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화장사(華藏寺)
1 주지 왕사(王師) 정인대선사(定印大禪師) 추봉 정각국사(追封靜覺國師) 비명(碑銘)
이규보(李奎報)
2 지음
대저 도(道)란 본래 언제나 같은 그대로인 것인데 무엇이 도를 억제하고 선양하겠는가? 요컨대 세상과 사람이 그렇게 할 뿐이다. 대개 사람이 도를 널리 펴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널리 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천백 년 만에 혹 한번 만나는 것이니, 곧 세상과 사람이 둘이 서로 기다린 뒤에야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도 가운데서 최상을 선(禪)이라 하니, 선이란 문구(文句)에 얽매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갖고 있는 한 신령한 마음을 곧바로 깨닫는 그것일 뿐이다.말세가 되어 잘못된 집착이 칼처럼 굳어, 부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를 밖으로 팽개친 채 도적을 제 자식으로 믿는 것 같은 자가 많았다. 그러나 도란 끝까지 옹색하게 막히지는 않아서, 세상이 장차 옛날로 회복되게 되었다. 이에 진인(眞人)이 나와 도와 바로 합치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정법 또는 불법(佛法). 일체의 것을 비추어 보는 지혜의 눈(佛智)은 물론 일체의 교법을 포함하는 경전)을 얻어 생령(生靈, 살아 있는 영혼, 곧 사람)을 도야(인재를 양성)한 자가 있으니, 바로 우리 국사(國師)가 그런 사람이다.
국사는 성이 전씨(田氏)이고, 휘(諱)는 지겸(志謙)이며, 자가 양지(讓之)이다.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인 운기장군(雲騎將軍) 종회(宗會)에서 나왔다. 광종조(光宗朝, 950~975)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증조부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요, 조부 휘 덕보(德普)는 대창서령(大倉署令)이요, 아버지 휘 의(毅)는 검교 태자첨사이다. 어머니는 남궁씨(南宮氏)인데 양온령(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어머니의 꿈에 범승(梵僧, 인도의 승려)이 집에 와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로 인해 임신하였다. 아이를 낳으니 골상(骨相)이 준수하고 시원하며, 근기와 정신이 영명하고 고매하여 어릴 때에도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항상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홀연히 비범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세(塵世, 티끌 같은 속세)에서는 정착할 곳이 없다" 하였다. 국사는 이때부터 매운 것과 비린내 나는 음식물을 끊고, 나이 겨우 아홉살이 되던 해에 출가(出家)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열한 살 때에 선사(禪師)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금산사(金山寺)
3의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
4를 받았다.
국사는 천품이 슬기롭고 뛰어났으며, 널리 외전(外典, 불전 이외의 책)에 능통하여 이것으로 교리를 더욱 윤색(潤色)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문답에서 말하고 변론하는 것이 민첩하고 빠르기가 마치 화살틀에서 발사한 화살과 같아서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공경(公卿)과 이름난 유학자와 운치 있는 문사들이 그의 풍채를 우러러 교제하기를 원하였으니, 젊을 때부터 이처럼 이미 명망이 있었다.
명종(明宗) 원년(1170)에 처음으로 승과(僧科)를 거행하였다. 이때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 선발하여 뽑음)을 관장하였는데,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내일 왕자(王者)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고 하더니, 이날 국사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사의 예전 휘(諱)는 학돈(學敦)이었다. 이 해에 삼각산(三角山, 서울 북한산)에 놀러 갔다가 도봉사(道峯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 그래서 결국 지겸으로 고쳤다.
대정(大定,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기유년(명종 19, 1189)에 처음으로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금나라 장종(章宗)의 연호) 4년(명종 23, 1193)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제수되었고, 7년(1196)에는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태화(泰和, 금나라 장종의 연호) 4년(신종 7, 1204)에는 또 대선사(大禪師)
5가 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자, 무릇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해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도 또한 선종의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승안(承安, 금나라 장종 의 연호) 4년(신종 2, 1199)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 지금의 경남 金海)에서 선회를 개설하고 주관할 사람을 청하니, 왕이 국사에게 명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에 즈음하여 현령(縣令) 이중민(李中敏)의 꿈에 천인(天人)이 말하기를, "깨끗한 불국토(佛國土, 불법으로 이루어진 이상의 세계)에 어찌 감옥이 텅 비지 않는가?" 하였다. 이중민은 꿈을 깨자 온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감옥에 가서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니, 이 소문을 들은 자는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화(泰和, 금나라 장종의 연호) 무진년(희종 4, 1208)에 가뭄이 심하여, 왕이 국사를 내도량(內道場, 궁궐 안에 있는 절)으로 맞아들여 설법하게 하였다. 5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국사는 분발하여 부처에게 빌기를, "불법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국왕의 힘을 입어서 행해지는 것인데, 이제 만약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영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얼마 후에 단비가 쏟아졌다. 그때 세상에서는 그 비를 화상우(和尙雨)라고 불렀다.
국사는 효성이 지극하여, 무릇 공양물을 얻을 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내고 나서 비로소 자신이 먹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석천(帝釋天)
6에게 빌기를, "만일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원하건대 이 자식의 목숨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얼마 후에 집의 하인이 달려와서, "마님이 이미 일어나셨습니다"고 하니, 그때 사람들이 효성으로 감격시킨 소치라고 하였다.
태안(泰安, 금나라 장종의 연호) 신미년(희종 7, 1211)에 국청사(國淸寺, 개경에 있던 절)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금나라 永帝의 연호) 2년(강종 2, 1213 )
7에 강종(康宗)이 즉위하자 조종(祖宗, 선왕)의 구례(舊例)에 따라 불가의 명망이 두터운 자를 얻어서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 진강공(晉康公, 무인집정자 최충헌(崔忠獻)의 봉호)이 국정을 맡고 있어, 왕을 위하여 왕사를 인선하게 되었다.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
8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구하였는데, 국사보다 나은 이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국사를 추천하였다. 왕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자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니, 국사는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돈독히 청하기를 두 번 세 번 거듭하니 국사가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였다. 왕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사신 두 사람을 보내어 국사가 주석하는 보제사(普濟寺, 개경에 있던 절)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책봉하였다. 국사는 책봉을 받고 나서 드디어 궁궐로 들어가서 친히 스승의 예를 받았다.'
왕이 광명사(廣明寺, 개경에 있던 절. 선종 과거를 치르던 선종의 중심 사찰)가 궁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거듭 거돈사(居頓寺,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던 절)를 본사(本寺)로 삼아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병이 나고 국사도 등에 종기가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자, 국사가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왕의 몸이 편안하지 않으신데 내가 다행히 병이 났으므로 왕의 병을 내 몸에 옮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너희는 내가 나으라고 기도하려 하는가?" 하였다. 왕이 승하하고 지금의 왕(고종 : 高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부왕의 스승을 편안하게 한다 하여 다시 국사의 예를 높이니, 은총과 지우(知遇)가 더욱 성대하였다. 진강공도 사랑하는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삭발하고 문인이 되게 하였고, 그 밖의 사대부들 또한 그렇게 하였으니, 제자들의 많음이 근고에 없던 일이었다.
정우(貞祐, 금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5년(고종 4, 1217)에 갑자기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집에서 태어나 왕의 스승까지 되었으니 분에 족하다. 어찌 은총을 탐내어 궁궐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매우 간곡하게 비니, 왕은 부득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花藏寺)가 환경과 지형이 깨끗하고 좋으며 땔나무와 물이 풍족하다 하여 그곳에 가서 편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 할 때 진강공이 국사를 맞이하여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진강공이 나가서 절하고 친히 국사를 부축하여 뜰에 올랐다. 떠나는 길에 오르니 좋은 말을 증정하고 또 문객(門客) 등을 보내어 국사를 호위하게 하였다. 국사가 비록 천리 밖에 있었으나 그를 돌봐 주는 왕의 마음은 그침이 없어, 자주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안하고 선물을 보내는 일 또한 거르는 달이 없었다.
절에 내려온 지 13년째인 기축년(고종 16, 1229) 6월 15일에 우뢰가 사납게 일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졌는데, 이날 국사가 작은 병세를 보였다. 국사가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손발을 씻고 문인 현원(玄源)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국왕과 현재 정승인 진양공(晋陽公,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아들 최우(崔瑀))과 고승(高僧)인 송광사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고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일을 마치자 한참 후에 국사가 말하기를, "오늘은 떠나는 것이 아직 편치 않으니 후일이 되면 작별하자" 하고 드디어 잠자리에 들었다. 8일에 국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정광(定光)은 고요하고 고요하며, 혜일(慧日, 부처의 지혜)은 밝고 밝다. 법계(法界)와 진환(塵寰, 티끌 같은 속세)이 배꼽 둘레에 갑자기 나타난다" 하였다. 어떤 승려가 묻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뒷날 밤 달이 처음 밝을 때 내 장차 홀로 가리라' 하였는데, 어디가 바로 스님이 홀로 가실 곳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푸른 바다 광활하고 흰 구름 한가롭다. 터럭 하나라도 가져다가 그 사이에 붙이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대고 홀연히 앉아서 운명하였는데, 얼굴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 빛은 붉고 윤택하였다.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첨례(瞻禮, 우러러 보며 예배함)하러 달려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왕은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근신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조광취(趙光就)와 일관(日官) 등에게 명하여 상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드디어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주워서 등선산(登禪山)의 기슭에 장례지냈다. 이어 제서(制書, 왕의 영을 내리는 글을 적은 문서)를 내리어 정각국사(靜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향년이 85세이며 승랍(僧臘, 출가한 이후의 나이)이 75년이었다.
국사는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고 천성대로 이치에 따를 뿐이었다. 비록 큰 절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나, 매양 식사할 때가 되면 여러 사람보다 먼저 나가서 손수 발우(바리때, 승려들이 공양하는 그릇)를 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승려들과 똑같이 먹고 별도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지성을 다하여 비록 몹시 추운 겨울이나 매우 더운 여름이더라도 조금도 자세를 바르지 않게 하거나 게을리 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란 노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행하였으니, 아! 참으로 화신(化身)한 보살이로다. 그 감응과 영이(靈異)한 일들은 비록 많으나 모두 도의 경지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것이요, 또 후인들이 괴이하고 허탄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곽운(廓雲)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 비석을 아직 세우지 못해, 신 등은 깊이 한스럽게 여깁니다. 글을 잘하는 이에게 청하여 돌에 새겨서 영구히 전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소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 액(額)을 하사하여 정각국사비라고 하였다. 신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재배하고 명(銘)을 짓는다. 이르기를,
달마(達摩, 중국 선종의 초조)가 마음을 전하여 신령한 빛이 동방에서 빛났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아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하는구나.
밝고 밝은 국사이시여. 태양을 들고 걸으시니,
한 번 연기 기운이 열리매 몽매함이 모두 사라졌도다.
법왕(法王)이 세상에 나오심이여. 조사의 달이 거듭 빛나도다.
깨달음의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으니 친히 젖먹여 기르고,
또 날개로 새끼를 덮어 주고 내놓아서 날게 하였네.
복을 심음이 많고 오래니 윤택을 흘러 보냄이 끝이 없고,
천자가 존귀함을 굽히어 북면하고 유익함을 청하였네.
살아서는 왕의 사범이 되고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네.
귀감이 이제 없어졌으니 어디에서 법칙을 취할 것인가.
왕이 소신에게 명하여 사적이 어둠에 묻히지 않기를 기약하시매,
신은 절하고 비명을 새겨 산과 더불어 길이 짝하게 하노라.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이여,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릴지어다.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