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윤승해묘지(尹承解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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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5와 『동문선(東文選)』권122에 실려 있으며, 이규보가 작성하였으나 작성연대는 미상이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윤승해(尹承解, ?~?)의 자는 자장(子長)이며, 수주(樹州 : 지금의 인천 부평 일대) 수안현(守安縣 : 경기도 김포 일대) 사람이다. 삼한공신 윤봉(尹逢)의 7세 손이다. 증조부는 형(衡), 조부는 수(壽)이다. 아버지는 유연(裕延)이며, 둘째 아들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윤승해는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두 번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다. 음서로 벼슬길에 나갔다. 문음(蔭門)으로 벼슬길에 나가 주로 수주(水州)·진도(珍道)현령 서북도(西北道)의 분대어사(分臺御史)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묘지명은 당시 지방관과 지방사회의 실정이 잘 드러나 있다. 부인 장씨(長氏)는 충의(忠義)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다. 송균(松筠)과 송죽(松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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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등사랑 검교상서호부시랑 행상서도관원외랑 사자금어대 윤공묘지명(登仕郞 檢校尙書戶部侍郞 行尙書都官員外郞 賜紫金魚袋 尹公墓誌銘)
내가 글을 짓되 비갈 명지(碑碣銘誌)에 이르러 진실로 그만한 사람이나 그만한 사실이 아니면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남산(南山)의 돌이 그 무슨 죄가 있기에 그 곧은 바탕을 새겨서 과분하게 칭찬한 말을 쓸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윤공(尹公)이 작고하자 이미 그만한 사람을 얻고 또 그만한 사실을 얻었으므로 서술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공은 이름은 승해(承解), 자는 자장(子長)이며, 수주(樹州 : 지금의 인천 부평 일대) 수안현(守安縣人 : 경기도 김포 일대) 사람이다. 삼한공신 내사령(三韓功臣 內史令)인 명의공(明義公) 윤봉(尹逢)의 7세 손이다. 증조부 형(衡)은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이다. 조부 수(壽)는 대악서승(大樂署丞)이다. 부친 유연(裕延)은 검교호부상서 행상서호부낭중 사자금어대(檢校戶部尙書 行尙書戶部郎中 賜紫金魚袋)이다. 공은 상서부군(尙書府君)의 둘째 아들이다.
공은 어릴 적에 부지런히 공부하여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문과에 두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되지 못하였다. 음문(蔭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지수주사 판관(知水州事 判官)에 임명되었다. 수주(水州 : 지금의 수원시)는 풍속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기를 희망하여 청렴하기가 어려웠다. 정사는 모두 우선 고식적으로 처리하고 아전들은 그것이 버릇이 되어 느슨하고 해이하여 기율이 없었다. 공이 부임하여 일체 법으로 다스리자, 아전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정면으로 보지 못하였다. 모든 약속을 한결같이 법 조문대로 하여 감히 어기는 자가 없어, 정사를 잘한다고 알려졌다. 임기가 차 현덕궁녹사(玄德宮錄事)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 좌우위 녹사참군사(左右衛錄事參軍事)에 옮겨졌다.
얼마 후 진도현령(珍島縣令)이 되었다. 청렴과 검소함으로 수주에서 다스리던 것처럼 하였으나, 위엄과 사랑은 그보다 더하였다. 진도현은 바다 가운데 있어 누추하고 오랑캐의 풍습이 있었다. 손님을 응대하는 데도 다른 고을과 같지 않아, 명을 받고 내려온 사신들은 이를 괴롭게 여겼다. 공은 모두 개혁하여 큰 고을과 같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고기잡이와 소금구우는 일만 믿고 농사에 힘쓰지 않았다. 공이 힘써 농사짓는 일을 독려하였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수입을 얻게 된 뒤에는 도리어 즐거이 따라, 흉년이 들어도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다.
중앙으로 올라가 신호위 녹사참군사(神虎衛 錄事參軍事)가 되었다. 계사년(명종 3, 1173) 서울에 병란이 일어나자 모든 벼슬아치들은 도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만은 관직을 확고히 지키어 신색(神色)이 태연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기어 불러 만나보고서, “전에 네가 충성스럽고 용맹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실제를 보았다” 하고서 다시 신호위 별장(神虎衛 別將)에 임명하였다. 공은 무관직은 본래 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받지 않았다. 뒤에 각문지후(閣門祗候)에 임명되었다가 곧 감찰어사(監察御史)에 발탁되었다. 지방으로 나가 서북도(西北道)의 분대(分臺 : 分臺御史)가 되었다.
이에 앞서 성주(成州)의 호당(豪黨)들이 제멋대로 관기(官妓)를 죽였다. 전후에 명을 받은 사신들이 처음에 그 죄상을 추궁해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형세가 일반 백성에게까지 미쳐 모두 잡아 가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온 고을이 소란해지자 얼마 후에 그 일을 불문에 붙였다. 이로 인하여 이곳이 항상 뇌물 바치는 소굴이 되었다. 공이 (성)주에 들어가 신문하고 자세하게 조사하여 주모자와 직접 살인한 자만을 찾아내어 목베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스리지 않았다. 온 고을이 편안해지자, 안팎으로 모두 경사로 여기었다. 공은 중앙에 올라가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어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또 상서도관 원외랑(尙書都官員外朗)에 전임되고, 금자(金紫 : 金印紫綬)를 하사받았다.
임금이 일찍이 간관(諫官) 송단(宋端)을 남쪽 지방에 보내어, 10년 이래 수령들의 정치 성적의 우열을 알아보게 하였다. 수주에서 공이 다스리던 것을 최상으로 든 지가 무릇 30년이나 되었다. 송공(宋公)이 말하기를, “조칙은 10년까지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니 조칙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까 두렵다” 라고 하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천자께서 사신을 보낸 까닭은 특이한 정치를 구하려는 것입니다. 윤공의 끼친 자애가 지금도 백성의 마음에서 가시지 않아 오히려 전일과 같기 때문에 들어 말한 것인데, 어찌 시기의 멀고 가까움을 논하겠습니까?” 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청원이 매우 간절하여 송공은 허락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임금은 더욱 감탄하였고, 유사(有司) 또한 감히 헐뜯지 못하였다.
공이 모년(某年) 월 일 병을 얻어 집에서 별세하였다. 나이는 약간이었다. 모(某) 월 일 모산(某山)에 장사지냈다. 부인 장씨(長氏)는 대부경(大府卿) 충의(忠義)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다. 송균(松筠)과 송죽(松竹)이다. 송균은 일찍이 밀성(密城)에 원 노릇을 하였는데, 청고(淸苦)하고 엄의(嚴毅)하기로 알려졌다. 송죽은 아직도 산관(散官)이다. 딸 하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공은 인품이 단아하고 정직하여 할 말은 과감하게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집에 남아도는 양식이 없지만 가사에 대해 묻는 일이 없고 항시 마음이 화평하였다. 조석으로 오직 관직을 충실히 지키는 것만으로 뜻을 삼았으니, 참으로 조정의 정직한 사람이었다. 벼슬이 원외랑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아들 송균 등이 공의 세계(世系)와 관작을 기록해 가지고, 내가 전부터 아는 사람을 통하여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는 감히 거절할 수가 없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나의 선친이 공과 동료간이었고, 그가 찾아오기만 하면 쉴 새 없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그 분을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약간은 알고 있으며, 또 적혀 있는 유적으로 말하면, 모두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자손이 나열해 가지고 와서 청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야말로 그만한 사람, 그만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붓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자손에게 백금을 물려준다면 화만을 부르게 하는 것인데,
공은 홀로 청렴을 물려주어 만세의 보배가 되게 하였다.
울창한 저 언덕에 묘소를 잡았으니,
공이 이 자리에 보존돼야 바로 자손들이 보존된다.
명을 새겨 광중에 넣어 후세의 상고를 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