署丞)이며, 둘째는 출가하였는데 이름은 희찬(希璨)이고 조계종 중이 되었다. 세째 불노(佛奴)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사위는 전종부령(前宗簿令) 한대순(韓大淳)이며, 둘째 사위는 행중서성지인(行中書省知印) 이충인(李沖仁)이고, 그 다음 딸은 어리고, 손자 한 명도 어리다.
공의 선친 밀직사(密直使) 승(昇)은 선왕(先王)때 왕의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관리의 평가를 맡았는데, 사람들이 공평함을 칭찬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 들어가서도 아버지와 같다고 하여 중히 여겨졌다. 얼마 안 가서 왕이 친히 정사하는 데에 게으르게 되자, 공은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다스렸다. 뒤에 자주 벼슬이 갈려 높은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의 업적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 많아서 공이 떠나간 다음에도 백성들은 더욱 공을 생각하였다.
최후로 헌부(憲府)를 맡아 주관하면서, 늙은 탐관 두어 명을 적발해내고, 하인 무리들[隸竪]중 세력을 남용하여 원래의 문서를 불태워 역을 벗어나려는 자를 억제하니 허물어진 기강이 조금 진작되었지만 1년도 되기 전에 파면되었다. 공은 모든 일을 처리함에 능력을 다하는 데에 힘쓰고 엄중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청탁이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집안이 가난하지만 살림살이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 이것이 공을 군자로 여기는 까닭인 것이다.
만년에 스스로 백헌(柏軒)이라 하니 날씨가 차가와진 이후에야 시든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제(彛齋 : 白頤正) 죽헌(竹軒 : 金倫) 익재(益齋 : 李齊賢) 세 선생과 더불어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서로 모일 때 마다 나를 미치고 비루하다 하지 않고 데려다가 함께 놀았기 때문에 조용히 마주 대할 수 있었다.
성안(成安) 등이 8월 28일로 날을 정하고 서울 동쪽 선흥사(禪興寺) 뒷 동산에 옮겨 장사지내려 하니, 남쪽으로 부인 이씨의 묘와의 거리가 몇 발자욱 되었다. 묘지명 부탁을 받고 어찌 감히 사양할 것인가.
명(銘)에 이르기를,
아 나의 글을 무어라 감출 것인가.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무덤길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네.
그의 뜻 어기지 않으려 함이지. 이 내 글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공의 생애를 생각하면 의 아닌 일하기 부끄러웠는데
재주 없는 이 몸이 글로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황천길 멀고 멀지만 전과 다름없이 보아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