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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걸묘지(尹莘傑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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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최해(崔瀣)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권2와 『동문선(東文選)』권123에 실려 있으며, 최해가 1337년(충숙왕 복위6)에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인 윤신걸(尹莘傑, 1266~1337)의 자는 이지(伊之)이다. 계림(鷄林) 기계현(杞溪縣 : 지금의 경북 포항시 기계면 지역) 사람이다. 증조는 양비(良庇), 조부는 유정(維楨), 아버지는 후(珝)이다. 어머니는 수성 빈씨(壽城 賓氏)이며, 공은 장남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25세에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다. 충렬왕·충선왕· 충숙왕 때 벼슬을 하였다. 문학(文學)으로 세자인 충숙왕을 보좌하였으며, 뒤에 충숙왕이 즉위한 후 재상이 되어 충숙왕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기성군(杞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주씨(朱氏)는 열(悅)의 딸로서, 슬하에 자식이 없다.
고 기성군 윤공묘지(故 杞城君尹公墓誌)
공의 이름은 신걸(莘傑), 자(字)는 이지(伊之)이다. 처음에 문학(文學)으로 왕을 강릉부(江陵府 : 충숙왕의 세자때의 부)에서 보좌하였다. 왕이 즉위하자 재상이 되어 왕의 오랜 신하가 되었다. 나이 72세인 충숙왕 복위 6년(1337) 2월 24일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부인 주씨(朱氏)는 내가 일찍이 조카 휘(暉)와 벗했다고 하여, 휘를 시켜 청하기를 ‘제가 남편을 섬긴 지 54년인데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불행히 자식이 없어 홀로 장사를 지내는데 시간을 지연할 수 없어 점쳐 3월 13일에 일을 치르려 합니다. 글을 새겨 무덤에 넣어 썩어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하였다. 나는 휘와 사이가 두터우니 어찌 거절하겠는가.
공의 선조는 계림(鷄林) 기계현(杞溪縣 : 지금의 경북 포항시 기계면 지역)사람이다. 처음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증조(曾祖) 양비(良庇)는 검교첨서(檢校詹事)를 지냈다. 할아버지 유정(維楨)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다. 아버지 후(珝)는 감찰사(監察史)를 지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선배(先輩) 중에 그 문장을 칭찬하는 자들이 있다. 아버지인 감찰공(監察公)은 수성 빈씨(壽城 賓氏)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공이 장남이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으뜸으로 뽑혔고, 25세에 예부시(禮部試)에서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지원(至元) 31년(충렬왕 20, 1294) 남경유수 사록(南京留守 司錄)으로 임명되었다. (임기가) 끝나고 국학학유(國學學諭)로, 이어 사문대학박사(四門大學博士)가 되었다가 숭경부승(崇慶府丞)으로 옮겼다. 대덕(大德) 11년(충렬왕 33, 1307) 좌정언 좌사간 좌사랑(左正言 左司諫 左史郞)에 각각 임명되었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지대(至大) 원년(충렬왕 34, 1308) 관제를 개혁하여 우헌납 강릉부익선 성균악정(右獻納 江陵府翊善 成均樂正)이 되었으며 품계는 봉선대부(奉善大夫)였다. 황경(皇慶) 원년(충선왕 4, 1312) 전의부령 선부의랑 지제교(典儀副令 選部議郞 知製敎)가 되었고 품계는 봉상대부(奉常大夫)였다.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여러 번 옮겨 봉순대부 밀직사우대언 예문제학지제교 동지춘추관사(奉順大夫 密直司右代言 藝文提學知製敎 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3년(충숙왕 3, 1316) 통헌대부 밀직부사 겸 선부전서(通憲大夫 密直副使 兼 選部典書)가 되었다가, 동지밀직 지밀직 밀직사(同知密直 知密直 密直使)로 옮겼다. 예문대제학 지춘추관(藝文大提學 知春秋館)으로 승진했고, 위계는 광정대부(匡靖大夫)였으며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태정(泰定) 원년(충숙왕 11, 1324) 대광 삼사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大匡 三司使 進賢館大提學 上護軍)이 되었고, 겨울에 기성군(杞城君)에 봉해졌으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으로 올랐다.
공은 사람됨이 엄중하고 말이 드물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면 마치 진흙을 바른 것 같아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대덕(大德) 년간에 학관(學官)이 되었을 때, 집정(執政)이 박사를 임명하면서 하나의 경전만으로 시험을 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이 박사가 된 사람이 많았다. 왕이 이를 듣고 선발을 엄격히 하여 반드시 육경(六經)에 통달한 자를 임명하게 하였다. 공만이 모두 잘 알아서 임명이 되어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태위왕(太尉王 : 忠宣王)이 이로 인하여 왕의 스승으로 뽑았다. 부자간인 충렬왕과 충선왕을 잘 섬겼다. 오랫동안 관리의 인사를 맡아 보면서 함부로 경중(輕重)을 매기지 않아 모두가 장자(長者)라고 지목하였다.
스스로 일에서 물러난 뒤에는 문을 닫고 손님을 맞아 들이지 않았으며 항상 홀로 지내며 바깥의 일을 묻지 않았다. 이렇게 하다 10여년 만에 죽었다. 아! 공은 독실하고 신중한 군자라 할 만하다.
부인인 주씨(朱氏)의 아버지인 열(悅)은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충렬왕 때의 명대부(名大夫)이다. 공이 돌아가자 주씨는 공의 조카 형(衡)과 희보(希甫) 두 사람에게 일을 주관하게 하였고 또 조카 휘(暉)에게 그를 도우라 하니 그 모두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명(銘)하기를,
나는 천하의 이치를 감히 모두 안다고는 못하겠으나, 대강은 어떠한지를 안다.
그러나 유독 사람의 자손이 있고 없는 것만은 이치를 미루어 알 수 없다.
당연히 현명한 자에게는 후손이 있을 만한데 도리어 없고,
불초(不肖)한 자는 의당 끊어질 만한데 어찌 도리어 번성하는가?
이것이 내가 여러 번 고심하여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윤씨(尹氏)의 상(喪)을 당하고 보니
나 또한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 공은 오히려 조카 둘을 두었으니,
어찌 공에게 후손이 없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