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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의처인씨묘지(金元義妻印氏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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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5와 『동문선(東文選)』 권122에 실려 있으며, 이규보가 작성하였다. 작성연대는 고종대로 추정되나 자세한 연기는 미상이다.
묘지명 주인공 인씨(印氏, ?~?)는 영보(英寶)의 둘째 딸로서 김원의(金元義)의 처이다. 본관은 미상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공수(公粹)이며, 작은 아들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딸은 유창서(劉昌緖)에게 출가하였다.
묘지명은 부인이 가정에서 부도(婦道)를 다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남편 김원의의 묘지명이 있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상장군(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上將軍) 김공(金公) 인씨부인(金公印氏夫人) 묘지명(墓誌銘)
부인은 성이 인씨(印氏)이며, 모현인(某縣人) 출신이다. 모관(某官)에 있었던 모(某)의 손자이며, 좌우위 대장군(左右衛大將軍)인 영보(榮寶)의 둘째 딸인데, 지금 참정상국(參政相國)인 김원의(金元義)의 부인이다.
부인은 비녀를 꽂을 나이에 김공(金公)에게 시집왔다. 부인은 본가에 있을 때부터 부모 섬기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고, 형제간에 우애하기를 매우 화목하게 하였다. 출가하자 부모 섬기던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되 예절을 지키고 더욱 공경하였으며, 형제간에 화목하던 것을 옮겨서 남편의 친속에게 화목하되 더욱 후하게 하였다. 비첩(婢妾)에게 너그럽게 하고 가혹하게 하지 않아, 아래 사람들이 비록 무서워하지만 싫어하지 않았다.
참정공(參政公)은 원래 장관(將官) 출신이라, 정벌이나 수자리에 나갈 때의 장비나 예에 따른 잔치의 비용이 번잡하였다. 부인은 그것을 모두 손수 마련하되 정밀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공이 재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부인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이 원래 부유하였으나, 여자가 할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손들이 그것을 말리자 부인은 말하기를, “길쌈과 누에치는 일은 여자의 직업이다. 마치 너희들의 문서(文書)나 필연(筆硯)과 같은 것인데, 어찌 잠시인들 놓을 수 있겠느냐?”하였다. 공이 정승이 된 뒤에야 그 일을 친히 하지 않고 비첩들에게 모두 맡겼다. 만년에는 부처 받들기를 더욱 정성으로 하여,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읽었다.
큰 아들 공수(公粹)는 진사로 급제하여 지금 내시감문위 녹사참군사(內侍監門衛 錄事參軍事)가 되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작은 아들 모(某)는 장관(將官)이 되어 숙위(宿衛)의 일을 맡았다. 딸은 유창서(劉昌緖)에게 출가하였는데, 유창서는 지금 장군이 되었다. 공수가 나와 더불어 한림원의 동료이기 때문에 와서 묘지명을 청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집을 부유하게 함은 재물만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덕성이 고요하고 전일한 때문이었고,
나라에 공 세움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어질게 두면 된다.
아! 남자 부럽지 않을 일을 부인은 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