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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량묘지(庾資諒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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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6과 『동문선(東文選)』권122에 실려 있으며, 1229년(고종 16)에 이규보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의 자는 담연(湛然)이다. 금성(錦城 : 지금의 전남 나주)의 무송(茂松) 사람이다. 증조, 조부, 아버지의 이름은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머니 장씨(張氏)는 찬(贊)의 딸이다.묘지명에 따르면 유자량은 의종 명종·신종·희종·강종 등 무신정권 초기에 활약한 문신이다. 문신이면서도 귀문(貴門)의 자제뿐 아니라 무신들과도 계를 만들어 교유하여 무신정변 때 화를 면하였다. 벼슬에서 은퇴한 말년에는 명사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지낸 기록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어, 이 방면 연구에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유자량의 형인 유응규(庾應圭)는 명종 즉위 사실을 알리려 거란에 갔으나, 의종의 갑작스런 퇴위와 명종 즉위에 의심을 품은 거란을 설득하여 무신정권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무송 유씨 가계는 무신정권기에도 문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유응규의 묘지명도 있어 무신정권기 문신가문의 존재를 살피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된다. 김존중(金存中)의 딸을 아내로 삼아 3남 2녀를 두었다. 자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치사(尙書左僕射致仕) 유공묘지명(庾公墓誌銘)
예로부터 사대부들을 보면, 처음에는 염치로 조심하고 가득차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부귀가 한창일 때는 대개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히 여기면서 태연히 물러갈 줄 모르는 자가 많았다. 우리 복야부군(僕射府君)은 이와 크게 달랐다. 64세에 이미 대신(大臣)의 지위에 올랐으니, 거기에서 정승까지 가는 데 몇 등급이 있다고 지위를 밟지 않겠는가? 그러나 6년 앞서 물러났다. 은총이 넘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벌써 최고 지위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주역(周易)의 이른바 진퇴존망(進退存亡)을 알아서 그 바른 것을 잃지 않는다는 일이 아니겠는가?
유씨(庾氏)는 금성(錦城 : 지금의 전남 나주)의 무송(茂松)에서 비롯하였고, 문벌은 갑족(甲族)이었다. 공은 그 출신이다. 공의 이름는 자량(資諒), 자는 담연(湛然)이다. 증조부 모(某)는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였으며, 조부 모(某)는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였다. 아버지 모(某)는 종묘에 배향한 공신으로 문하시중 수문전 태학사 판이부사 증공숙공(門下侍中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이며, 어머니 장씨(張氏)는 상의봉어(常衣奉御)인 찬(贊)의 딸이다. 이상이 공의 세계(世系)다.
공은 사람됨이 진중하고 순수하며 장중하고 말이 적다. 그 어질고 미더운 것은 사람을 감동할 만하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세상을 다스릴 만하니, 이것이 공의 타고난 천품이다. 의종(毅宗) 때 이르러 문신(文臣)들이 점점 성하였다. 공의 나이 16세때 귀문(貴門)의 자제들과 친교를 맺었다. 공은 견룡행수(牽龍行首)인 오광척(吳光陟)과 이광정(李光挺) 등 무관을 끌어들이려 하자, 여러 사람이 따르지 않았다. 공이 의논하기를 ‘사사로이 노는 자리에도 문무가 구비하면 또한 좋을 것인데 무엇이 불가한가?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겠다고 하여 참여시켰다. 얼마 안 가서 경인년(1170년) 난리가 일어나고 문신들이 거의 다 죽었으나, 대개 친교를 맺은 사람들은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이는 오광척과 이광정의 두 장수가 몹시 애써 구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이처럼 젊어서부터 이미 기미를 아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공은 나이 들자 재상의 아들이라 하여 바로 수궁서승(守宮暑丞)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대악승(大樂丞)에 옮겼다가, 외직으로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었다. 정사를 하면서 사리와 대체를 잘 알아 적발하기를 귀신같이 하여, 한 지방에 모두 그를 칭찬하였다. 이는 공이 처음 고을을 다스린 일이다. 벼슬은 어사(御史) 상의봉어(常衣奉御) 시어사(侍御史) 호부낭중(戶部郎中) 어사잡단(御史雜端)을 역임하였다. 또 금자(金紫)의 옷을 하사받았다. 이후 대부소경(大府少卿) 병형부시랑(兵刑部侍郞) 대부경(大府卿) 지삼사사(知三司事) 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 태자첨사(太子詹事) 판합문(判閤門) 지다방사(知茶房事)를 역임하였다. 품계는 모두 정의대부(正議大夫)였으며, 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역임하였는데 품계는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이것이 공의 벼슬 지낸 순서이다. 혹은 동남쪽 지역을 염찰(廉察)하고 동북쪽 지역에서 군사를 지휘할 적에는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짊과 미더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니, 이것이 공의 봉사(奉使)함에 있어 칭찬을 받는 것이다. 대개 정3품의 작위는 들어가서 정승이 될 수 있는 자리이나, 공이 판사재(判司宰)로 있을 때에는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청하였으며, 호부 상서(戶部尙書)에서 나가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었으니, 이것은 공이 가득차는 것을 사양하고 꺼려서이다.
공이 일찍이 선군사(選軍使)로 군정을 시행할 때 청사 위에 기울어진 기둥이 저절로 일어서므로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떠들었는데, 이는 공의 공평무사에서 얻어진 일이다. 관동 지방에 장수가 되어 갔을 때에는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관음보살에게 예배하였는데 두 마리의 푸른 새가 꽃을 물어다 옷 위에 떨어뜨렸다. 또 한 웅큼쯤의 바닷물이 솟아 올라 그의 이마를 적셨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이 ‘이곳에 푸른 새가 있는데 부처에게 예배하는 자로서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하니, 이는 공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믿음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숭경(崇慶) 2년 계유(강종 2, 1213)에 나이가 많다고 하여 매우 간곡히 퇴직을 청하므로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은퇴하고 집에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卿相)으로 퇴직한 사람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서 때로는 술자리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태평하게 놀며 수양한 지 17년이니, 이것이 공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내던 낙이다. 기축년(고종 16, 1229) 8월 7일에 기로회 잔치에 나가 조용히 놀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날 정오 때에 문득 팔계문(八戒文)을 열람하고 밤에는 세수 목욕하고 편안하게 취침하였다. 아침이 되자 집안 사람을 불러 시간을 묻고서는 홀연히 세상을 떴으니 향년이 80세다. 이것이 공의 마지막이다.
앞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죽어서 한 곳에 가니 궁전 누각이 매우 장엄한데, 지키는 자의 말이「여기는 유복야(庾僕射)가 올 곳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 말이 황당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공의 행적이 이미 부끄러울 것이 없고, 세상을 떠남이 이러하였으니 그 말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좋은 곳에서 살아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좌승선(左承宣) 김존중(金存中)의 딸을 아내로 삼아 3남 2녀를 두었다. 장자 모(某)는 국학학유(國學學諭)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차자 모(某)는 지금 판태복사 지어사대사 보문각직학사 지제고(判太僕事 知御史臺事 寶文閣直學士 知制誥)이다. 계자(季子) 모(某)는 내시(內侍)의 모관(某官)이 되었다가 역시 공보다 앞서 죽었다. 장녀는 모관(某官) 모(某)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다. 계녀는 모관 모에게 시집갔다가 역시 과부로 있다.
장사를 지내려 하면서 지대(知臺)군(차남)이 공의 행적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는 글을 받들고 울면서 ‘아! 옛날 충직의 풍도를 지닌 분이시여! 내가 다시 공과 같은 인인군자(仁人君子)를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명문을 감히 사양할 것이랴’하고,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드러나게 진실한 대신으로 이 나라의 기강이었네.
백성들은 마음으로 공을 우러러보는데 공은 문득 그 지위를 떠났네.
지위가 극진한 데 이르지 않음은 공이 스스로 피한 바라,
공은 스스로 피하였으나 사람들은 부족하게 생각하였네.
머리털 누렇게 오래 사는 것은 공이 원하지 않은 바라,
공은 비록 원하지 않았으나 하늘이 오래 도왔네.
정직한 마음 신을 감동하여 기울어진 기둥이 일어서고 새가 깃드니,
공에게는 보통이지만 사람들 보기에야 이상한 일 아니랴.
아! 오래 전부터 덕을 베푼 이가 가고 마니 세상의 모범 뉘에게 찾으리.
저 산은 높고 높은데 물 흘러 그 아래로 감도니,
이곳이 공이 계신 곳이라 서기가 감도누나.
돌에 새겨 광(壙) 속에 넣으니 만년토록 밝아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