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故) 사헌지평(司憲持平) 김군(金君) 묘지명(故 司憲持平 金君 墓誌名)
우리나라 사람들의 품성은 거만함이 많고 학문에 힘써 기품을 양성하지 않는다. 간혹 세속에 따라 출세하여 처와 자식에게 잘 먹고 입히게 하려한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옳게 여기지만 군자의 의논에는 어긋나는 점이 있다. 의리를 밝히고 출처를 살피는 데에 다른 사람이 옳다하거나 옳지 않다는 것을 각각 영예와 수치로 여기지 않을 사람이 대체로 없다. 하물며 쇠퇴한 때에 선비들이 정한 의논 없이 복을 따르고 화를 막느라고 들어와서는 주인노릇하고 나가서는 종노릇을 하니 이런 때에 중도(中道)를 가면서 홀로 다시 굳건하게 스스로 처신한다면 청렴한 선비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계(愚溪) 김군(金君)이 이에 가까은 사람일 것이다.군은 근대 이름난 학사 둔촌공(鈍村公)의 막내아들이다. 처음 태위왕(太尉王 : 충선왕)이 세자 때 둔촌공이 스승이 되자, 두 아들을 왕에게 보이었다. 왕은 특별이 군을 총애하여 대우하는 데에 남다른 예절이 있었고, 후에 왕위에 올라 발탁하여 감찰사(監察史)에 임명하고 옮겨 전부시승(典符寺丞)이 되었다. 당시 군이 옛 신하이고 현명하므로 모두들 크게 쓰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마침 내시 가운데 간악한 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있어 섬으로 내쫓겼으며
1 곤궁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나, 공은 태연하게 마음에 달게 여기는 것 같았다. 돌아와서 집안의 정원에 있으면서, 때로 손님이 오면 술을 내고 거문고를 타며 시를 짓고 스스로 즐기면서, 다시 명예와 벼슬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15년이었다.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 지금의 왕(충숙왕)이 원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개연히 일을 바로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군에게 통직랑 사헌지평(通直郞 司憲持平)에 임명하여 억지로 나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일을 한지 수 개월만에 사림들은 정치가 정돈되고 맑아지기를 기대하였다. 마침 이때 세도가[炎客]가 황실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우리나라를 멸시하여, 마음대로 사헌부의 관리를 내쫓고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군이 왕문(王門)에서 그것에 대해 변명했는데 매우 격렬하여 도리어 공격을 받았다.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으며 집에 있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굴욕을 받은 자는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하였으며 군자는 그가 떠나가는 것을 탄식하였다. 지난해 가을 갑자기 병이 나서 약으로 치료하지도 않고 나았는데, 지난달에 병이 다시 나서 하루만에 별세하였다. 아, 슬픈 일이다.
군은 성품과 자질이 굳세고 바르며 시와 글씨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으며, 사람을 사귀는데 신의로서 하였고, 오래 사귈수록 더욱 무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군이 뜻을 품은 바가 너무 높게 가지고 조금도 낮추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속된 사람들이 스스로 한 말이요, 군에게 대하여 할 말은 아니다. 무릇 선비가 이 세상에 나면 때를 잘 만나는 사람도 있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잘 만나면 도가 행해져 은혜를 입은 자 많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스스로 얻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잘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과 불행이 되는 것이지, 내게 있어서 무엇이 손해이고 무엇이 이익이 되겠는가.
군의 자는 원구(元龜), 이름은 서정(瑞庭)이다. 뒤에 개물(開物)로 고쳤다. 일찍이 진사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스스로 호를 우계(愚溪)라 하였다. 선조는 복주(福州) 의성현(義城縣)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굉(閎)은 벼슬이 감찰어사였다. 아버지는 둔촌공(鈍村公) 훤(暄)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다. 어머니 이씨는 어사 방순(方咰)의 딸이다. 군은 두번 장가들어 1남 5녀를 두었다. 1남은 섬(銛)은 권지전교시 교감(權知典校寺 校勘)이다. 장녀는 모관(某官)인 모(某)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모(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모(某)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두 딸은 아직 어려서 집에 있다. 군은 지원 계유(至元 癸酉 : 1273, 원종14) 10월 경술(庚戌)일에 태어나 태정(泰定) 정묘년(충숙왕 14, 1237) 2월 무술(戊戌)일에 별세하였다. 이 해 3월 임인(壬寅)일에 장사지냈는데, 모산(某山)의 언덕에 묘소가 있다. 군이 나를 속된 선비로 대접하지 않으며, 그 아들에게 명하여 나에게 와서 배우게 하였으므로 삼가 묘지명을 짓는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가능한 것은 학문이요 행실이며, 불가능한 것은 지위며 수명이다.
오직 군자인 연후에야 가능한 것을 취하여 힘써 행하며,
불가능한 것을 버리고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아, 우계여, 그렇다면 다시 무엇을 부족하게 생각하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