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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충묘지(元忠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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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최해(崔瀣)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권2와 『동문선(東文選)』권123에 실려 있으며, 최해가 1337년(충숙왕 복위6)에 작성하였다.묘지명 주인공인 원충(元忠, 1290~1337)의 자는 정보(正甫)이다. 선대는 신라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원주)사람이다. 11대조인 극유(克猷)가 처음 고려에 벼슬하였다. 할아버지는 부(傅), 아버지는 관(瓘)이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낙랑군(樂浪郡)에 봉해졌으며, 신(信)의 딸이다.묘지명에 따르면 원충은 충선왕과 충숙왕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 사저에 있을 때 시종하면서 벼슬길에 올랐으며, 충숙왕 때 재상으로서 활동하였다. 부인 홍씨(洪氏)는 남양군부인(南陽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규(奎)의 딸이자 충숙왕 덕비(德妃)의 언니이다. 아들은 세 명으로 호(顥), 후(詡), 의(顗)이다. 딸은 다섯인데, 장녀는 김광리(金光利)에게, 차녀는 홍유(洪瑜)에게, 3녀는 나영걸(羅英傑)에게 각각 시집갔다. 4녀는 왕서(王諝)에게 시집가 나라의 종친이 되었다. 막내는 어려 집에 있다.참고로 할아버지 원부, 아버지 원관 및 장인 홍규 및 홍규 부인 김씨의 묘지명이 있다.
유원 고 무덕장군 서경등처수군만호 겸 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 고려재상 원공묘지 (有元 故 武德將軍 西京等處水手軍萬戶 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 高麗宰相 元公墓誌)
왕경(王京) 남쪽 성(城)에서 3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꿈틀꿈틀한 모양으로 가는 듯, 엎드린 듯하다가 돌아보는 듯 멈춰 있다. 물은 간방(艮方 : 북동쪽)에서 흘러나와 졸졸 흐르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흘러나와 곤방(坤方 : 서남쪽)에 이르러 흐름은 도랑이 되어 큰 강과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대하여 무덤자리가 형세를 얻었으니, 덕을 쌓은 언덕이라고 할만 하도다. 이곳이 돌아가신 정동만호(征東萬戶) 재상(宰相) 원공(元公)이 묻힌 곳이다. 장례는 후지원(後至元)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 6월 정유일이다. 마을 사람 최모(崔某 : 崔瀣)는 여러 아들들의 요청을 받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곧바로 공의 행적을 적고 또 명(銘)과 시(詩)를 지어 그 아들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공의 이름은 충(忠)이며, 자(字)는 정보(正甫)이다. 선대는 신라 북원인(北原人 : 지금의 강원도 원주)이다. 11대조인 극유(克猷)가 처음 고려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다. 할아버지 부(傅)는 충렬왕(忠烈王) 때에 재상(宰相)을 하여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아버지 관(瓘)은 돌아가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다. 대부인(大夫人) 김씨(金氏)는 낙랑군(樂浪郡)에 봉해졌으며 돌아가신 승지(承旨) 신(信)의 딸이다.
공은 지원(至元) 27년(충렬왕 16, 1290) 경인에 태어났다. 8세 때 음서(蔭敍)로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에 임명되었다. 18세(충렬왕 33, 1307)때 비로소 불러 들여 충선왕을 먼저 원나라 서울의 관저에서 섬겼다. 발탁되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에 임명되었으며 날마다 총애(寵愛)를 받아 성(姓)을 왕씨(王氏)로 하사받고 이름을 주(鑄)로 고쳤다. 중문부사(中門副使)로 옮겼다가 전부령 사복정 농화우사윤(典符令 司僕正 穠華右司尹)에 옮겼다. 관계(官階)는 봉상(奉常)에서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이르렀다. 왕이 더욱 귀하고 다르게 여겨 특별히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나이가 어리고 무지한데도 갑자기 삼품(三品)에 오른다면 비난받을 것입니다. 무릇 후설(喉舌)의 직책(왕의 명령을 전하는 직책)은 깨끗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뜻을 거슬러 그 성명(姓名)을 회복하도록 명하고, 관직을 깎아 내려 지철주사(知鐵州事)로 하여 부임하도록 재촉하였다. 지대(至大) 3년(충선왕 2, 1310) 8월이다. 철주(鐵州)를 4년간 다스리는 동안 행정은 간편해지고 백성은 편히 여겼다. 황경(皇慶) 2년(충선왕 5, 1313) (충선)왕과 지금의 왕(충숙왕)이 귀국하자, 공은 압록강 위에서 맞이하였다. 대우가 처음과 같이 대우하고 왕을 쫓아 왕경에 돌아오게 되었고, 전의령 겸 중문부사 밀직대언 세자우사윤 지총부사(典儀令 兼 中門副使 密直代言 世子右司尹 知惣部事)에 임명되었다.
연우(延祐) 3년(충숙왕 3, 1316) 통헌대부 밀직부사 좌상시 상호군(通憲大夫 密直副使 左常侍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7년(충숙왕 7, 1320) 밀직사(密直使)로 승진했으며 관계는 광정(匡靖)이다. 얼마 후에 상의평리(商議評理)가 되었다. 지치(至治) 원년(충숙왕 8, 1321) 왕을 따라가서 천자(天子)를 조회(朝會)하였다. 이때 태위왕(太尉王 :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가게 되자 원나라 수도에 머물렀다. 위태로운 무리가 종사(宗社)를 뒤엎으려는 모략을 꾸미자 수행 대신들 또한 모두 마음을 바꾸어 형세가 예측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공은 홀로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끝까지 다른 마음이 없자 조정의 식견있는 사람들이 공을 칭송하였다.
태정(泰定) 원년(충숙왕 11, 1324) 태위왕(太尉王)이 서쪽에서 돌아오고 (충숙)왕은 작위를 회복하자, 공에게 추성좌리공신 중대광 첨의찬성사 판민부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 重大匡 僉議贊成事 判民部事 上護軍)에 임명하였다.
다음 해(충숙왕 12, 1325) 왕이 귀국하게 되자 부왕(父王 : 충선왕)이 헤어지면서 왕에게 “원충(元忠)은 곧 대대로 녹을 먹은 오래된 집안이자 외척이다. 나라를 구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다른 신하와 비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말을 잘 듣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공에게 경계하여 “그대는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왕을 보좌하라” 고 말하였다. 귀국한 후 (이간하는) 말이 들어가 소외되어져 5년간 한가하게 지냈다. 지순(至順) 원년(충숙왕 17, 1330) 전왕(前王 : 충혜왕)이 왕위를 잇자 공을 기용하여 전직(前職)에 임명하였다가 판군부감찰사사(判軍簿監察司事)로 승진되었다. 금왕(今王 : 충숙왕)이 원나라에 입조하자 겨울에 공이 하년표(賀年表)를 받들고 원도(元都)에 갔다. 3년에 (충숙)왕이 복위하고 전왕(前王 : 충혜왕)이 원나라에 가자 관직에서 교체되어 원나라 수도에 머물렀다.
원통(元統) 2년(충숙왕 복위3, 1334) 황제의 명을 받들어 호부(虎符)를 차고 무덕장군 서경등처수수군만호 겸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武德將軍 西京等處水手軍萬戶 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가 되었다. 후지원(後至元) 2년(충숙왕 복위5, 1336) 휘정원(徽政院) 차사(差使)를 받들어 역마를 타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일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을 보고서 토지와 집을 구하여 지내려는 뜻은 있었다. 이듬해(충숙왕 복위6, 1337) 병에 걸려 의원을 불렀으나 효험이 없었다. 5월 기유에 이르러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이 48세였다.
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진실하여 마음에 치우치는 일이 없었다. 일의 변하는데 처하는 것이 마치 배운 듯이 하였다. 처음에 대언(代言)을 그만둔 뜻도 자만함을 꺼렸기 때문이다. 지치(至治) 연간(충숙왕 8~10, 1321~1323)에 임금을 받들면서도 또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켰으며 일마다 성심(誠心)으로 일을 하였다. 모두 또한 숭상할 만하다. 한때 당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재상(宰相)이라고 말하는데 바야흐로 한창인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 천명(天命)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부인 홍씨(洪氏)는 남양군부인(南陽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죽은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규(奎)이며, 충숙왕 덕비(德妃)의 언니이다. 아들은 세명이다. 호(顥)는 전 흥위위호군(前 興威衛護軍)이며, 후(詡)는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이며, 의(顗)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딸은 다섯이다. 장녀는 친어군별장(親禦軍別將) 김광리(金光利)에게, 차녀는 전좌우위호군(前左右衛護軍) 홍유(洪瑜)에게, 3녀는 관고려군만호(管高麗軍萬戶) 나영걸(羅英傑)에게 각각 시집갔다. 4녀는 정윤(正尹) 왕서(王諝)에게 시집가서 나라의 종친이 되었다. 막내는 어려서 집에 있다.
명(銘)에 이르기를
아아,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구나.
사물(事物)은 둘 다 보전키 어렵네.
지위를 얻고 또 장수하는 일은
어찌 모두 하늘이 책임지우리.
공은 이미 부귀하였네.
부족한 것은 수명 뿐.
어찌해야 천명(天命)을 아는 자 얻어
더불어 자연을 논할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