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밀직부사치사(故密直副使致仕) 박공묘지(朴公墓誌)
공의 이름은 화(華), 성은 박씨이다. 선대는 대대로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경남 밀양)에 적을 두었다. 증조 기보(奇輔)는 일찍이 중군녹사(中軍錄事)로서 나라 일로 사망하였다. 관직이 대관전직(大觀殿直)이고,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홍승(洪升)은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을 지냈고, 위위승(衛尉丞)에 추증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함(諴)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고, 예빈윤(禮賓尹)에 추증되었다. 예빈부군(禮賓府君 : 아버지)은 음죽 안씨(陰竹 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부인은)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이 분이 공을 낳았는데, 원나라 헌종(憲宗) 제2년 임자년(고종 39, 1252)이다.
지원(至元) 15년(충렬왕 4, 1278) 전리사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전주 임피현위(全州 臨陂縣尉)에 임명되었다. 직을 마친 후 내시(內侍)로 여러 해 동안 있으면서 공을 쌓았다. 판적요직 공역서▨사온서령 자운방판관(板積窯直 供驛署▨司醞署令 紫雲坊判官)을 역임하였다. 지대(至大) 3년(충선왕 2, 1310)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어 경상도의 안렴사로 나가서 여러 주의 쌓인 문서를 조사하고 적발하는데 숨김이 없었다. 적발을 당한 자들이 시기하여 오히려 공격을 받아 해임되었다. 연우(延祐) 3년(충숙왕 3, 1316) 장자인 인간(仁幹)이 태위심왕(太尉瀋王 : 충선왕)의 사저에 부름을 받아서
1 선부산랑(選部散郞)에 기용되었다. 또 경원부(慶原府) 수령을 맡았다가 은퇴하였다.
태정(泰定) 원년(충숙왕 11, 1324) (아들) 인간(仁幹)이 태위왕(충선왕)을 따라 토번으로부터 돌아왔다. 다시 기용되어 광주목(廣州牧)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通憲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으로 은퇴하였다. 후지원(後至元) 2년(충숙왕 복위5, 1336)정월 12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5세였다. 3월 8일에 왕경의 동쪽 대덕산 감은사의 북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부인 조씨(趙氏)는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에 봉해졌다. 작고한 재상 문량공 간(文良公 簡)의 누님이다. 공보다 4년 먼저 별세하였다. 자식은 아들이 5인, 딸이 2인이다. 인간(仁幹)은 경자년(충렬왕 26, 1300) 과거에 급제하고 다시 을묘년(충숙왕 2, 1315) 응거시(應擧試)
2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진성병의익찬공신 광정대부 첨의평리(盡誠秉義翊贊功臣 匡靖大夫 僉議評理)이고 현재 한양부윤(漢陽府尹)이다. 인지(仁祉)는 신미년(충혜왕 1, 1331) 과거에 급제하고 사설서령(司設署令)이다. 인기(仁杞)는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 인익(仁翊)은 군부좌랑(軍簿佐郞), 인우(仁宇)는 을묘년(충숙왕 2, 1315) 과거에 급제하고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이다. 딸은 중문지후 유소(中門祗候 柳韶)와 판도좌랑 서평(版圖佐郞 徐玶)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는 남자가 6인, 여자가 2인이다.
공은 성품이 공손하고 부지런하다. 관직에 있을 때 근신하였으며, 나아가고 얻는 일에는 청렴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어린 자제들을 자상하게 가르치면서, 반드시 학문에 종사하도록 권하기를, “사람은 배움이 없으면 설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만약 과오가 있으면 또한 엄하게 질책하였다. 다섯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게으르지 않았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모두 훌륭하고 능력이 있다고 칭찬받았다. 그 중에 맏아들은 선왕(先王 : 충선왕)을 따라 먼 곳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일을 맡아 자기 몸을 잊고 마침내 공명을 성취하였다. 대개 일찍이 의방(義方 : 부친의 가르침)으로 격려된 까닭이다.
젊어서 벼슬에 올라 관직이 비록 낮은 자리를 돌며 현달하지 못했지만 만년에 자식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으로 지낼 수 있었다. 나이가 90에 이르러 생을 마쳤으니, 아! 더 바라겠는가. 내가 듣건대 “(나라의) 일에 죽은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크게 된다”고 하였으니, 역시 그 선대의 보답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명(銘)하기를,
아! 공의 둘째 아들 인지(仁祉)는 일찍이 대덕(大德) 6년(충렬왕 28, 1302) 나와 더불어 사마시에 같이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이다.
내가 이미 그 아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으니 공에게 아버지처럼 절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그러므로 그 맏아들의 아우는 나를 따르고 나는 그를 동생으로 여기면서 형으로 자처하니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공의 일문(一門)은 부자 형제가 죽어서나 살아서나 의리가 정밀하고 정이 돈독하고 두터웠다.
이제 흙으로 돌아감에 마땅히 명(銘)이 있어야 하기에, 내가 그 붓을 잡았지만 오히려 죽은 혼령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